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판의 법칙8화 / 전 21화0

2부. 갑과 을이 바뀌는 시간

8화. 태운 원단과 잠긴 시간

서지안


“대표님, 스물아홉 곳이요.”

새벽 여섯 시. 민 실장의 목소리가 잠보다 먼저 귀에 박혔다.

지안은 침대에서 몸을 세우며 카톡을 열었다.

캡처 한 장.

‘울 혼방 오버 트렌치 / 39,000원 / 당일발송’

아뜰리에 안의 129,000원짜리와 어깨선이 같았다. 벨트 고리 위치까지 같았다.

판매자명 칸에 상호가 박혀 있었다.

엘리스모드.

“물량은요.”

“3만 장으로 뿌렸다는데요. 도매도 열렸어요.”

“판매처 목록 전부 캡처해서 시간 찍어서 보내요. 상품 설명 정보 원본까지.”

전화를 끊고 지안은 노트를 펼쳤다.

‘11월 2주, 엘리스모드 카피 진입’이라 적힌 자기 필체가 있었다.

볼펜으로 그 줄을 긋고, 날짜를 이 주 앞으로 고쳐 썼다.

“예상보다 빠르네.”

기억이 어긋난 첫 항목이었다. 지안이 판을 흔든 만큼, 상대도 일찍 움직였다.

아침 열 시. 특허법인 상담실에서 지안은 도면 세 장을 밀어놓았다.

“패턴, 벨트 버클, 라벨 배치. 세 건 나눠서 출원해주세요. 오늘 접수 도장 찍힌 접수증 필요합니다.”

“보통은 출시 전에 하시는데요.”

“보통은 못 하죠. 저는 했어야 했고요.”

열한 시에 내용증명 스물아홉 통이 우체국 창구를 떠났다.

오후 두 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서가 법원에 들어갔다.

저녁까지 판매처 여섯 곳이 상품을 내렸다.

‘전생의 나는 이걸 두 달 걸려서 했다.’

그때는 두 달 뒤에 이미 원조가 카피가 되어 있었다.

일주일이 지안을 갈아냈다.

법무법인 회의실. 변호사가 상대 대리인 명단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

“재판 진행 날짜가 3주 뒤로 잡혔습니다.”

“3주요.”

“정식 재판까지 가면 1년 봅니다. 상대는 착수금만 2억 쓴 로펌이고요.”

지안은 명단의 이름들을 눈으로 훑었다. 셋은 판사 출신이었다.

“매출 300억짜리 도매 업체가 2억을 씁니까.”

“안 씁니다.” 변호사가 볼펜 뚜껑을 물었다. “비용을 대는 쪽이 따로 있죠.”

지안은 가방에서 서류 두 장을 꺼내 나란히 놓았다.

태건로지스 파주 4터미널 임대 계약서 사본. 입고 예정 화물 주인란에 엘리스모드.

그 옆에 엘리스모드가 태건 계열 유통사에 끊은 세금계산서 발행일.

카피 상품이 시장에 풀리기 열이틀 전이었다.

“물건 만들 돈이 먼저 들어가고, 창고가 먼저 잡혔어요. 카피는 나중이에요.”

변호사가 두 장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뱉었다.

“이건 정황입니다. 법정에선 안 됩니다.”

“알아요. 그래서 사진으로 남길게요.”

지안은 두 장을 겹쳐놓고 폰으로 찍었다.

‘정황이라도 남겨두면, 언젠가 순서를 증명하는 물건이 된다.’

늪은 그 주에 완성됐다.

수요일, 백화점 두 곳의 팝업이 취소됐다. 사유는 ‘입점 심의 재검토’.

“MD(상품 기획자)님, 계약서 다 돌았고 집기도 발주 끝났는데요.”

“저도 위에서 내려온 거라서요. 대표님, 죄송합니다.”

