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파도가 높아지는 밤
14화. 물어야 할 것이 늘어나는 밤
“여기 맞네. 우리 여름이가 여름 내내 여기 있었단 말이지.”
서울 억양이 마당보다 먼저 도착했다. 택시가 언덕 끝에서 멈추고, 흰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남자가 내렸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짐도, 목적도 없이 그냥 사람만 온 것처럼 가벼웠다. 나는 계단 난간을 닦다 말고 그를 봤다. 걸레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져 시멘트에 검은 점을 남겼다.
주방 문이 열리고 여름이 나왔다. 나는 그 애의 걸음이 한 박자 빨라지는 걸 봤다. 반가움인지 놀람인지 나로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엇이 그 걸음 안에 섞여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공기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내가 서 있는 마당이 갑자기 남의 집 같았다.
“선배가 여길 어떻게.”
“네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왔지, 우리 여름이.”
그가 ‘우리’라고 말할 때마다 걸레를 쥔 손끝이 괜히 축축해졌다. 여름은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었다. 마당의 개도, 담벼락의 능소화도 찍던 그 애가, 재하를 향해서는 렌즈를 들지 않았다. 그냥 두 손으로 카메라 몸통을 가만히 감싸 쥐고만 있었다. 나는 그게 오히려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툇마루에서 신문을 접고 있던 고래 아저씨가 재하를 위아래로 훑었다.
“밥은 묵었나.”
“아, 저는 괜찮습니다. 여름이랑 나가서 먹으려고요.”
재하가 매끄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밀려났다. 나가서, 라는 말이 마당의 볕을 통째로 걷어 가는 것 같았다. 고래 아저씨는 더 권하지 않고 신문으로 도로 눈을 내렸다. 이 집에서 아저씨의 다정함은 밥그릇으로만 오는데, 그 밥그릇을 거절당한 노인의 등이 잠깐 굽었다.
여름이 나를 봤다.
“너도 같이 갈래?”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재하가 반 박자 먼저 끼어들었다.
“우리 오랜만이니까 둘이 얘기 좀 하자, 여름아.”
부드러운 말이었다. 부드러워서 더 분명한 선이었다. 나는 그 선 바깥에 서 있었다.
“아니, 그게… 나는 여기 정리할 게 있어서.”
걸레를 든 손을 들어 보였다. 정리할 것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제 닦은 유리창은 아직 깨끗했고, 시트도 다 걷어 개어 둔 뒤였다. 여름이 나를 한 번 더 봤다. 무슨 말을 기다리는 눈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확인하는 눈이었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 애는 곧 고개를 돌렸고, 재하와 나란히 언덕을 내려갔다.
유리창 너머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봤다. 재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깨를 조금 기울였고, 여름이 그 말에 웃는지 목에 건 카메라가 걸음마다 흔들렸다. 언덕은 짧았다. 두 사람은 금방 담장 모퉁이로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방금 내가 무엇을 빼앗겼는지 이름조차 붙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직 내 것도 아니었던 자리를, 나는 이미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걸레를 헹구러 수돗가로 갔다. 물을 틀어 놓고 한참을 그냥 흘려보냈다. 손등에 붙어 있던 옥상 페인트 가루가 물에 씻겨 내려갔다. 어제 난간에 두고 온 캔 두 개가 떠올랐다. 하나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하나는 반쯤 비운 채. 미지근하게 데워졌을 그것들을 나는 오늘도 치우지 못했다.
그날 오후는 이상하게 길었다. 손님 둘이 체크아웃을 했고, 새 손님은 저녁에나 든다고 했다. 나는 하지 않아도 될 청소를 했다. 복도를 두 번 쓸고, 201호를 뺀 방들의 문고리를 다 닦았다. 열쇠 구멍 옆에 붙은 손톱만 한 고래 스티커까지 물걸레로 문질렀다. 201호 앞에서는 손이 멎었다. 그 문은 안 닦고 지나쳤다.
밤이 되어도 여름은 옥상에 오지 않았다.
나는 302호 창가에 앉아 볼펜을 쥐었다. 창틀에는 얕은 금들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하나씩. 어젯밤까지의 눈금을 손끝으로 세어 보다가, 나는 볼펜을 도로 내려놓았다. 오늘은 셀 것이 없는 날이었다. 여름이 올라오지 않은 밤에 하루가 지났다고 금을 긋는 건, 이 눈금이 지금 무엇을 세고 있는지를 스스로 들키는 일 같았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볼펜 뚜껑을 딸깍 닫았다.
창밖으로 마당을 내려다봤다. 여름이 혼자 돌아와 담벼락에 기대 서 있었다. 재하는 보이지 않았고, 언덕 아래에서 택시 문 닫히는 소리가 아까 한 번 났던 것도 같았다. 그 애의 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끼워져 있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여름은 낯설었다. 늘 무언가를 들여다보거나 눌러야 하는 사람이 빈손으로 서 있으니, 그 애가 지금 무엇을 견디고 있는 건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내려가고 싶었다. 무슨 일이냐고, 재하 선배는 어떻게 아는 사람이냐고, 아까 나가서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물어야 할 것들이 목 아래에서 줄을 섰다. 슬리퍼를 꿰어 신으려고 발을 뻗었다가, 나는 계단 앞에서 멈췄다.
너는 나한테 왜 아무것도 안 물어.
어젯밤보다 며칠 전, 그 애가 남기고 내려간 목소리가 계단 초입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이제 와 묻는 것은, 그동안 묻지 않은 것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물을 자격은 묻지 않고 지나온 날들 어딘가에서 이미 놓쳐 버린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또 묻지 못했다.
창턱에 이마를 댔다. 페인트 냄새가 아직 옅게 남은 나무가 서늘했다. 마당의 여름은 오래 그대로 서 있었다. 담벼락 위로 밤하늘이 낮게 내려앉았고, 바다 쪽에서 파도가 자갈을 한 번씩 긁고 물러났다. 물어야 할 것이 하루 사이에 또 하나 늘었다. 나는 그 무게를 어디에 내려놓아야 할지 몰라서, 이마를 댄 채로 그 애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기만 했다. 201호 창에 불이 켜졌다가, 이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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