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판의 법칙6화 / 전 21화0

2부. 갑과 을이 바뀌는 시간

6화. 졌다고 말하는 사람

서지안


팩스 용지가 바닥까지 흘러내려 발밑에 똬리를 틀었다.

지안은 무릎을 굽혀 종이 끝을 집어 올렸다.

첫 장, 천 도매상 세 곳의 단가 조정 공지.

인디고 데님 12온스, 야드당 3,200원에서 7,800원.

두 번째 장, 봉제 공장 연합 공지. 12월 셋째 주까지 라인 예약 마감.

세 번째 장은 팩스가 절반쯤 토하다 잉크가 끊겼다. 글자가 흐렸는데도 읽혔다. 물품 구입 외부 배송 지연 안내.

‘왔네.’

지안은 종이를 접지 않고 벽에 그대로 붙였다.

책상 위 노트를 펴서 10월 두 번째 칸을 찾았다. 여덟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인디고 폭등, 라인 마비.

그 위로 자를 대고 줄을 그었다.

전화가 울렸다. 박 사장이었다.

“지안아.”

목이 잠겨 있었다. 밤을 새운 목소리였다.

“사장님, 원단 다 들어왔죠?”

“들어왔어. 들어왔지. 야, 그게 문제가 아니라.”

숨을 한 번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 너 아니었으면 이번에 문 닫았어. 남대문에서 나랑 같이 하던 최 씨, 어제 창고 비웠다. 원단을 못 사서 비운 게 아니야. 계약해놓은 물량을 태건 계열에서 두 배로 얹어서 가져갔어. 우리 같은 애들은 계약서가 아니라 정으로 하니까 그렇게 뺏기는 거야.”

“저랑은 정으로 안 했잖아요.”

“그래. 네가 그 지랄맞은 법적 공인을 하자고 해서.”

박 사장이 웃다가 기침을 했다.

“선금 60프로에 위약금 열 배. 그거 도장 찍을 때 내가 너 속으로 욕했다. 근데 그 종이 때문에 어제 태건 사람이 왔다가 그냥 갔어. 물량 빼주면 나 파산이라고, 종이 보여주니까 아무 말 못 하더라.”

“사장님이 사인해주신 덕이에요.”

“덕은 무슨. 야, 근데 그 사람들 명함에 로지스라고 박혀 있더라. 물류 하는 애들이 왜 원단 창고를 뒤지고 다니냐?”

지안은 볼펜 끝으로 노트 여백을 눌렀다.

“원단부터 잠그면 옷이 안 나오고, 옷이 안 나오면 나갈 물건도 없으니까요.”

“그럼 너는.”

“저는 옷은 다 만들었어요.”

지안은 그 말만 하고 통화를 끊었다.

정오까지 커뮤니티를 훑었다. 경쟁 쇼핑몰 네 곳이 재입고 무기한 연기 공지를 올렸다. 그중 두 곳은 원단을 태건 계열 브랜드에 빼앗겼다는 소문이 게시판에 돌았다. 그 아래 댓글에 아뜰리에 안 이름이 있었다.

‘저기는 어떻게 재입고 날짜가 안 밀림?’

‘사입 미리 해놨다는 소문. 근데 3만 장을 미리 잡는 몰이 어딨어’

지안은 창을 닫고 작업지시서를 확인했다.

3만 장, 재단 완료.

원단은 8월에 다 창고에 들어와 있었고, 봉제 라인 두 개는 9월 첫 주부터 잠겨 있었다. 업계가 오늘 아침에 알게 된 걸 지안은 두 달 전에 발주로 처리했다.

‘만든 건 문제없어. 문제는 내보내는 거지.’

물품 수거가 끊긴 게 사흘 전이었다.

김 소장 센터의 원청이 태건로지스로 바뀐 다음 날부터, 지안은 빌린 트럭 세 대를 직접 굴렸다. 파주까지 못 가고 광주 소형 택배사 두 곳을 붙여 지방 물량을 쪼갰다.

계산기를 두드렸다.

출고 단가 장당 890원.

지금 2,400원.

차이 1,510원. 하루 출고 1,400장이면 하루에 211만 원이 그냥 녹는다.

지안은 숫자를 두 번 두드려 같은 값이 나오는 걸 확인했다.

“이번 주까지는 버텨요.”

혼잣말이 사무실 벽에 부딪혔다.

“다음 주는 못 버텨.”

수요일 밤, 빌린 트럭 기사 한 명이 다음 주부터 다른 데 붙기로 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단가를 얹어주겠다고 답장했더니 돈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태건 쪽 물량 하는 기사들이 우리 차 받지 말라고 말 돌린다는데요.’

지안은 그 문자를 캡처해 노트 사이에 끼웠다.

목요일 오후 4시.

계단으로 구두 소리가 내려왔다. 반지하 문틀은 낮았다. 들어오던 남자가 허리를 굽혔다.

