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매년 온다11화 / 전 32화9

2부 옥상의 계절

11화. 삼킨 말과 젖은 발자국

강선우


그날 밤엔 카메라가 없었다.

창틀엔 금이 열몇 개쯤 그어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올라와 볼펜을 눌러 새 금을 하나 더 파는데, 손끝에 남은 나무 가루가 습기에 눅눅했다. 방 안이 데워진 쇠처럼 뜨거웠다. 창을 열어도 들어오는 바람에 낮의 열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잠은 오지 않을 밤이었다.

마당으로 내려갔을 때 여름은 옥상이 아니라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목에 늘 걸려 있던 카메라가 없으니 어깨가 이상하게 가벼워 보였다.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밤마다 뒤척이는 사람이 내려올 걸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야, 강선우. 따라올 거지?”

대답은 듣지도 않았다. 여름은 슬리퍼를 벗어 한 짝씩 던지고 맨발로 방파제 쪽으로 걸어갔다. 시멘트 계단 아래로 검은 물이 찰박거렸다. 낮 동안 태양을 받아먹은 바다가 밤에도 미지근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여름은 뒤도 안 보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발목, 종아리, 허리, 물이 그의 몸을 한 뼘씩 삼켰다.

나는 모래 위에 섰다. 발바닥으로 낮의 열이 아직 올라왔다. 옥상 난간이라면 어디를 잡아야 할지 알았을 텐데, 여기엔 잡을 것이 없었다.

“물 밑에 오래 있던 사람은 물이 안 무서워야 되는데.”

여름이 어깨까지 잠긴 채로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며칠 전 옥상에서 나를 두고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던진 거였다. 나는 셔츠 단추에 손을 얹었다가 그냥 내렸다. 이 물에 들어가면 오늘 밤이 다른 밤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게 무서운 건지 바라는 건지 나도 몰라서, 나는 계속 서 있기만 했다.

여름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냥 물 위에 얼굴만 내놓고 나를 봤다. 재촉하지 않는 게 더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셔츠를 입은 채로 걸어 들어갔다. 물이 무릎을 지나고 허리를 지날 때 옷감이 몸에 달라붙었다. 어색하고 무거웠다. 여름이 손바닥으로 물을 튀겼고, 나는 한 박자 늦게 되받았다. 물방울이 달빛을 튕기며 우리 사이에서 흩어졌다. 여름이 소리 내 웃었다. 낮에 빨래집게를 세 개씩 물리라고 우기던 목소리하고는 다른 웃음이었다.

부서진 달이 수면에서 흔들렸다. 여름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봤다.

“고래 봤어? 진짜 고래.”

“여기서는 못 봤어.”

“나도. 근데 있잖아, 안 보여도 있는 건 있어.”

그 말을 하고 여름은 숨을 참으며 물속으로 잠겼다. 검은 물이 그의 자리를 잠깐 지웠다. 나는 그 빈 수면을 보면서 이상하게 조바심이 났다. 몇 초 뒤 여름이 숨을 내쉬며 떠올랐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에 달라붙어 있었고, 물이 턱 끝에서 떨어졌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 사람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을 끝까지 문장으로 만들었다. 그전까지는 자꾸 중간에서 흐지부지되던 생각이었다. 그날 밤엔 마침표까지 찍혔다. 여기 있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서울로도, 어디로도 가지 말라고.

파도 하나가 방파제 안쪽까지 밀려 들어와 우리를 동시에 떠밀었다. 발이 뜨고 균형이 무너졌다. 여름의 어깨가 내 팔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주 가까웠다. 여름의 속눈썹 끝에 물방울이 맺혀 달빛을 물고 있었다. 그 물방울이 떨어지기 전의 한순간, 나는 목까지 차오른 말을 느꼈다.

좋아한다고. 세 번째 낙선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집에서 뭐라고 부르든 네가 찍는 건 사치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여기 있어달라고. 말이 입술까지 왔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생각을 했다. 둘 다 옷을 입은 채 물에 빠진 우스운 꼴이고, 여름의 대답이 무엇일지 나는 아직 감당할 준비가 안 됐고, 이건 그 말을 하기에 좋은 밤이 아니라고. 조금만 더 좋은 순간에 하자고. 옥상에서, 혹은 사진을 다 보여주기로 한 두 달 뒤 그 언젠가, 완벽하게 정리된 밤에.

“아니, 그게…”

입을 뗐다가 나는 문장을 갈아탔다.

“물 차다. 이제 나가자.”

여름이 나를 잠깐 봤다. 아까 물속에서 올라올 때보다 오래 봤다. 무슨 말을 기다리는 것도 같고, 이미 다 들은 것도 같은 눈이었다.

“그래.”

여름이 먼저 물에서 걸어 나갔다. 젖은 발이 모래에 발자국을 찍었다. 방파제 쪽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그 자국이 잠깐 반짝이다가, 물기가 마르기도 전에 어둠 속으로 지워졌다. 나는 그 자국을 따라 나가면서도 여름을 부르지 못했다. 던져둔 슬리퍼를 주워 든 여름은 뒤도 안 돌아보고 계단을 올라갔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셔츠에서는 바닷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나는 젖은 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창틀 앞에 섰다. 볼펜을 쥐고 오늘 금을 하나 더 그었다. 나무에 얕은 홈이 파이는 동안, 나는 오늘 삼킨 말이 내일이면 더 쉬워질 거라고 믿었다. 내일은 물에 젖지 않은 채로, 카메라를 사이에 두지 않은 채로, 옥상의 좋은 밤에 다시 꺼내면 될 거라고.

창밖으로 파도 소리가 낮게 들어왔다. 여름의 방이 있는 아래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 조용함을 좋은 신호로 읽었다. 내일이 있으니까.

그 믿음이 스무 해를 갈 줄은 그날의 나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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