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갑과 을이 바뀌는 시간
9화. 숫자로 싸우는 법
제습기 물통이 가득 차서 삐, 삐, 두 번 울었다.
지안은 일어나 물통을 비우고 돌아왔다.
시헌은 그 사이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접혀 있던 낱장을 손끝으로 두 번 눌러 펴더니, 읽던 방향 그대로 지안 쪽으로 밀어놓았다.
“11월 3주 카멜, 12월 1주 숏패딩, 2월 물류대란.”
세 줄을 읽는 목소리가 낮았다.
“안 봤다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그럼요.”
“못 본 걸로 하죠. 대표님이 말해줄 때까지.”
지안은 종이를 받아 검은 노트 링에 맞춰 끼웠다. 톱니 자리가 어긋나서 두 번 만에 들어갔다.
“언제까지 기다릴 생각이세요.”
“제 팔레트가 하루 여든 개니까.”
시헌이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여든 개만큼은요.”
지안은 웃지 않았다.
‘이 사람은 값을 부르지 않는 방식으로 값을 올린다.’
계단을 올라가는 구둣소리가 세 칸쯤에서 멈췄다.
“모레 코엑스 리셉션, 오십니까.”
“갑니다.”
“재고 3억 태운 대표가 왜 오냐고 물어볼 겁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가는 거예요.”
구둣소리가 다시 올라갔다.
이틀 뒤, 코엑스 3층 그랜드홀.
샴페인 잔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천장 아래에서 얇게 깔렸다. 유통·플랫폼·물류 쪽 명함들이 원형 테이블 열여덟 개에 흩어져 앉았다.
지안은 등록 데스크에서 명찰을 받아 왼쪽 가슴에, 글자가 반듯하게 보이도록 붙였다.
아뜰리에 안 / 대표 서지안.
그리고 정중앙 테이블, 단상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옆 테이블에서 목소리가 낮아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지난주 폐기 3억. 소송 걸린 거 아니냐. 버티겠냐.
시선이 등에 붙었다. 지안은 등을 더 세웠다.
‘보라고 앉은 거야.’
축사는 협회장, 그다음이 태건 유통이었다.
권재혁이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넥타이 색이 홀 조명에 맞춘 것처럼 매끄러웠다.
“올해 유통은 체력전이었습니다. 원단, 물류, 소송. 다들 한 번씩 맞으셨죠.”
웃음이 돌았다.
“태건은 그 체력을 나눠 드리려고 합니다. 산하 파트너 브랜드 육성 프로그램, 내년 1분기부터 열 개 브랜드.”
박수.
그리고 재혁이 마이크를 입에서 살짝 떼더니, 굳이 홀 정중앙을 내려다봤다.
“마침 오늘 오셨네요. 아뜰리에 안 서지안 대표님.”
지안은 고개를 들었다.
“3일에 6억 하시던 분이 지난주엔 재고를 태우셨다고 들었습니다. 태건 산하로 들어오시면 그런 일 없습니다.”
잔 부딪히는 소리가 줄었다.
“지분 60%에 12억. 백화점 3개 점 즉시 입점. 물류는 물류회사가 통으로 받습니다.”
누군가 작게 감탄했다. 12억.
재혁이 마이크를 다시 당겼다.
“개인적으로도 저는 서 대표님을 오래 지켜본 사이라, 좀 안타까웠습니다.”
홀이 웃었다. 웃음의 결이 조금 끈적했다.
지안은 냅킨을 접어 잔 밑에 놓고 일어났다.
“마이크 좀 쓰겠습니다.”
사회자가 당황해서 무선 마이크를 들고 왔고, 재혁은 웃으며 단상을 반쯤 비켜줬다.
지안은 단상에 올라가 홀 전체를 한 번 훑었다.
“감사합니다, 상무님. 조건을 주셨으니 조건으로 답하는 게 예의겠죠.”
숨을 한 번 골랐다.
“태건 백화점 여성복 판매수수료 32%. 인테리어 분담금 4,500만. 정산 60일. 반품 부담 100% 입점사.”
홀 어딘가에서 잔 놓는 소리가 났다.
“저희 원가 비율은 38%입니다. 여기에 32%를 얹으면 남는 건 매출의 마이너스 2%예요.”
“3만 장 팔면, 제가 정확히 2억 4천을 제 돈으로 얹어서 태건에 드리는 구조입니다.”
웃음이 완전히 끊겼다.
