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파도가 높아지는 밤
16화. 유리창 너머의 노란 빛과 X자
라디오는 새벽부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남해안 전역에 태풍주의보가 내려졌고, 오후부터 바람이 크게 일겠다는 목소리가 주방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아저씨는 볼륨을 줄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말은 밥상 위에도, 마당의 빨랫줄에도 얇게 걸려 있었다.
재하는 커피를 반쯤 남기고 일어섰다. 잔 안쪽에 갈색 테가 앉았다. 그는 캐리어 손잡이를 뽑아 세우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여름아, 상황 정리되면 연락해. 서울에서 봐.”
매끈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끝에 어딘가 걸음을 재촉하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여름은 마당 끝에서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
“어. 조심히 가.”
그게 다였다. 여름의 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언덕을 돌아 택시가 내려가는 동안, 여름은 렌즈를 들지도,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나는 세면장 창가에 서서 그 배웅을 봤다. 이틀 밤 문 앞을 서성이던 발소리, 두 번의 노크, 켜지지 않던 201호의 불. 그러다 사흘째 밤에는 그 발소리마저 끊겼다. 노크도 없었고, 복도는 아침까지 조용했다. 그 정적이 나를 더 오래 붙들었다. 그 모든 것이 택시 한 대와 함께 언덕 아래로 사라지는데도, 나는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그 놓이는 마음이 또 미웠다. 재하가 짧게 인사할수록, 그 짧음에 안도하는 내가 자꾸 작아졌다.
택시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여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고로 갔다. 문짝이 삐걱 열리고, 잠시 뒤 여름은 청테이프를 한 손에 들고 나왔다. 은색 롤이 손목에 걸려 흔들렸다. 그 애는 나를 지나쳐 1층으로 향했다. 인사도, 눈길도 없었다. 나는 마른 걸레를 쥔 채 그 등을 봤다.
바람은 점심을 지나면서 눈에 띄게 세졌다. 우리는 1층 유리창마다 테이프를 X자로 붙였다. 여름이 안에서 붙이고, 나는 바깥에서 붙였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손이 오갔다. 여름의 손끝이 유리에 닿는 자리마다 뿌옇게 김이 서렸다가 이내 마르곤 했다. 나는 그 김이 사라지는 자리를 따라 테이프를 눌렀다. 손바닥이 겹쳐졌다가, 여름이 손을 떼면 어긋났다.
“너 요즘 왜 그래.”
여름이 갑자기 물었다. 나는 새 테이프의 끝을 이로 끊느라 못 들은 척했다. 롤에서 테이프가 길게 풀리는 소리가 바람 사이를 갈랐다.
“사흘 동안 옥상도 안 오고. 문 두드려도 대답도 안 하고.”
여름이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손톱이 유리에 닿는 소리가 내 쪽으로 또렷하게 건너왔다.
“아니, 그게.”
거기까지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손안의 테이프만 길게 찢어 창틀에 눌러 붙였다. 접착면이 유리에 닿아 쩍, 하고 달라붙었다. 나는 그 소리 뒤에 숨었다. 할 말은 명치 아래 어딘가에 걸려서, 아무리 밀어 올려도 목까지 오지 않았다. 여름의 낙선 통지서를 봤다는 것, 사치라는 말이 자꾸 내 안에서 맴돈다는 것, 물속에서 삼킨 말이 아직도 젖은 채 나를 붙들고 있다는 것. 어느 하나도 유리를 통과하지 못했다.
여름이 유리 너머에서 나를 똑바로 봤다. 태풍이 오기 전의 빛은 이상하게 노랬다. 하늘이 낮게 내려앉고, 그 노란 빛 속에서 여름의 얼굴만 또렷했다.
“안 물어보는 건 너였잖아.”
여름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근데 이제 나도 너한테 안 물어볼게.”
그 말이 유리를 통과해 내 안쪽 어딘가를 정확히 갈랐다. 언젠가 여름이 옥상 계단을 내려가며 남기고 간 물음이 있었다. 너는 나한테 왜 아무것도 안 물어. 그 물음이 이제 방향을 바꿔, 여름의 입에서 내 앞으로 돌아와 서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았어야 했다. 사흘 전에도, 어젯밤에도, 지금도. 그런데 나는 여전히 손안의 테이프만 만지작거렸다. 롤이 손가락 사이에서 헛돌았다.
여름은 남은 테이프를 창틀에 탁 내려놓았다. 은색 롤이 나무 위에서 한 번 구르다 멈췄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도 크지 않았다. 그게 더 견디기 어려웠다.
빨랫줄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렸다. 집게에 물린 시트가 배처럼 부풀었다가 꺼졌다. 멀리서 파도가 평소보다 높게 올라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름이 붙이다 만 X자를 오래 바라봤다. 위쪽 절반만 붙은 테이프가 반대편으로 늘어져 유리에 반쯤 매달려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여름이 남긴 롤에 그대로 감겨 있었다. 나는 그 절반을 마저 붙이지 못하고 서 있었다. 손을 대면 무언가가 완전히 끝나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날 밤, 바다는 밤새 뒤척였다. 파도가 자갈을 밀어 올렸다가 끌고 내려가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어왔다. 창유리가 바람에 낮게 울었고, 낮에 붙인 테이프가 그 진동을 받아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창틀 위에 볼펜을 쥐고 앉아 있었다. 창틀에는 지난 밤들에 그어둔 짧은 금들이 나란히 남아 있었다. 볼펜 끝을 그 옆에 갖다 대기만 하면 됐다. 손끝만 움직이면 됐다. 그런데 팔이 올라가지 않았다. 유리 밖에서 시트가 다시 부풀었다가 꺼지는 소리가 났다.
여름은 이제 옥상으로 올라오지 않는다. 안 물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볼펜을 내려놓고, 나뭇결에 얕게 파인 금들을 손끝으로 하나씩 훑었다. 손톱이 자국마다 걸렸다가 미끄러졌다. 마지막 금 옆에는 빈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한 번 크게 몰아쳐 유리를 밀었고, 테이프의 X자가 그 힘을 받아 팽팽하게 당겨졌다.
볼펜 끝이 나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파도가 자갈을 한 번 긁고 물러났다. 나는 볼펜을 쥔 채로 오래 멈춰 있었다. 아래층에서 여름이 두고 간 테이프 롤이 바람에 창틀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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