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갑과 을이 바뀌는 시간
7화. 이번 생의 갑은 나야
“실장님, 유라 씨 촬영 시작 시각 몇 시죠.”
“새벽 두 시요, 대표님.”
“그럼 지금 여기 있어야 하는 사람이 왜 지하에 있죠.”
스타일리스트 실장이 폰을 내밀었다.
지하 3층 주차장 사진.
번호판을 가린 검은 밴이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40분째 저러고 있어요. 소속 없는 차예요. 우리 대형 택시 아니고요.”
지안은 태블릿을 먼저 확인했다.
F/W 오픈 3일 차. 울 혼방 트렌치 8,200장. 오버핏 코트 4,700장. 3일 누적 정산 6억 3,100만 원.
숫자를 한 번 쓸어 내리고 화면을 껐다.
“오늘 촬영 의상 뭐예요.”
“트렌치 3종에 투피스 니트이요.”
지안은 대기실 옷걸이를 봤다.
트렌치는 스팀 걸린 상태로 얌전히 걸려 있었다. 그 옆에 실크 민소매 드레스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우리 옷이 아니었다.
“실장님, 이 드레스 발주 넣은 적 있어요?”
“없습니다. 저도 조금 전에 봤는데요.”
“메이크업은요.”
“두 시간 전에 끝났어요. 그런데 화보용이 아니라, 좀.”
실장이 말끝을 삼켰다.
“파티 메이크업이었어요.”
지안은 코트를 걸쳤다.
“카메라팀에 조명 셋업 계속하라고 전해주세요. 촬영 시작 시각 안 밀립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에서 열렸을 때, 유라는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민소매 드레스 위에 코트를 걸치고, 한 손에 두꺼운 봉투를 들고.
지안을 보자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대표님, 저.”
“차 문 열려 있네요. 타려던 중이었죠.”
“저 그냥 인사만 하고 오려던 거예요. 삼십 분이면 되는데. 저도 사람인데, 계속 갇혀만 있으면 억울하잖아요.”
지안은 코트 주머니에서 접힌 A4 세 장을 꺼냈다.
주차장 형광등 아래서 종이를 펼쳤다.
“제9조. 품위유지 및 업계 인물과의 사적 만남은 사전 승인.”
한 장을 넘겼다.
“제17조. 사전 승인 없는 제3자 조건 제시 및 협의는 불법 사전 접촉으로 간주. 계약 총액 10배.”
“그건, 그건 계약 얘기 하러 가는 게 아니라.”
“봉투 주세요.”
유라가 봉투를 뒤로 감췄다.
지안은 손을 내민 채 기다렸다.
3초. 유라의 팔이 먼저 무너졌다.
봉투 발신인 칸에 인쇄된 글자가 있었다.
태건그룹 유통부문.
지안은 봉투를 뒤집어 초대장 이름을 확인했다.
“동반 1인. 이름 칸이 비어 있네요. 이름을 안 적어주는 자리에는 이름이 안 남아요, 유라 씨.”
“…”
“위약금 조항, 읽어드릴까요.”
유라가 고개를 저었다.
지안은 그대로 읽었다.
“계약 총액 3천만 원. 10배면 3억. 제3조 추가 조항, 학력 경력 허위 기재 시 3억. 둘 다 걸면 6억이에요.”
“저는.”
“유라 씨 회당 출연료가 40만 원이었죠. 6억이면 1,500회예요. 주 1회 촬영으로 갚으면 스물여덟 해.”
유라의 무릎이 먼저 꺾였다.
초대장이 바닥에 떨어져 뒤집혔다.
“저 진짜 몰랐어요. 그쪽에서 부르니까, 저는 그냥.”
“몰랐다는 건 안 읽었다는 뜻이고요. 안 읽은 책임은 쓴 사람이 아니라 사인한 사람 거예요.”
그때 유라의 가방 안에서 폰이 울렸다.
유라가 손을 뻗기 전에 지안이 가방에서 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스피커로 돌렸다.
“차 보냈는데 왜 안 내려와.”
주차장 콘크리트에 목소리가 넓게 퍼졌다.
“오늘 아버지 오시니까 얼굴만 비추면 돼. 십 분이면 끝나.”
“상무님, 서지안입니다.”
숨소리가 끊겼다.
“저희 모델 촬영 시작 시각이 이십 분 남았습니다. 오늘 새벽 촬영은 취소가 안 돼요. 세트비가 시간당 나가서요.”
“…서 대표.”
“드레스는 상무님 쪽에서 보내신 거죠. 사이즈까지 맞춰서. 초대장 동반 1인 칸은 왜 비워두셨어요?”
3초쯤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존댓말이 벗겨졌다.
“모델 하나 붙잡아두는 게 그렇게 대단한 사업이야?”
“네.”
지안은 종이를 접었다.
“계약서 한 장이 사람을 세울 수 있다는 거, 상무님이 저한테 가르쳐주셨잖아요.”
“뭐?”
“3억, 6억. 숫자로 적혀 있으면 사람이 멈춰요. 상무님도 아시는 규칙이잖아요.”
통화를 끊었다.
폰 화면을 내려 진동을 끄고, 뒤따라 내려온 실장에게 넘겼다.