재혁의 턱선이 굳었다.
“수수료는 협의 사항입니다, 서 대표님.”
“그럼 12억도 협의 사항인가요.”
지안은 마이크를 왼손으로 옮겼다.
“12억 중 9억이 3년 분할, 실적 연동이죠. 연 매출 목표 미달 시 지급 유보 및 회수 조항. 제가 잘못 봤으면 지금 정정해 주세요.”
재혁이 대답하지 않았다.
“선지급은 3억입니다. 지분 60%에 3억. 지난주 제가 태운 재고랑 액수가 같네요.”
앞 테이블에서 누가 짧게 웃었다. 이번엔 결이 달랐다.
재혁이 잔을 내려놓고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반음 낮았다.
“좋습니다. 서 대표님 계산이 그렇다면, 여기서 정정하죠.”
홀이 다시 조용해졌다.
“지분 51%. 선지급 5억, 잔금 7억은 2년 분할. 수수료는 신규 파트너 특별적용 비율 26% 적용. 인테리어 분담금은 태건 부담.”
“오.”
어디선가 감탄이 새어 나왔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눈치를 봤다.
“이 자리에서 이만큼 열어드리는 브랜드는 없습니다. 이제 안 받으실 이유가 없죠.”
‘단상에서 조건을 올렸어.’
지안은 그 대목을 놓치지 않았다.
‘조건을 올린 사람이 급한 쪽이다.’
“상무님, 방금 26%라고 하셨죠.”
“예.”
“녹취돼 있을 거예요. 뒤에 협회 촬영팀 계시죠?”
재혁의 눈꺼풀이 한 번 눌렸다.
지안은 홀 왼쪽 테이블을 향해 몸을 돌렸다.
“거기 니트 하시는 유민 대표님. 태건 본점 2년째죠. 대표님 적용 비율 몇 프로세요.”
사십 대 초반의 여자 대표가 잔을 내려놓았다. 잠깐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32요.”
“인테리어 분담금은요.”
“3,800만. 재작업까지 하면 5천 넘었어요.”
홀 안쪽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그럼 상무님. 오늘 처음 뵙는 저는 26%인데, 2년 매출 올려주신 유민 대표님은 32%네요. 이건 협의 사항인가요, 아니면 시세 조작인가요.”
“서 대표님, 자리를 좀 가리시죠.”
협회장이 옆에서 마이크를 반쯤 낚아채려 했다.
“두 분 다 좋은 말씀이신데, 이 자리는 친목 자리라서요.”
“협회장님.”
지안이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작년에 협회 이름으로 표준 수수료 권고안 내셨죠. 28% 상한.”
“...예, 권고입니다만.”
“권고를 지킨 백화점이 몇 곳인지 여기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협회장이 입을 다물었다.
옆 테이블에서 남자 목소리가 붙었다.
“저희도 반품 부담 100% 조항 때문에 작년에 시즌 통으로 날렸습니다.”
“저희는 정산 60일이라고 써놓고 실제 입금은 82일 걸렸어요.”
“영수증 있으신 분들만 말씀하세요.”
지안이 그 말을 잘랐다. 소리가 딱 멈췄다.
“감정으로 하면 상무님이 이깁니다. 숫자로 하면 우리가 이겨요.”
홀이 조용해진 자리에 지안의 목소리만 남았다.
“상무님, 51%도 사양하겠습니다. 이유는 하나예요.”
“지분 51%는 제가 다음 시즌에 무슨 색을 뽑을지 태건이 정한다는 뜻이잖아요. 그 색을 정하는 값이 5억이면, 제 브랜드가 5억짜리라는 소린데요.”
“저는 제 브랜드 값을 그렇게 안 매깁니다.”
“아직 매출 100억도 안 되는 브랜드가.”
“3일에 6억 했어요. 그 6억은 태건 도움 없이 났고요.”
지안은 홀 뒤쪽까지 목소리를 밀었다.
“그리고 그 3억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말씀드릴게요.”
“저는 지난주에 3억을 태웠습니다. 덤핑 안 하고 전량 폐기했어요. 폐기증명서 있습니다.”
“태우기 전에, 원단을 먼저 잠갔습니다.”
“이번 시즌 그 디자인 카피한 업체가 추가 생산을 못 한 이유예요. 물량 다 팔고도 재생산 라인을 못 돌리고 있죠. 왜 그런지는 그쪽 자금줄 되시는 분이 더 잘 아실 겁니다.”
