1부 돌아온 사람
3화. 겹겹의 페인트 아래 새겨진 고래
이불을 걷어낸 발바닥에 마룻바닥의 찬 기운이 먼저 닿았다. 파도 소리는 방 안에서 들을 때보다 복도로 나서자 한층 넓어졌다. 302호 문을 닫고 3층 복도를 걷는 동안 그 소리는 벽을 타고 낮게 따라왔다. 낮의 사람 냄새가 빠진 복도는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고, 그 아래로 먼지가 정지한 채 떠 있었다.
복도의 공기는 방보다 몇 도쯤 낮았다. 맨발 밑에서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발목까지 기어올랐고, 나는 팔을 감싸 쥐었다. 벽에 붙은 소화전 유리 안쪽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바깥의 습기가 건물 안까지 스몄다는 뜻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리퍼를 신지 않은 발바닥이 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며 작은 소리를 냈고, 그 소리마저 파도가 삼켰다. 복도 끝, 옥상으로 오르는 철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밀자 경첩이 짧게 울었다. 스무 해 전에도 이 문은 이렇게 울었다. 밤마다 이 소리를 죽이려고 손잡이를 반쯤 들어 올린 채 밀던 버릇이 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문틈으로 바깥 공기가 먼저 얼굴을 쳤다. 낮보다 습하고 무거운, 물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였다.
옥상은 비어 있었다. 방파제 끝의 붉은 등이 저 아래에서 깜빡였고, 그 너머는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되지 않는 검은 면이었다. 파랗게 칠한 난간이 달빛을 받아 젖은 것처럼 번들거렸다. 낮에 언덕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던 그 색이, 이 거리에서는 페인트 특유의 매끈한 광택으로 보였다. 나는 난간 쪽으로 걸어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새 페인트 냄새가 났다. 그 밑에서 짠 내가 배어 나왔다. 페인트는 새것이었지만 쇠는 여전히 소금기를 붙들고 있었다. 손바닥을 얹은 채 남쪽 모서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쇠의 표면은 매끈하게 이어지다가, 모서리에 이르기 직전에 손끝을 붙잡는 데가 있었다. 미세한 홈이었다. 페인트를 몇 겹이나 덮어썼는데도 완전히는 메워지지 않은, 어떤 단단한 것의 끝으로 눌러 새긴 자국.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손톱을 세웠다. 페인트 안쪽에 갇힌 선의 방향을 손톱 끝이 더듬었다. 둥근 등이 있고, 그 위로 짧게 뻗어 오른 선이 있었다. 손톱으로 긁어낸 자리를 달빛 쪽으로 기울여 보았다. 서툰 선 몇 개가 물을 뿜는 짐승의 등을 이루고 있었다. 고래였다.
여름이 새긴 것이었다. 그 밤, 여름은 목에 걸고 다니던 열쇠 뭉치에서 열쇠 하나를 뽑았다. 손톱만 한 은색 열쇠였다. 여름은 난간 앞에 쪼그려 앉아 그 끝을 쇠에 대고 눌렀다. 쇠와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긁을 때마다 끼익, 하고 이가 갈리는 것 같은 소리가 옥상의 밤공기를 짧게 찢었고, 나는 그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좀 조용히 해. 아래층에 들리겠다.”
“안 들려. 파도 소리가 더 크잖아.”
여름은 대꾸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페인트가 하얗게 부스러져 나오고 그 아래 회색 쇠가 드러날 때까지, 여름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열쇠 끝에 힘을 주었다. 은색 열쇠날에 페인트 가루가 하얗게 묻었다. 등을 먼저 긋고, 물을 뿜는 선을 그 위에 짧게 얹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될 자리를 한 번 콕 찍었다. 여름은 몸을 뒤로 물려 자기가 새긴 것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봐. 고래 같지?”
“고래보다는 그냥 돌덩이 같은데.”
“눈 없어서 그래. 이제 눈 있잖아.”
나는 고래 옆의 매끈한 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무 해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었다. 여름은 그날 열쇠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열쇠 끝에 아직 페인트 가루가 묻어 있었다.
“여기, 니 것도 하나 새겨. 나란히.”
나는 받지 않았다. 손을 뒤로 빼며 웃었던 것 같다.
“아니, 그게, 손재주가 없어서.”
여름은 잠깐 나를 보다가 열쇠를 도로 목에 걸었다. 더 권하지 않았다. 그게 다였다. 손재주 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나도 알았고, 아마 여름도 알았을 것이다. 나란히, 라는 말 앞에서 나는 늘 손을 뒤로 뺐다. 그 자리는 스무 해가 지나는 동안 비어 있었다. 사람들이 몇 번이나 이 난간을 새로 칠하고, 색이 하늘색에서 흰색으로, 다시 지금의 파랑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그 빈자리만은 아무도 채우지 않았다.
손끝이 홈을 끝까지 훑어 내렸다. 페인트에 덮인 선의 굴곡이 손가락 마디마다 걸렸다 풀렸다. 그 감각이 손끝을 타고 팔로 올라오는 순간, 2004년의 밤이 지금 이 옥상의 축축한 공기와 정확히 같은 온도로 밀려들었다. 그해 여름의 파도도 이렇게 쳤다. 여름은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서, 목에 건 필름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놀렸다.
“너는 왜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 안에 넣고 다녀? 무겁지도 않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반쯤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고, 난간 위에 얹은 손끝으로 페인트 자국만 문질렀다. 그 사이 파도 한 번이 완전히 밀려왔다 빠져나갈 때까지 옥상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여름은 대답을 기다리다 말고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초점을 맞추는 짧은 소리가 났고, 셔터가 한 번 눌렸다. 필름이 한 칸 감기는 톱니 소리가 이어졌다.
“됐어. 나중에 현상하면 알겠지.”
여름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무엇을 알게 된다는 것인지 묻지 못했다. 그 필름이 스무 해 뒤 어디에 있는지, 나는 지금 안다. 옥상 아래 302호, 창가 의자 위에 던져둔 가방 안주머니에 들어 있다. 손끝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 무게는 몸이 먼저 기억했다. 이사를 열 번 다니는 동안 한 번도 꺼내 현상하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감긴 그대로였다.
바다에서 파도가 다시 부서졌다. 나는 빈자리에 얹었던 손을 거두지 못하고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새겨야 할 것이 아직 새겨지지 않은 채로, 난간은 여전히 바다를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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