“촬영 종료 전까지 반납 금지예요. 통화도 문자도요. 유라 씨가 요청하면 저한테 먼저 보고해주세요.”
“예, 대표님.”
밴은 3분 뒤에 램프를 올라갔다.
지안은 바닥에 뒤집힌 초대장을 주워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전생에도 이런 종이가 있었다.
혼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브랜드 지분의 처리, 사용권, 상표 귀속.
그때는 지안이 테이블 이쪽에 앉아 조항을 읽어주는 입술을 올려다보는 쪽이었다. 그 입술은 아주 우아하게 웃었다. 서 대표, 어려운 말 아니에요. 그냥 여기 사인만 하면 돼요.
종이 한 장으로 사람을 멈춰 세우는 힘.
내가 당한 그대로 돌려주고 있을 뿐이다.
‘이번 생의 갑은 나야.’
새벽 3시 50분, 옥상 세트.
바람이 불어서 트렌치 밑단이 계속 뒤집혔다. 조명팀이 조명 판을 두 명이 잡고 눌렀다.
유라는 무릎 꿇었던 자세 그대로 옥상까지 올라와, 카메라 앞에서 여섯 시간짜리 촬영 일정표를 받았다.
지안은 모니터 뒤에 섰다.
“벨트 두 번째 구멍.”
“대표님, 그거 조이면 실루엣이 죽어요.”
실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11월엔 이렇게 조여요. 소매도 접지 마세요.”
“트렌치는 다 접잖아요, 원래.”
“이번 시즌엔 안 접어요.”
“아직 아무도 안 하는 스타일링인데요.”
“그러니까 하는 거예요. 남들이 다 할 때 시작하면 우리 건 재고예요.”
셔터가 연속으로 터졌다.
컷 사이에 유라가 카메라를 등지고 지안 쪽으로 걸어왔다.
목소리를 낮췄고, 존댓말은 벗겨졌다.
“…나 오늘 잠 두 시간 잤어.”
“알아요. 촬영 일정표 제가 짰으니까요.”
“이렇게까지 해야 돼? 나 그냥 인사 한 번 하러 간 건데. 대표님은 사람 하나 망가지는 거 아무렇지도 않지.”
“유라 씨, 지금 입은 트렌치 소비자가 39만 8천 원이에요. 오늘 새벽 컷으로 다음 주에 만 장 팔립니다.”
지안은 모니터를 유라 쪽으로 돌려줬다.
“만 장이면 유라 씨 광고 단가가 올라가요. 파티에 얼굴 비춰서 올라가는 게 아니고요.”
유라가 입을 다물었다.
“들어가세요. 다음 컷 조명 판 위치 바꿉니다.”
“대표님.”
카메라 뒤가 아니라 옥상 문 쪽에서 온 목소리였다.
시헌이 서류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넥타이는 없고, 코트 어깨에 바람 자국이 나 있었다.
“새벽 네 시에 화물 적재 공간 서류 들고 오는 대표님도 계시네요.”
“제 물류 실장이 대표님 창고 마감 시간을 못 이겨서요. 여기 계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시헌은 서류를 내밀지 않았다.
모니터 옆 클립보드에 지안이 적어둔 메모를 봤다.
11월 3주, 카멜 버건디 역전.
12월 1주, 숏패딩 품절 시작.
“대표님, 이거 예측입니까, 예정입니까.”
“데이터예요.”
“제가 아는 데이터에는 날짜가 안 적혀 있는데요. 주 단위로요.”
“저희는 적어요.”
시헌이 조금 웃었다.
지안은 봉투를 받아 열고, 슬롯 증차 조건을 세 줄 읽고 사인했다.
시헌은 그 손을 3초쯤 내려다봤다.
“소재 대란 날짜 맞히신 것까지는 감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
“이건 감이 아니죠. 감은 컬러 두 개의 순서를 주 단위로 못 뒤집습니다.”
“물량 얘기 하러 오신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시헌이 서류를 다시 클립보드에 눌러 끼웠다.
“다음 시즌, 얼마나 밀어드리면 됩니까. 저는 대표님 노트를 못 봤고, 앞으로도 안 볼 겁니다. 대신 숫자로 따라가겠습니다.”
“12월 1주까지 화물 받침대 하루 80개요. 지금 계약은 60이고요.”
“올리죠.”
지안이 볼펜을 놓았을 때, 시헌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 새벽 두 시에, 태건로지스가 파주 4터미널을 통으로 잡았습니다.”
지안의 손이 멈췄다.
“통으로요?”
“통으로요. 트렌치 같은 물건이 3만 장쯤 들어갈 자리입니다.”
“태건은 자기 백화점 물량이 있어요. 4터미널까지 필요 없어요.”
“그래서 화주를 봤습니다.”
시헌이 접힌 출력물 한 장을 꺼내 지안 쪽으로 돌렸다.
입고 예정 화주명 칸에 상호가 인쇄돼 있었다.
전생에 지안의 셔츠원피스를 3주 먼저 시장에 뿌리고, 원조가 카피라고 뒤집어씌운 이름이었다.
“아시는 이름입니까?”
지안의 입술이 움직였다.
“…한 번 죽인 이름이에요, 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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