목요일, 카드사 무이자 프로모션 명단에서 아뜰리에 안만 빠졌다. 담당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전자결제 대행사가 정산 대금 1억 8천만 원을 열흘 유보한다는 통지를 보냈다.

사유란에 한 줄.

‘지식재산권 분쟁 접수건 리스크 관리’

지안은 통지서를 읽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원단 잔금, 봉제 대금, 물류비, 급여. 열흘 뒤에 나갈 돈이 2억 4천이었다.

민 실장이 문 앞에서 물었다.

“대표님, 우리 지금 이기고 있는 거예요, 지고 있는 거예요?”

“소송은 이겨요. 3주 뒤에.”

“그럼요?”

“3주 안에 우리가 죽어요.”

금요일 밤, 파주 창고.

지안은 랙 사이를 걸었다. 비닐 포장투명 봉투에 든 트렌치 2,400장, 발마칸 900장.

정가로 3억 1천만 원.

민 실장이 태블릿을 안고 따라왔다.

“헐값 판매하면 3주는 버텨요. 49,000원에 밀어도 1억은 나옵니다. 대금 지급 보류 풀릴 때까지만.”

지안은 비닐 포장투명 봉투 하나를 들어 어깨선을 확인했다.

봉제선이 곧았다. 안감 스티치도 곧았다.

“39,000원짜리 옆에 우리 옷을 49,000원에 걸면, 우리가 뭐가 되는지 알아요?”

“…싼 옷이요.”

“그 옷의 정품이 돼요. 저쪽 상품 설명 정보 밑에 우리 사진이 붙는 거예요.”

지안은 비닐 포장투명 봉투를 제자리에 걸었다.

“태우자.”

민 실장의 입이 벌어졌다.

“3억이요?”

“폐기 처리로 넘겨요. 폐기증명서 세 부 받아서 한 부는 나한테.”

“대표님, 이거 우리 F/W 주력이잖아요.”

“주력은 브랜드고, 이건 재고야.”

서류에 사인하는 손이 두 번 미끄러졌다. 지안은 세 번째에 이름을 다 적었다.

‘회귀하고 처음으로 내 돈이 아니라 내가 만든 걸 버렸다.’

자정, 창고 밖 주차장에서 지안은 동대문에 전화를 걸었다.

박 사장은 세 번째 신호에 받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울 혼방 원단이요. 울 62, 폴리 33, 나일론 5. 그 조성만요.”

“그거 이번 시즌 다 나갔는데.”

“내년 1월까지 남은 물량 전량, 저한테 묶어주세요. 선금 지금 넣습니다.”

수화기에서 박 사장이 숨을 삼켰다.

“서 대표, 자네 지금 트렌치 못 파는 거 아니야? 소문 다 났어.”

“못 팔죠. 그래서 사는 거예요.”

“…무슨 소리야 그게.”

“엘리스모드가 다음 주에 그 조성 원단 3만 마 물으러 갑니다. 첫 생산량 3만 장 다 팔았으니까 재생산 걸어야죠. 사장님 창고가 첫 번째로 갈 곳이에요.”

박 사장이 잠깐 말이 없었다.

“자네, 그걸 어떻게 알아.”

“패턴이 우리 거니까 원단도 우리 거 따라와요. 사장님, 저쪽 쫓아내지 마세요. 싸우지도 마시고요.”

“그럼?”

“물량은 이미 제 거니까, 없다고만 하시면 돼요.”

전화를 끊고 지안은 어두운 창고 문을 돌아봤다.

3억을 태우고, 원단을 잠갔다.

‘너희가 다음 3만 장을 못 만들면, 39,000원은 딱 한 번으로 끝난다.’

새벽 두 시, 반지하 사무실.

반송 박스가 책상 사이 통로를 막았다. 뜯긴 서류철에서 빠진 종이들이 바닥에 깔렸다.

지안은 그 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계산기를 켜지 않았다. 매출도 정산도 세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기억은 카피가 온다는 걸 알려줬어. 근데 카피 뒤에 붙은 돈은 못 막아줬다.’