홀이 조용했다.
지안은 재혁 쪽으로 반걸음 몸을 돌렸다.
“3억은 제가 태운 게 아니라 쓴 겁니다. 그걸 안타깝다고 부르시는 거라면, 안타까움은 제가 사양하겠습니다.”
마이크를 사회자에게 돌려주려다 다시 입가로 올렸다.
“육성 열 개 브랜드,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수수료 32%로는 열 개 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죽어요.”
“오늘 계약서 받으실 대표님들, 조항 순서 말고 숫자 순서로 읽어보세요. 계약서는 읽는 사람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 것입니다. 읽기만 하면 평생 남의 문장 안에서 장사하는 거예요.”
박수가 뒤쪽 테이블에서 먼저 터졌다.
유민 대표가 일어나서 쳤다. 그다음 테이블이 따라 쳤다.
지안이 단을 내려오는데, 재혁이 마이크가 꺼진 걸 확인하고 어깨를 스치듯 붙었다.
우아한 미소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너 그거, 오래 못 버텨.”
지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래 버틸 필요 없어요. 상무님보다 하루만 더 버티면 되니까.”
재혁의 손이 잔을 쥐었다가 놓았다.
차시헌은 벽 쪽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잔을 든 손을 내리지 않았다. 사실 아까부터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숫자 열 개로 사람 하나를 발라내는 걸 봤다. 원가 비율, 수수료, 정산일, 회수 조항. 하나도 틀리지 않았고, 순서까지 정확했다.
‘저 여자는 겁을 안 먹는 게 아니라, 겁먹을 시간을 예산에서 뺀 거다.’
3년 전 박람회에서 사업계획서를 내밀던 손이 떠올랐다. 그때도 조건을 먼저 물었다.
시헌은 잔을 내려놓았다.
목이 마른 쪽은 이쪽이었다.
지안이 기둥을 지나가려 할 때 시헌이 앞을 막았다.
“대표님.”
“물류비 올리실 거면 다음 주에 말씀하세요.”
“제 계약서 문장을 쓰시고, 제 팔레트를 쓰시고.”
지안이 걸음을 멈췄다.
“이제 제가 사고 싶었던 걸 다 사버리시네요.”
“뭘 사고 싶으셨는데요.”
시헌은 웃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농담을 얹을 자리를 스스로 치워버린 얼굴.
“졌다고 말하는 재미요.”
“그건 대표님이 이미 하셨잖아요, 2주 전에.”
“그건 계약이었고요.”
시헌이 반걸음 다가왔다. 홀 조명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오늘은 아니었습니다.”
지안은 숨을 한 번 안으로 눌렀다.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게 이 남자 때문인지 방금 마이크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구분하고 싶지도 않고.’
“차 대표님.”
“예.”
“저 지금 지분 51%를 거절했어요. 앞으로 1년, 태건이 저 죽이려고 붙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거 아는 사람이 왜 웃음기를 뺐어요.”
“웃으면 대표님이 계산에 넣을 것 같아서요.”
그때 지안의 가방 안에서 진동이 길게 울렸다.
꺼내 보니 부재중 네 통. 유라의 매니저였다.
그리고 문자 한 줄.
‘대표님, 이거 말씀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유라 씨가 어제 대표님 방에서 노트 사진 찍는 거 봤어요. 진짠지는 모르겠는데, 폰 들고 서 있었어요.’
지안의 손끝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대표님?”
시헌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지안은 대답하지 않고 가방에서 검은 노트를 꺼냈다.
홀 한복판, 샴페인 잔들 사이에서, 커버를 열고 낱장을 세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10월 둘째 주. 11월 1주. 11월 3주 카멜/보라빛 붉은색.
그다음이 없었다.
12월 1주 숏패딩이 적혀 있던 장이, 링에서 뜯긴 자리만 남기고 사라져 있었다.
지안은 링을 손톱으로 눌러봤다. 종이 부스러기가 손끝에 묻었다.
‘어제. 유라가 새벽 집합 시간 정산서 받으러 들어왔던 그 십 분.’
폰이 손 안에서 또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자, 남자 목소리가 씹는 소리부터 들려줬다.
“아뜰리에 안 서지안 대표님 맞으시죠. 저 이런 거 파는 사람인데요.”
“누구세요.”
