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죽었던 여자가 계약서를 쓴다
4화. 계약서는 쓰는 사람의 것
이틀 전 목소리가 노트북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뉴욕에서 연기 전공했고요. 유럽 브랜드 캠페인도 한 번 들어갔었어요.”
지안은 파일을 멈추고 재생 시각을 메모지에 적었다. 07분 12초.
밖에서 계단 내려오는 힐 소리가 났다. 두 시 오십오분. 약속보다 오 분 빠르다.
접이식 테이블 위에는 녹음기 한 대, 계약서 세 부, 볼펜 두 자루가 나란히 놓였다.
문이 열렸다.
“대표님, 저 왔어요.”
유라는 오늘 흰 셔츠를 입고 왔다. 화장을 반톤 낮췄고,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이틀 만에 컨셉을 갈아입은 얼굴이다.
“앉으세요.”
지안은 녹음기 전원을 눌렀다. 빨간 램프가 켜졌다.
“녹취 동의서, 여기 서명이요. 협의 전 과정은 기록됩니다. 양측 보호를 위해서요.”
유라는 파우치에서 립글로스를 꺼내 덧바르며 웃었다.
“당연히 괜찮아요. 저 숨길 거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서.”
동의서에 사인이 그어졌다. 글씨가 컸다.
“말씀하신 대로 서류 챙겨왔어요.”
A4 한 장이 테이블을 건너왔다.
지안은 손끝으로 종이를 훑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중퇴.
화장품 브랜드 지면 광고 2건.
통신사 CF 서브 모델.
‘전생에 이 여자 학력은 지방 전문대 관광과였고, CF는 3차에서 떨어진 걸 포트폴리오에 넣은 거였다.’
지안은 종이를 내려놓고 볼펜 뚜껑을 열었다.
“이틀 전에는 뉴욕이라고 하셨는데요.”
유라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어학원 다닌 거요. 그건 학력에 안 들어가서 뺐어요.”
“유럽 브랜드 캠페인은요.”
“그건… 계약상 밝히기 어려워요. 비밀유지 그런 거 있잖아요.”
“그래서 서류에서는 빠졌고, 대신 통신사 CF가 들어왔네요.”
“그게 더 확실한 거라서요.”
지안은 볼펜으로 CF 줄을 톡, 짚었다.
“대행사 어디였죠?”
“…거기도 밝히기 어렵고요.”
“편수 광고면 방영 캡처 정도는 있을 텐데.”
유라가 테이블 아래에서 다리를 바꿔 꼬았다.
“대표님, 지금 저 취조하시는 거예요?”
“확인하는 거예요. 계약금 산정에 들어가니까.”
‘계약금’이라는 단어에서 유라의 눈이 다시 붙었다.
“그러니까요. 출연작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 광고 얼굴이라는 말 많이 들어요. 그래서… 계약금은 3천, 회당 출연료도 좀 올려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숫자가 먼저 나왔다. 지안은 그걸 녹음기 램프 쪽으로 한 번 흘려보냈다.
“3천이요.”
“제 시장가가 그래요.”
‘회당 40만 원짜리 무명 배우 시장가가 3천이면, 나는 오늘 아주 싼 물건을 산다.’
지안은 프로필을 반듯하게 정리해 서류철에 끼웠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유라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진짜요?”
“조건이 있어요. 지금 제출하신 광고 경력 두 건과 연기과 학력, 사실로 확인되면 계약금 3천 드립니다.”
“확인이야 하시면 되죠.”
“대신 허위로 확인되면, 위약금은 열 배예요.”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유라의 눈동자가 반박자 흔들렸다.
“…열 배요?”
“3억이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목소리가 반 톤 올라갔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해요. 제가 무슨 사기꾼도 아니고. 저 이런 대우 받을 사람 아닌데.”
“그러면 문제없죠.”
지안은 볼펜을 놓았다.
“사실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계약서에 그대로 넣습니다. 제3조 덧붙이는 조항으로요.”
유라는 프로필이 들어간 서류철을 한 번 보고, 다시 계약서 쪽을 봤다. 종이를 되돌려 달라고 하기에는 3천이라는 숫자가 이미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넣으세요.”
지안은 그 대답을 확인하고 계약서 세 부를 나란히 펼쳤다.
“3년 전속. 시작일은 오늘부터.”
“3년은 좀 긴 거 아니에요?”
“긴 게 아니라 확실한 거예요. 3년 안에 유라 씨 얼굴, 이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 없게 만들 생각이니까.”
유라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 문장 하나로 3년이 짧아졌다.
“초상권과 파생 상품 전권은 아뜰리에 안에 귀속. 화보, 영상, 캡처, 굿즈까지요.”
“그건 원래 그렇게 하는 거죠?”
“그렇게 하는 데도 있고 안 하는 데도 있어요. 우린 합니다.”
지안이 장을 넘겼다.
“제9조 품위유지. SNS 업로드, 언론 노출, 사적 만남은 전부 사전 승인 대상이에요.”
“사적 만남까지요?”
“업계 인물 한정이요.”
“…네.”
“제17조.”
지안은 손가락을 그 조항 위에 얹었다.
“본 계약 기간 중, 갑의 사전 서면 승인 없이 타인로부터 조건을 제시받거나 협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이면 접촉으로 간주하고 계약 총액의 10배를 위약금으로 청구합니다.”
“이면 접촉이 뭐예요? 사람 만나지도 말라는 거예요?”
“우리 브랜드로 얼굴이 알려진 다음에, 다른 데서 조건 받는 거요. 그게 이면이에요.”
유라가 손톱으로 종이 끝을 튕겼다.