노트를 무릎에 올려놓고 지안은 손등으로 눈을 눌렀다.

‘날짜를 다 알아도, 나는 여전히 종이 한 장 든 사람이구나.’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시헌이 서류 한 장을 들고 서 있었다. 코트 어깨가 젖었다.

“파레트 차량 추가 배치 확인서요. 팩스가 안 되던데.”

“…이 시간에요.”

“낮에는 대표님이 법원에 계셔서요.”

시헌은 발밑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무릎을 굽혔다.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한 장씩 모으기 시작했다. 반송 라벨, 내용증명 등기 영수증, 폐기증명서 사본.

지안이 손을 뻗었다.

“제가 할게요.”

“앉아 계세요.”

“차 대표님.”

“졌다고 말하는 건 제 전문인데.”

시헌이 종이 뭉치를 무릎 위에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대표님 차례네요.”

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헌이 폐기증명서를 눈으로 훑었다.

“3억 1천. 헐값 판매 안 하고 태웠습니까.”

“태웠어요.”

“왜요.”

“싸게 팔면 다음 시즌에 우리 가격표를 우리가 못 붙여요.”

“1년 뒤를 위해서 이번 달을 버린다는 거네요.”

“버틸 수 있으면요.”

“버티실 겁니다.” 시헌이 짧게 말했다. “원단 잠근 거, 박 사장님한테 들었습니다.”

지안의 눈이 그를 향했다.

“…빠르시네요.”

“제 화물 주인니까요. 그거 하나로 저쪽 2차 물량이 최소 6주 밀립니다. 대표님, 오늘 3억 태우고 저쪽 매출 30억 지운 겁니다.”

“위로는 안 하셔도 돼요.”

“위로 아니고 계산입니다.”

지안은 웃으려다 실패했다. 목 안이 뻑뻑했다.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제가 정리할게요.”

시헌이 종이 뭉치를 넘겼다.

그런데 그의 왼손에 한 장이 따로 남아 있었다.

줄이 촘촘한 낱장. 노트 링에서 찢겨 나온 자리가 톱니처럼 삐죽했다.

지안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날짜와 문장이 위에서 아래로 적힌 종이였다.

‘11월 2주 엘리스모드 카피 진입’

‘12월 3주 루머 1차. 커뮤니티 게시글, 산업스파이’

‘2월 태건 비자금 보도’

시헌은 그 종이를 읽고 있었다.

“차 대표님.”

지안이 손을 뻗었다. 시헌은 종이를 빼지도, 주지도 않았다.

“11월 2주.” 손끝으로 첫 줄을 짚었다. “이건 오늘 일입니다.”

“…”

“근데 그 아래 두 줄은 아직 안 왔죠.”

“메모예요.”

“필체가 같습니다. 잉크도 같고요. 셋 다 같은 날 쓰신 겁니다.”

지안은 숨을 골랐다.

거짓말 세 개가 순서대로 떠올랐다가, 하나도 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저 사람은 숫자로 사람을 믿는 사람이야. 그리고 이건 숫자야.’

시헌이 종이를 내려놨다. 처음으로 목소리에서 농담기가 빠졌다.

“10월 둘째 주도 그랬습니다. 소재 대란, 물류 마비. 토씨까지 맞았어요.”

“운이었을 수도 있죠.”

“운은 두 번까지입니다. 세 번은 방법이고요.”

시헌이 종이를 지안 쪽으로 반쯤 밀었다.

“서지안 대표님. 이건 예측이 아니고.”

말이 한 번 끊겼다.

“기록이죠?”

반송 박스 사이로 새벽 소리가 들어왔다. 계단 위를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

지안은 종이를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 접지 않았다.

“기록이에요.”

시헌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안은 그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근데 무슨 기록인지는 안 말할 거예요. 12월 3주까지 기다리세요. 저 종이 두 번째 줄이 그대로 터지면, 그때 제가 먼저 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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