차시헌이 코트도 벗지 않고 사무실 한가운데 섰다. 천장이 그의 머리 위로 한 뼘밖에 남지 않았다.

“2주 전에 제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세요?”

지안은 계산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숫자로 된 데이터가 없다고 하셨죠.”

“토씨까지 맞네요.”

“제가 녹음해둔 게 아니라, 그날 밤에 노트에 적어놨거든요.”

시헌이 벽에 붙은 팩스 용지를 봤다. 야드당 7,800원 위에서 시선이 멈췄다.

“오늘 아침에 저희 리서치팀이 이거랑 똑같은 페이퍼를 올렸습니다. A4 열두 장. 대표님은 2주 전에 이걸 한 문장으로 말했어요. 10월 둘째 주, 소재 대란, 물류 마비.”

“셋째 주에 봉제 라인 재개 소문이 한 번 돌 거예요. 헛소문이에요. 실제로는 12월 셋째 주까지 안 풀립니다.”

시헌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 오래 붙어 있지는 않았다.

“그 말을 왜 지금 저한테 하시죠?”

“거절당할 때 안 한 말이니까요.”

시헌은 서류 봉투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봉투 아랫면에 습기가 배어 있었다.

“파주 3터미널, 컨테이너 세 칸. 하루 60파레트. 24개월 고정단가. 장당 780원.”

지안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

“780원은 시장 단가보다 낮아요.”

“낮습니다.”

“세온이 손해 보는 계약을 왜 저한테 가져오시죠?”

“저희가 파주에서 비어 있는 처리 공간을 태건 물량으로 채워왔거든요. 그 슬롯 원청이 지난주에 바뀌었어요. 태건이 자기네 센터로 뺐습니다. 저는 지금 빈 칸 세 개를 들고 있고, 대표님은 나갈 물건 3만 장을 들고 있어요.”

“그러면 이건 호의가 아니라 재고 처리네요.”

“그렇게 읽으셔도 됩니다.”

시헌이 코트 단추를 풀었다.

“근데 이 조건을 짜서 제가 직접 이 계단을 내려온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에요.”

지안이 눈을 들었다.

시헌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처음으로 말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제가 졌으니까, 이번엔 제 값을 부르시죠.”

사무실 형광등이 한 번 깜박였다.

지안의 손끝이 봉투 위에서 멈췄다.

‘졌다고 말했다, 이 남자가.’

기억이 한 칸 뒤로 밀렸다.

전생의 마지막 병실. 링거 스탠드 옆에 서 있던 권재혁. 브랜드는 이미 없어졌고, 기사에는 지안의 이름이 카피와 사생활 두 단어 사이에 박혀 있었다.

그때 재혁이 한 말은 한 문장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나도 몰랐지.”

몰랐다고. 그러고 나가서 문을 닫았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는 끝까지 한 글자도 대지 않았다.

‘졌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지안은 봉투를 열어 계약서를 꺼냈다.

여덟 장. 조항 구조가 깔끔했다. 읽는 데 4분이 걸렸다.

“심사 자료 드릴까요.”

지안이 서랍을 열었다.

“2주 전에 물으셨던 거요. 월 거래액, 반품률, 재입고 회전. 표로 만들어놨어요.”

“필요 없습니다.”

시헌은 서랍 쪽을 보지도 않았다.

“닫으세요.”

지안의 손이 서랍 손잡이에서 멈췄다. 2주 전 세온 미팅룸에서 이 남자는 태블릿을 세워놓고 숫자 세 개를 물었다. 오늘은 태블릿을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지안은 서랍을 밀어 닫고 볼펜을 들었다.

단가 항목의 780원 위에 두 줄을 그었다.

옆에 720원을 적었다.

시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60원이요?”

“3만 장이면 180만 원이에요. 24개월이면 그 곱하기 여섯 시즌이고요.”

“손해 보는 계약이라고 방금 지적하셨는데요.”

“손해 보는 계약이라고 하시니까 더 깎은 거예요. 진짜 손해면 대표님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실 테니까.”

시헌이 잠깐 지안을 봤다.

“안 일어나겠네요.”

“하나 더요.”

지안이 마지막 장으로 넘겼다.

“어제 저희 빌린 트럭 기사가 빠졌어요. 태건 물량 하는 기사들이 우리 차 받지 말라고 말을 돌린다고요. 그 말이 파주 야간 조에도 갈 겁니다.”

“이미 왔습니다.”

시헌이 담담하게 말했다.

“화요일에 태건로지스 쪽에서 전화가 왔어요. 아뜰리에 안 물품 수거만 안 받으면 뺏어간 슬롯 원청을 원위치시켜주겠다고요.”

“거절하셨어요?”

“보류했습니다.”

“보류.”

“보류라고 말해두면 그쪽이 다음 카드를 안 꺼내요. 오늘 여기 온 게 답입니다.”

지안은 여백에 조항을 손으로 적었다.