“저 그런 거 안 해요.”
“그러면 이 조항은 유라 씨한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조항이에요.”
‘그리고 네가 반드시 밟을 조항이지.’
지안은 이 문장을 어젯밤 세 번 고쳐 썼다. 원래 문장은 자기 것이 아니었다. 지난달 창업 박람회에서 어떤 투자 담당자가 내밀고 간 투자 계약서(안), 그 문서의 조항 구조가 유난히 깔끔해서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왔다. 지안은 그 종이를 검은 노트 뒤표지 안쪽에 넣어두고 있었다.
유라가 손목시계를 보는 척하며 물었다.
“근데요, 대표님.”
“네.”
“이번에 그 데님 원피스, 그거 제가 입는 거죠? 지금 인스타에서 다 그거잖아요. 다 그거 입고 찍는데.”
“그건 이미 완판이에요.”
“그럼요?”
지안은 볼펜을 유라 쪽으로 돌려놓았다.
“가을·겨울 시즌에는 그보다 큰 걸 입으실 거예요. 9월 첫 주 재입고 3만 장, 그거 화보 얼굴이 유라 씨고. 10월에는 그 위에 얹을 아이템이 하나 더 나갑니다. 그건 지금 시장에 없는 물건이에요.”
“없는 물건을 어떻게 아세요?”
“제가 만들 거라서요.”
유라의 시선이 볼펜으로 내려갔다.
“다만 조건은 제가 씁니다.”
지안은 계약서 서명란을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펴줬다.
“계약서는 읽는 사람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 것이에요.”
유라는 그 말을 칭찬으로 들은 표정이었다.
“대표님 말 진짜 멋있게 하시네요.”
그리고 장을 넘겼다. 17조를 지나쳤다. 눈이 머문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다.
3년. 3천. 그리고 매달 옷값이 들지 않는 삶.
볼펜이 종이를 긋는 소리가 이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큰 소리였다.
세 부.
세 번.
‘네 거짓말까지 내 무기다. 이 녹취가 언제 쓰일지, 나는 이미 안다.’
지안은 인감을 꺼내 인주를 묻히고 을란 옆에 갑의 도장을 눌렀다. 붉은 원이 세 장에 차례로 앉았다.
“두 부는 유라 씨 보관, 한 부는 저희 쪽이요.”
봉투에 계약서를 넣던 손을 멈춘 건 그때였다.
테이블 위에서 유라의 폰이 진동으로 몸을 떨었다.
액정에 뜬 다섯 글자.
권재혁 상무님.
‘저 번호가 저 여자 폰에 저장돼 있는 건, 전생에서 이듬해 봄이었다.’
유라가 폰을 뒤집었다. 손이 급했다.
“매니저예요.”
“소속사 없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 오디션 쪽 실장님이요.”
지안은 봉투 입구를 접었다. 손끝이 아주 느려졌다.
‘7개월. 궤도가 또 앞으로 당겨졌다.’
머릿속에서 노트 페이지가 넘어갔다. 전생에서 이 통화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안은 순서까지 안다. 스폰 제안, 브랜드 서포터즈 광고, 그리고 3년 뒤의 기사 제목.
“제17조.”
지안이 봉투를 유라 쪽으로 밀었다.
“오늘부터 효력 발생예요.”
“…네.”
“전화, 받으세요.”
유라의 눈이 커졌다.
“여기서요?”
“제 앞에서요.”
폰이 계속 울었다. 유라는 봉투를 끌어안고 일어섰다.
“저, 밖에서 잠깐만요. 신호가 여기 반지하라서 잘 안 터져서요.”
“1분이요.”
유라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문이 닫혔고, 힐 소리가 콘크리트 위에서 빨라졌다.
지안은 녹음기 정지 버튼을 눌렀다.
파일명을 바꿨다.
0821_한유라_협의전문.
복사본 세 개를 만들었다. 하나는 노트북, 하나는 외장하드, 하나는 메일 임시보관함.
그리고 검은 노트를 펼쳤다. 날짜 옆에 한 줄.
접점 발생. 예정보다 7개월 빠름.
볼펜을 놓고 손등으로 눈을 한 번 눌렀다.
‘빨라진 건 저쪽만이 아니야. 나도 빨라졌으니까 이건 아직 내 판이다.’
그때 책상 위 다른 폰이 울렸다.
문자가 아니라 통화였다.
발신자 표시 없음. 번호 뒷자리 네 개는 이미 외우고 있었다. 새벽 두 시 십오분에 셔츠원피스를 정확히 맞혔던 번호, 파주 3터미널을 하루 40에서 60화물 받침대로 열어주겠다던 번호.
지안은 세 번째 진동에서 받았다.
“여보세요.”
“서지안 대표님.”
낮고 느긋한 목소리였다. 웃음기가 뒤에 얇게 깔려 있었다.
“밖에 계신 배우분, 통화 길어질 것 같은데요. 여기서 다 보이네요.”
지안의 등이 곧게 펴졌다.
“어디서 보이죠.”
“그 질문은 나중에 하시고요.”
종이 넘기는 소리가 수화기 안에서 났다.
“먼저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말씀하세요.”
“지금 그 계약서, 제17조.”
지안의 손이 봉투 위에서 멈췄다.
“’갑의 사전 서면 승인 없이 타인로부터 조건을 제시받거나 협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토씨까지 같았다.
“그 문장, 제가 3년 전에 쓴 문장인데요.”
지안은 검은 노트 뒤표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 안쪽에 들어 있는 종이의 두께가 손끝에 그대로 느껴졌다.
남자가 웃었다.
“어디서 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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