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매년 온다12화 / 전 32화5

2부 옥상의 계절

12화. 뻑뻑한 서랍과 부치지 않은 엽서

강선우


회전 진열대에서 고른 엽서는 세 장이었다. 오일장에서 필름을 사던 날, 여름이 좌판 쪽으로 먼저 가버린 틈에 나는 문방구 안쪽 진열대를 소리 없이 한 바퀴 돌렸다. 파도가 지나치게 파랬다. 갈매기는 하늘 한구석에 못으로 박아둔 것처럼 떠 있었다. 부칠 데도 없으면서 나는 세 장을 집어 봉투에 넣었다. 왜 샀는지는 그때 몰랐다.

그 엽서가 소용을 찾은 건 며칠이 지난 밤이었다. 바다에서 삼킨 말은 내일이면 쉬워지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옥상에서 캔을 따고, 조식 접시를 나르고, 여름이 렌즈를 들었다 내리는 걸 보면서, 아무것도 꺼내지 못했다. 삼킨 말은 그대로 안에 남아 자리를 넓혀갔다. 그 밤 나는 창틀에 그날 금을 긋고, 볕에 마른 담요를 무릎에 얹고 앉았다. 봉투에서 엽서 한 장을 꺼냈다.

볼펜 끝을 파란 바다 뒷면에 댔다. 한 줄이 나오기까지 오래 걸렸다.

네가 물속에서 안 보여도 있는 건 있다고 했을 때, 나는 사실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어.

거기까지 쓰고 멈췄다. 준비하고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만 준비된 대답이 무엇이었는지는 나도 끝내 몰랐다. 나는 볼펜을 종이에 대고 몇 번 눌렀다 뗐다. 잉크가 점으로 번졌다. 낙선 통지서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고 했다. 반쯤 열린 방문 너머로 본 종이 석 장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세 번 떨어진 게 너를 설명하진 않아.

써놓고 보니 낯이 뜨거웠다. 나는 그 줄 위에 얇게 금을 그어 지웠다. 지운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 볼펜 자국이 앉은 자리는 오히려 더 도드라져서, 지운 문장이 지우지 않은 문장보다 잘 읽혔다.

다 쓰고 나면 서랍을 열었다. 창가 나무 서랍은 뻑뻑해서 손잡이를 두 번 당겨야 열렸다. 안에는 이미 두 장이 겹쳐 있었다. 하나는 여름이 술래처럼 웃던 밤에 쓴 것이었고, 하나는 오일장에서 여름이 내 손목을 잡아끌던 순간에 대해 쓴 것이었다. 나는 세 번째 장을 그 위에 포갰다. 파란 바다 세 장이 나란히 가라앉았다.

서랍을 닫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완벽한 순간에 주자. 지금은 아니다. 여름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을 때 말고, 사진 얘기에 눈이 어두워질 때도 말고, 딱 맞는 밤에. 그 밤이 언제인지는 나도 몰랐다. 다만 서랍을 닫는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말을 하지 않았는데 말을 한 것 같았다. 그 비겁한 안도가 그날부터 습관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조식 접시를 나르는 손끝에서 어제의 무게가 다 빠져 있었다. 나는 계란과 김을 접시에 올리고 식탁으로 옮겼다. 여름이 콩나물 무침 그릇을 들고 반대편에서 다가왔다.

“너 어제 사진관에서 뭐 샀어.”

접시를 내려놓다 손이 잠깐 멈췄다.

“봉투 부스럭거리던데. 방까지 들고 올라가더라.”

“아니, 그게…” 나는 김이 담긴 접시를 필요 이상으로 반듯하게 놓았다. “엽서. 그냥 몇 장.”

“엽서?” 여름이 콩나물 그릇을 식탁 가운데 놓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 줄 건데.”

“아무한테도.”

대답이 너무 빨랐다. 여름도 그걸 알아챈 얼굴이었다. 여름은 목에 건 카메라를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다가, 렌즈를 내 얼굴로 향하는 대신 손가락 하나를 펴서 나를 가리켰다. 셔터를 아끼는 것처럼 손가락도 한 박자 늦게 멈췄다.