제19조. 세온이 태건 측 요청 또는 태건과의 거래 관계를 사유로 아뜰리에 안의 물품 수거, 분류, 출고를 지연시킬 경우, 지연 1일당 계약 총액의 10배를 배상한다.

볼펜을 놓고 계약서를 돌려 그의 앞으로 밀었다.

시헌이 그 문장을 읽었다. 한 번 읽고, 다시 읽었다. 종이를 든 채로 꽤 오래 읽었다.

“열 배.”

“열 배요.”

“위약금 열 배는 대표님 버릇인가요, 아니면 저만 받는 특별대우인가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씁니다.”

시헌의 손이 멈췄다.

“그게 왜 믿는 사람한테 쓰는 조항이죠? 보통 반대 아닌가요.”

“안 믿는 사람은 아예 계약을 안 하니까요.”

지안은 볼펜 뚜껑을 닫았다.

“박 사장님한테도 열 배를 걸었어요. 어제 그 종이가 그분 창고를 지켰습니다. 이 조항은 대표님을 묶는 게 아니라, 태건이 또 전화했을 때 대표님이 들고 나갈 방패예요. 보류가 아니라 종이로요.”

시헌이 사인을 했다.

머뭇거리지 않았다. 두 장, 세 장, 마지막 장까지. 손으로 쓴 제19조 옆에도 이름을 적고 날짜를 눌러 적었다.

펜을 놓는 손이 책상 위 계산기 옆으로 갔다. 지안이 종일 두드린 그 계산기를 손등으로 밀어 창가 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자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김 팀장님. 세온 차시헌입니다. 오늘 밤 3터미널 A라인 슬롯 세 칸 비워두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고 되묻는 소리가 났다.

“아뜰리에 안. 차량 세 대, 스물여덟 파레트.”

또 되물었다.

“신용 등급 아직 안 나왔습니다. 제 이름으로 올려주세요.”

시헌은 전화를 끊고 코트 주머니에 폰을 넣었다.

“화물받침대 규격 문자로 보냅니다. 랩은 두 번 감아주세요.”

지안은 잠깐 대답을 못 했다.

“제 이름으로 올린다는 말, 그거 나중에 문제 안 돼요?”

“됩니다.”

시헌이 계약서를 반으로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래서 720원에 사인한 거고요.”

“오늘 밤부터 넣을게요.”

“오늘요?”

“이번 주는 버틴다고 했고, 오늘이 목요일이에요.”

시헌이 웃었다.

계단을 올라가다 그가 문틀 앞에서 돌아섰다.

“셋째 주에 라인 재개 소문 돈다고 하셨죠.”

“돌 거예요.”

“그거 틀리면 720원 다시 780원으로 올릴 겁니다.”

“틀리면 제가 먼저 올려드릴게요.”

구두 소리가 계단 위로 사라졌다.

밤 11시.

지안은 봉제공장 앞마당에서 지게차가 파레트를 트럭 안으로 밀어 넣는 걸 봤다. 비닐봉지에 든 셔츠원피스가 층층이 쌓여 랩으로 감겼다. 스물여덟 파레트.

기사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파주 3터미널 맞죠? 게이트 번호 받았습니다.”

“몇 번이요?”

“7번. A라인이라고 적혀 있는데, 원래 우리 같은 빌린 트럭은 12번 뒤로 세워요. 이거 잘못 온 거 아니에요?”

“맞게 온 거예요. 도착하면 사진 한 장 보내주세요.”

트럭 후미등이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지안은 그 자리에 서서 계산기 앱을 열었다.

720원 곱하기 3만.

2,160만 원.

2,400원으로 밀었으면 7,200만 원.

숫자를 지우고 폰을 내리는데 화면이 먼저 밝아졌다.

유라 담당 매니저였다.

‘대표님, 죄송한데 확인 하나만요.’

지안은 화면을 그대로 봤다. 다음 메시지가 3초 뒤에 떴다.

‘유라 씨가 오늘 오후에 태건로지스 홍보팀 미팅 다녀왔다는데요. 승인 받으셨어요?’

제9조. 업계 인물과의 사적 만남, 사전 승인.

제17조. 사전 승인 없는 제3자 조건 제시 및 협의, 계약 총액 10배.

지안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두 번 갔다.

“미팅 잡은 사람이 누구예요?”

매니저가 숨을 들이켰다.

“그게, 유라 씨가 그쪽에서 먼저 연락 왔다고 하는데요.”

“몇 시에 들어갔고 몇 시에 나왔어요?”

“두 시 반에 들어가서, 다섯 시쯤에요.”

두 시간 반. 인사하고 나오는 시간이 아니었다.

“뭘 받아왔어요?”

“모델 계약서 초안이라고 했어요. 저는 안 봤습니다. 유라 씨가 가방에 넣고 그냥.”

“그쪽 누구요. 이름.”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권, 권재혁 상무님 비서실이라고.”

지안의 손끝이 멈췄다.

“그 사람, 지금 태건에 있어요?”

“예? 아, 예. 로지스 본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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