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죽었던 여자가 계약서를 쓴다
5화. 규격은 예측이 된다
송장 프린터가 종이를 토하다 멈췄다.
새벽 네 시.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위, 골목은 박스로 막혀 있었다. 지안은 발로 종이 뭉치를 벽 쪽으로 밀어놓고 전화를 받았다.
“김 소장님.”
“대표님, 저 지금 센터에서 자고 있어요. 우리 최대 처리 용량이 일 500건이에요.”
“어제 주문 3,800건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요. 그걸 어떻게 빼요.”
지안은 박스 위에 앉았다.
“미출고 1,900건, 취소 요청 212건, 별점 1점 리뷰 47개. 여기까지가 어제 하루예요.”
“택배 기사도 물건 수거 초과라고 트럭 문 닫고 갔어요. 저도 사람이지…”
“소장님 잘못 아니에요.”
지안은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번 주만 버텨주세요. 건당 200원 올려드리고, 야간조 인건비는 제가 별도로 정산합니다.”
“…대표님, 근데 이거 다음 주도 이럴 거예요.”
“알아요.”
그게 문제였다.
화보 한 컷 때문이었다. 인디고 셔츠원피스, 맨발, 회색 시멘트 벽. 유라의 첫 컷이 커뮤니티 세 곳에 퍼진 뒤 팔로워는 2,400에서 11만이 됐다. 9월 재입고 3만 장 예약 판매는 하루 만에 1만 9천 장이 찍혔다.
주문은 계약서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화물 받침대로 막는 거였다.
통화 대기 중에 다른 전화가 끼어들었다. 유라였다.
“언니.”
“대표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죠.”
“나 화보 하나로 11만이야. 광고 하나 정도는 내가 직접 받아도 되잖아. 왜 나만 이렇게 묶여 있어야 해?”
“어디서 연락 왔어요.”
“…내가 한 게 아니야. 먼저 온 거야. 태건 계열 브랜드 서포터즈.”
지안의 손이 계산기에서 멈췄다.
‘또 그 이름.’
“제9조요. 광고든 미팅이든 식사든, 업계 인물 접촉은 전부 사전 서면 승인.”
“그러니까 승인해달라고 말하는 거잖아.”
“제17조. 승인 없이 제3자로부터 조건을 제시받은 사실이 확인되면 계약 총액의 10배.”
“…얼마야.”
“3억이에요.”
숨소리가 끊겼다.
“광고비로 3억 받아올 수 있으면 하세요. 아니면 오늘 오후 세 시, 스튜디오 집합 시간 지키세요.”
지안은 전화를 끊고 노트를 펼쳤다.
자체 물류로 10월 둘째 주까지 버티면 죽는다.
화물 받침대를 가진 사람을 만난다.
오후 두 시, 세온 사옥 22층 미팅룸.
유리벽 너머로 한강이 얇게 걸려 있었다. 지안은 물컵을 반쯤 비우고 서류를 정리했다.
문이 열렸다. 남자는 서류를 테이블에 놓기도 전에 웃었다.
“우리, 초면 아니죠?”
낮고 느긋한 목소리. 며칠 전 수화기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웃음기.
“놀라지 말라고 미리 문자 주셨잖아요. 그래서 안 놀랐습니다, 차시헌 대표님.”
“재미없네요, 그거.”
시헌이 의자를 끌어 앉았다.
지안의 머릿속에서 3년 치가 빠르게 넘어갔다. 태건 비자금, 10월의 물류 대란, 연예계 스캔들, 세온이 유통 판에서 밀려나던 기사 헤드라인들.
이름은 있었다. 얼굴이 없었다.
전생의 어느 페이지에도 이 남자가 앉아 있던 자리가 없었다. 그 사실이 완판보다 불편했다.
“지난번 전화, 대답을 못 들었습니다.”
“제17조요.”
“’제3자로부터 조건을 제시받거나 협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그 문장, 제가 3년 전에 썼어요.”
“좋은 문장은 돌아다니죠.”
“제 문장은 안 돌아다닙니다.”
시헌이 볼펜 뚜껑을 딸깍 열었다.
“그 조항이 들어간 계약서는 딱 한 장이었어요. 3년 전에, 딱 한 사람한테 갔고요. 그 사람은 사인을 안 했습니다.”
“그 사람이 저라고 하면요.”
“그럼 오늘 미팅이 훨씬 재밌어지죠.”