“물건 하나가 저한테 들어왔어요. 손글씨로 날짜랑 품목 적힌 종이. 어떤 브랜드가 몇 월에 뭐가 터질지 미리 다 알고 있다는데.”
지안은 시헌 쪽으로 화면을 들어 보였다. 시헌의 눈이 좁아졌다.
“기자한테 넘기면 ‘산업스파이’ 소리 나오겠죠? 대표님이 사시면 조용히 끝나고요.”
남자가 웃었다.
“얼마에 사시겠어요?”
지안은 노트를 덮었다.
“조건은 제가 부릅니다.”
“예?”
“저는 계약서 쓰는 사람이에요. 읽는 쪽 아니고.”
전화기 저쪽에서 말이 끊겼다가 다시 붙었다.
“재미있으시네. 3천.”
“종이 한 장에 3천이요.”
“그 종이가 3일에 6억 만들었다던데요. 3천은 싼 거죠.”
지안은 홀 복도 쪽으로 걸어 나갔다. 구두 소리가 대리석에서 또박또박 났다.
“세 가지 확인부터요. 첫째, 물건이 원본 낱장 맞습니까.”
“맞아요. 링 자리 뜯긴 거.”
“둘째, 사진 찍었죠.”
“...뭐, 요즘 다 찍잖아요.”
“그럼 3천은 종이값이고 사진값은 따로 부르실 거라는 얘기네요. 다음 달에 또 전화하시고.”
남자가 헛웃음을 냈다.
“대표님 장사 오래 하셨나.”
“세 번째. 그 종이 누가 넘겼어요.”
“그건 말 안 합니다.”
“그럼 값도 없어요.”
지안은 창가에 등을 붙였다. 유리에 홀 조명이 길게 늘어졌다.
“제 조건 말씀드릴게요. 총액 1,500. 선금은 없습니다.”
“3천에서 반을 자르시게?”
“자른 게 아니라 조건을 바꿨어요. 인도는 세 개 다 받습니다. 원본 낱장, 촬영 원본 파일, 온라인 저장소 백업 삭제 화면. 셋 다 제 눈앞에서요.”
“그건 좀.”
“그리고 그 종이를 그쪽한테 준 사람 이름과, 주고받은 문자 캡처.”
“그건 제 밥줄인데요.”
“그쪽 밥줄이 오늘 이후로 있을지가 문제죠.”
지안은 목소리를 낮췄다.
“장소는 성수 지하주차장 같은 데 말고, CCTV 있는 카페요. 신도림 1층, 내일 오후 2시. 현금으로 들고 갑니다. 계좌 주시면 그쪽이 더 위험해져요. 제가 신고하면 그 계좌가 증거니까.”
“...대표님, 협박하시는 거예요?”
“조건 읊는 겁니다. 협박은 아까 단상에서 다른 분이 하셨어요.”
남자가 잠시 숨을 골랐다. 저쪽에서 라이터 켜는 소리가 났다.
“다른 데서 5천 부르는데요.”
“태건이죠.”
전화기 안이 조용해졌다.
“태건은 그 종이 안 씁니다. 종이 산 다음에 그쪽을 씁니다. ‘아뜰리에 안 노트를 유출한 브로커’ 하나 만들어서 기자에게 던지면, 태건은 깨끗해지고 그쪽이 유치장 가요. 5천은 위로금이고요.”
“....”
“저는 종이만 삽니다. 사람은 안 사요. 그래서 1,500이 그쪽한테 더 비싼 값이에요.”
라이터가 다시 켜졌다.
“내일 2시, 신도림.”
“이름.”
“...대표님, 그 종이 준 사람 말고요. 저한테 연결해준 사람이 있어요. 그쪽이 진짜 물주고.”
“이름.”
남자가 짧게 뱉었다.
지안의 손이 유리창 위에서 멈췄다.
전생에서, 유라의 뒤를 봐준 이름이었다.
7년 뒤에야 등장할, 아직 판 위에 올라오지 않은 이름.
“내일 뵙죠.”
전화를 끊었다.
등 뒤에서 태건 테이블의 웃음소리가 다시 살아났다.
시헌이 옆에 서 있었다.
“누굽니까.”
“제 다음 상대요.”
지안은 검은 노트를 가방 안쪽에 밀어 넣었다.
‘예정보다 5년 이르다.’
“차 대표님, 내일 오후 2시에 트럭 한 대 빌릴 수 있어요?”
“뭘 실으실 겁니까.”
“사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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