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옥상의 계절
13화. 밤을 두 동강 낸 비명
여름이 캔 하나를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그걸 받아 쥐기만 하고 따지 않았다.
밤은 낮의 열기를 미처 놓지 못해 미지근했다. 난간에 팔을 얹자 페인트가 손목 안쪽에 눅진하게 달라붙었다. 여름은 카메라를 목에 건 채였고, 오늘은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그냥 나를 봤다. 렌즈 대신 맨눈으로, 오래.
나는 그 눈길이 닿은 자리가 데워지는 것 같아 검은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파제에 부딪는 파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낮에는 사람들 말소리에 묻혀 있다가 밤이 되어야 제 몫을 찾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세듯 들었다. 한 번 부서지고, 잠시 조용하고, 다시 한 번.
여름은 캔을 따지도 않고 난간에 걸터앉은 채 계속 나를 보고 있었다. 곁눈으로도 그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캔의 이음매를 손톱으로 긁었다. 뜯지도 못할 거면서 자꾸 그 자리만 만졌다. 무슨 말이든 먼저 꺼내면 이 침묵이 끝날 텐데, 그러면 여름이 무슨 대답을 할지 몰라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낮 동안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굴려본 문장들이 있었다. 여름의 서랍에서 낙선 통지서를 봤다는 말, 사치라던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느냐는 물음. 그런데 막상 여름이 이렇게 정면으로 앉아 있으니 그 문장들이 하나도 제 순서를 찾지 못했다.
“바다가 오늘 좀 시끄럽네.”
내가 겨우 그렇게 딴소리를 하자, 여름은 대답 없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을 한 번 내쉰 것에 가까웠다. 그러고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리고, 나를 향해 몸을 조금 틀었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끝을 올리지 않은 문장이었다. 묻는 게 아니라 이미 답을 다 쥔 채 확인만 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얇은 금속이 얕게 우그러졌다. 여름의 서랍에서 봤던 낙선 통지서와, 사치라는 말과, 물속에서 여름이 남기고 간 문장들이 한꺼번에 목구멍 아래에서 부풀었다. 아껴두느라 삼켰던 것들이 처음으로 문턱까지 밀려 올라왔다.
여름은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나는 여름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 발끝만 봤다. 슬리퍼 밖으로 나온 발가락이 시멘트 위에서 한 번 오므라들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아니, 그게…”
입을 떼는 것과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아래층에서 여자 손님의 비명이 밤을 두 동강 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단으로 몸을 던졌다. 여름의 슬리퍼가 층계마다 딱딱 소리를 냈고, 나는 맨발이었다. 발바닥에 닿는 계단이 미지근했다. 2층 복도 끝, 손톱만 한 고래 스티커가 붙은 204호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손님은 세면대 아래에서 기어 나온 손바닥만 한 게 한 마리를 보고 침대 옆 의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한 손엔 슬리퍼를 무기처럼 쥐고, 다른 손으로는 벽을 짚은 채였다. 파마머리가 반쯤 흘러내렸고,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있었다.
“저거, 저거 좀 어떻게 해주세요, 빨리요!”
손님이 의자 위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의자 다리가 삐걱거렸다. 나는 그 의자가 넘어갈까 봐 문틀을 잡고 서 있었다.
고래 아저씨가 파리채를 들고 게를 구석으로 몰았다. 러닝셔츠 차림에 슬리퍼를 짝짝이로 꿴 채였다. 급하게 올라온 모양이었다.
“치아라 마. 그기 사람 무나.”
아저씨는 게를 향해서인지 손님을 향해서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파리채를 바닥에 툭툭 댔다. 게는 집게발을 치켜들고 옆으로 종종 물러섰다. 아저씨가 파리채로 슬쩍 건드리자 게는 방향을 홱 틀어 침대 밑으로 파고들려 했고, 아저씨는 “어어” 하며 무릎을 꿇고 게 앞을 막았다. 그 바람에 러닝셔츠가 말려 올라가 등이 다 드러났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손님요, 고놈 안 뭅니더. 여름밤에 하수구 타고 올라온 놈이라예. 여 바닷가는 원래 이래예.”
아저씨는 손님을 안심시키려는 듯 그렇게 말했지만, 손님은 의자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난장판 속에서 여름이 카메라를 들었다. 이번엔 렌즈를 내리지 않았다. 찰칵. 의자 위에서 슬리퍼를 든 손님의 뒷모습과 파리채를 겨눈 아저씨의 굽은 등이 한 컷에 담겼다. 셔터 소리가 비명이 갈라놓은 밤의 틈으로 짧게 끼어들었다. 옥상에서는 그렇게 아끼던 셔터를, 여름은 이런 데서 아무렇지 않게 눌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방금 옥상에서 나를 몰아붙이던 사람과 같은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나는 1층 창고에서 걸레를 가져와 세면대 밑을 닦기 시작했다. 게가 끌고 나온 물이 타일 사이 홈을 따라 번져 있었다. 아저씨는 결국 파리채 대신 신문지로 게를 덮어 두 손으로 감싸 쥐었고, 게의 집게발이 신문지를 사각사각 긁는 소리가 났다. 아저씨가 게를 신문지째 들고 창밖 어둠으로 던지자 아래쪽에서 툭 하는 소리가 났다. 손님은 그제야 의자에서 내려와, 다른 방으로 옮겨 달라고 했다.
무릎을 꿇고 바닥을 문지르는 동안, 나는 가슴 한구석이 스르르 풀리는 걸 느꼈다. 옥상에서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이 다시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 자리를 안도가 채웠다. 삼킬 핑계가 하늘에서 떨어진 셈이었다. 세상이 나 대신 문장을 끊어주었고, 나는 그게 고마웠다. 걸레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나는 그 고마움을 타일에 대고 오래 문질러 닦았다.
소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손님이 205호로 옮겨 가고, 아저씨가 파리채를 제자리에 걸고 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걸레를 빨아 마당 빨랫줄에 널었다. 손끝에서 물비린내와 페인트 냄새가 섞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옥상으로 다시 올라갔다.
두 개의 캔은 난간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손대지 않은 내 것과, 반쯤 비운 여름의 것. 둘 다 미지근하게 데워져 있었다. 여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는 여름이 앉아 있던 시멘트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온기가 남았는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몸을 숙여 아래를 보니 201호 창에 불이 이미 꺼져 있었다. 소동이 정리되기도 전에, 여름은 옥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곧장 방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캔 두 개를 그대로 두고서.
바깥에서 파도가 다시 자갈을 긁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아래에서 비명이 들렸을 때 내 안에서 가장 먼저 올라온 것이 놀람이 아니라 안도였다는 것을. 여름이 정면으로 던진 문장 앞에서, 나는 도망칠 구멍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그 비명에 매달렸다. 그리고 지금은, 여름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또 한 번 안심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그 밤 처음으로 견딜 수 없이 미웠다. 나는 미지근한 캔 두 개를 난간에 그대로 둔 채, 여름이 남기고 간 문장도 그대로 둔 채, 내려가지도 못하고 오래 서 있었다. 손목에 붙은 페인트가 마르면서 살갗을 얕게 당겼다. 아래에서는 아무 소리도 올라오지 않았다. 201호의 어둠은, 끝내 다시 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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