“너는 있잖아, 꼭 다 써놓고 안 보내는 사람처럼 생겼어.”

나는 콩나물 그릇을 괜히 오른쪽으로 조금 옮겼다. 이미 식탁 한가운데 놓인 걸 굳이 옮겼다. 손이 갈 데가 필요했다. 여름은 더 캐묻지 않고 남은 접시를 나르러 주방으로 돌아갔다. 슬리퍼가 마룻바닥을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

여름이 그 말을 어디까지 알고 던졌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사진관 봉투만 보고 한 말인지, 밤마다 창틀 앞에 앉아 있던 내 등을 어디선가 본 것인지. 다만 나는 그 아침에, 여름이 나보다 나를 먼저 읽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다. 도망 온 얼굴을 첫날에 읽어낸 것처럼.

그날 저녁, 여름은 약속대로 설거지를 했다. 주방에서 물소리가 길게 났다. 접시 부딪는 소리 사이로 물이 쏟아지고, 잠기고, 다시 쏟아졌다. 나는 마당 빨랫줄에서 마른 행주를 걷으며 그 소리를 들었다. 서랍 속 세 장의 엽서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세 장이 하나도 줄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그 물소리 아래서 어렴풋이 알았다. 딱 맞는 밤은 조건이 너무 많았다. 여름이 웃지 않고, 사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파도가 알맞고, 내가 겁내지 않는 밤. 그런 밤은 애초에 오지 않도록 내가 설계해둔 것이었다.

스무 해가 지난 밤에, 나는 같은 방 같은 창틀 아래 앉아 있다. 창을 반뼘쯤 열어두었더니 바다 소리가 들어온다. 그때보다 방파제가 길어져서 파도는 한 박자 늦게, 조금 낮게 밀려왔다 빠진다. 밀려올 때 물이 자갈을 긁고, 빠질 때 그 자갈들이 저희끼리 굴러 내려가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세다 보면 스무 해 전 옥상에서 캔을 따던 밤의 파도와 지금 파도가 잠깐 겹친다.

서랍은 여전히 뻑뻑하다. 나는 손잡이를 쥐었다. 놋쇠 손잡이는 밤공기에 차게 식어 손바닥에 서늘하게 들러붙는다. 표면에 낀 세월의 결이 손금에 걸린다. 두 번 당기면 열린다는 걸 손이 기억한다. 나는 한 번 당겼다. 나무가 나무에 걸려 서걱, 하고 어긋나는 소리만 났다. 손잡이를 쥔 채로 나는 멈췄다. 안에 아직 파란 바다 세 장이 겹쳐 있을 것만 같다. 지운 자리가 더 잘 보이는 문장과, 부치지 못한 이유가 그대로 가라앉은 채로.

손에서 힘을 뺐다. 손잡이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며 작게 딸깍였다. 나는 창가에서 일어나 방을 한 바퀴 돌았다. 302호는 그때 그대로다. 벽지만 두 번쯤 새로 발린 것 같고, 창틀 아래 금 그은 자리는 페인트에 덮여 흐릿한 흉터처럼 남아 있다. 나는 손끝으로 그 금을 더듬다가 다시 서랍 앞으로 돌아왔다.

무릎을 꿇고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이번엔 당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당기지 못했다. 열어서 세 장이 그대로 있으면, 나는 그 밤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셈해야 할 것 같았다. 첫 장을 쓰던 밤부터 마지막까지, 오지 않도록 내가 손수 미뤄둔 밤들을. 열어서 비어 있으면, 그건 더 무서웠다. 누군가 이미 다 읽고 가져갔다는 뜻이거나, 애초에 내가 아무것도 넣어두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바깥에서 파도가 다시 자갈을 긁었다. 나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이마를 서랍 나무면에 잠깐 댔다. 나무는 손잡이보다 덜 찼다. 창으로 든 바람이 담요 자락을 조금 들었다 놓는다. 물소리는 스무 해 전 여름이 설거지를 마치고 물을 잠그던 그 밤처럼, 한 번 크게 쏟아졌다가 뚝 그친다. 방으로 올라가던 슬리퍼 소리가, 계단 어딘가에 아직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서랍을 열지 않은 채 그 소리가 다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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