지안은 A4 두 장을 밀었다.
“재미없는 얘기 먼저 하죠.”
시헌이 종이를 당겼다.
“10월 둘째 주. 리사이클 나일론과 오리털 솜 수급이 막힙니다. 실 단가 40퍼센트 오르고, 같은 주에 택배 물건 수거가 전국 단위로 마비돼요.”
“전국 단위.”
“수도권 중앙 유통 거점 두 곳이 먼저 터집니다. 그다음이 지방 지역 유통 거점.”
“이유는요.”
“이유는 그때 다 나올 겁니다. 저는 결과만 말씀드리는 거예요.”
시헌은 종이 위 날짜를 손끝으로 짚었다.
“그전에, 파주 3터미널 하루 40화물 받침대를 잠가주세요. 6개월 선계약, 최저물량 보증 25화물 받침대. 미사용분도 제가 냅니다.”
“미사용분도.”
“9월엔 제가 손해예요. 10월에 회수합니다.”
“조건은 좋네요.”
“조건은 제가 잘 씁니다.”
시헌이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접었다.
“수급 리포트.”
“없습니다.”
“실 사전 거래 시장 데이터.”
“없습니다.”
“화물 주인 계약서, 최소한 협회 통계.”
“없어요.”
“날짜만 있네요.”
“제 판단입니다.”
시헌은 볼펜을 눕혔다. 그 동작이 대답이었다.
“제 터미널 최대 처리 용량은 연 단위로 배정돼요. 화물 주인 열아홉 곳이 이미 물량 보증서를 넣어놨습니다. 거기서 감으로 40화물 받침대를 빼면, 다음 분기에 심사받는 쪽은 대표님이 아니고 저예요.”
“그래서요.”
“이번엔 거절하겠습니다.”
지안은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이 남자는 숫자가 없으면 안 움직인다. 그건 결점이 아니라 규격이었다. 규격은 예측이 된다.
시헌이 명함을 꺼내 뒷면에 번호를 적어 밀었다.
“개인 번호입니다. 리포트 생기면 밤에도 받습니다.”
지안은 그 손을 받지 않았다.
“리포트가 생기는 게 아니라, 상황이 생길 거예요.”
“그때 전화 주세요.”
“제가 왜요.”
지안은 일어섰다.
“전화는 대표님이 하실 거예요.”
시헌은 밀던 손을 조용히 거두고, 명함을 지안이 앉았던 자리 앞에 내려놓았다.
문이 닫혔다.
시헌은 명함을 다시 집어 수첩에 끼웠다. 그리고 인터폰을 눌렀다.
“윤 실장. 리사이클 나일론 실 수급, 10월 둘째 주 기준으로 조용히 하나 뽑아봐요. 결재선 안 타고.”
“공식 요청 아니고요?”
“아직요.”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멎었다.
로비 회전문 앞으로 검은 세단이 붙었다. 태건 유통 번호판. 지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재혁이 지나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물류 구하러 오셨나 봐요, 서 대표님.”
“상무님은요.”
“저는 초대받아 온 쪽이고요.”
우아하게 웃는 얼굴. 전생에 3년을 봤던 각도였다.
“세온이 거절했으면, 다음 문은 태건인데. 그건 알아서 오시겠죠.”
지안은 그제야 멈췄다. 딱 한 걸음.
“상무님.”
“네.”
“세온이 거절한 걸 어떻게 아세요? 저 방금 나왔는데요.”
재혁의 웃음이 반 박자 굳었다. 지안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회전문을 밀었다.
택시 뒷좌석.
지안은 노트를 펴서 10월 둘째 주 칸에 동그라미를 두 번 그렸다.
‘2주. 딱 2주 뒤에 다시 옵니다, 당신이.’
그 남자는 감을 안 산다. 결과를 산다. 결과가 신문에 나면, 값은 그때 내가 부른다.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왜 태건이 오늘 세온에 왔나.
‘초대받아 온 쪽’이라고 했다. 태건이 세온에 초대될 이유는 하나뿐이다. 세온이 뭘 팔거나, 태건이 뭘 사려고 하거나.
폰이 울렸다. 김 소장이었다. 문자 한 줄.
‘대표님, 죄송합니다. 내일부터 저희 센터 물건 수거 못 받습니다. 오늘 원청이 바뀌었어요.’
그 아래 사업자명이 붙어 있었다.
태건로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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