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판의 법칙3화 / 전 21화1

1부. 죽었던 여자가 계약서를 쓴다

3화. 판을 까는 이유

서지안


놋수저가 놋그릇에 닿는 소리가 별실 안에서만 유난히 크게 울렸다.

청담 한식당, 낮 열두 시. 상 위에는 열두 가지 반찬이 깔렸고, 아무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권재혁의 오른쪽에 태건 유통 상품 기획자 둘, 왼쪽에 패션지 기자 한 명.

그중 안경 쓴 상품 기획자의 이름을 지안은 어젯밤에 이미 들었다.

조현우. 성수동에서 검은 세단 뒷자리에 봉제 라인 사장과 나란히 앉아 있던 사람.

‘이름 알려준 남자는 정작 자기 이름을 안 알려줬지.’

재혁이 서류를 지안 앞으로 밀었다.

“지분 30%에 15억. 아뜰리에 안은 백화점 2층에 올려드리고, 서 대표는 태건 이름 아래서 편하게 옷만 만들면 됩니다.”

기자가 수첩을 펼쳤다. 재혁이 부른 자리였다. 기사까지 세팅해 놓고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지안은 서류를 펼치지 않았다. 물컵을 옆으로 밀어 서류 자리를 비워둔 채 재혁을 봤다.

“지난달 순이익 3,100만입니다.”

“압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달 정산은 1억 1,400만이고요. 9월 첫째 주 재입고 3만 장, 모두 판매 기준 매출 34억.”

지안이 손가락 하나를 서류 위에 얹었다.

“15억에 30%면 제 회사를 50억으로 보셨다는 거죠. 이번 분기 하나로 34억 찍는 회사를요. 그건 투자가 아니라 할인 요구예요.”

기자의 펜이 멈췄다.

재혁의 미소가 반 박자 늦게 흔들렸다. 우아함을 되붙이는 데 정확히 그만큼 걸렸다.

“서 대표, 현실적으로 말할까요. 여자 혼자 하는 쇼핑몰이 3만 장을 무슨 수로 소화합니까. 원단은요? 봉제는요? 물류는요?”

“청바지용 원단 3,200야드 확보 끝났습니다. 봉제 라인 두 개, 하루당 위약금 10배 공식 인증까지 마쳤어요.”

지안은 조현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참, 조 상품 기획자님. 그제 성수동에서 제 봉제 라인 사장님 만나셨죠. 검은 세단 뒷자리에서요.”

숟가락 놓는 소리가 났다. 조현우가 아니라 옆에 앉은 상품 기획자였다.

“제 라인 빼가시려던 거면 헛걸음하셨어요. 사장님, 위약금 10배 무서워서 어제 저한테 먼저 전화하셨습니다.”

기자가 다시 펜을 들었다. 이번엔 재혁의 얼굴을 보면서 들었다.

“서 대표.”

“태건이 제 뒷다리 걸면서 앞에서 15억 부르는 걸 업계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협상 아니고 흥정이에요. 그것도 값 깎는 쪽이 급할 때 하는.”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명함 한 장을 상 위에 놓았다.

“제안은 감사합니다. 3만 장 팔고 나면 회사 값이 얼마인지 그때 다시 계산해 오세요. 그때는 제가 서류를 펼쳐볼게요.”

문을 나설 때 재혁이 뒤에서 뭔가 말했다. 존댓말은 남아 있었지만 어미가 뭉개졌다.

복도 조명이 유리에 비쳐 지안의 얼굴을 창에 걸어놨다.

폰이 울렸다.

「파주 3터미널, 하루 60짐판까지 잡아뒀습니다. 8월 말부터 쓰실 수 있어요.」

그리고 십 초 뒤에 하나 더.

「15억은 너무 싸게 부르던데요.」

지안은 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별실 안 대화가 끝난 지 삼 분도 안 됐다.

‘아군인가, 감시자인가.’

「그 방에 사람 심어두셨어요?」

「기자를 심으셨겠죠, 권 상무가. 저는 기자 취향을 좀 알고요.」

지안은 답을 지웠다 다시 썼다.

「이름.」

「다음에 얼굴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게 훨씬 재미있을 겁니다.」

지안은 폰을 가방에 넣었다.

파주 물류는 필요했다. 이름 모르는 호의는 필요하지 않았다.

‘둘 중에 하나만 골라야 하면, 나는 물류를 고르지.’

그날 저녁 여섯 시, 지안은 사무실에서 미끼를 놓기 시작했다.

협찬 유명 누리꾼 열두 명이 들어 있는 단체방에 한 줄만 올렸다.

「모델 오디션 준비 중입니다. 3년 전속, 계약금은 업계 최상위. 아직 비공개예요.」

읽음 표시가 열두 개 켜지는 데 이 분이 걸렸다.

비공개라는 말이 붙은 정보만큼 빠르게 도는 게 없다.

지안은 이어서 스타일리스트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프로필 하나 부탁드려요. 정세라 배우.”

“정세라요? 그쪽은 지금 몸값 좀 올랐는데요, 대표님.”

“그러니까요. 오디션 후보 1번으로 올려주세요. 소문 나도 괜찮습니다.”

‘아니, 나야 하지.’

이틀 뒤 낮.

강남 스튜디오 앞에서 지안과 정세라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나란히 걸어 나오는 사진이 인스타 임시 게시물에 올라갔다. 촬영 협의 미팅 삼십 분, 커피는 지안이 샀다.

임시 게시물을 올린 계정은 유명 누리꾼 열두 명 중 팔로워가 가장 많은 쪽이었다.

지안은 그 임시 게시물을 정확히 스물네 시간 뒤에 부탁해서 지웠다.

‘사라진 미끼가 제일 오래 남아.’

검은 노트 12페이지에는 이미 이렇게 적혀 있었다.

9월 첫째 주. 태건 계열 서포터즈 광고, 한유라 최종 탈락. 소속사 계약 파기.

전생에 지안은 그 광고 홍보 활동을 알았다. 그때 자기 남편이 심사표에 손을 댔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이번 생에서는 재혁이 지안을 위해 손을 대줄 이유가 없다.

청혼을 잘라버린 여자의 사람을 챙겨줄 남자는 아니니까.

‘유라 씨, 이번엔 아무도 안 챙겨줘.’

닷새째 밤 아홉 시.

반지하 사무실 철문을 누가 두드렸다. 세 번, 그리고 곧바로 다섯 번 더.

지안은 노트를 서랍에 넣고 문을 열었다.

한유라가 서 있었다.

눈 아래 눈썹 먹이 번져 있었고, 손에 든 건 프로필 파일 하나였다.

들어와 앉자마자 목소리부터 튀어나왔다.

“정세라랑 계약했다는 거 거짓말이죠?”

“앉으세요.”

“나 다 알아요. 오디션 돈다는 얘기 업계에 다 돌았어요. 근데 왜 나한테는 연락 한 번도 안 줘요? 프로필 다 뿌려져 있는데. 사람 이렇게 무시하는 거 아니잖아요.”

지안은 정수기에서 종이컵에 물을 받아 유라 앞에 밀어줬다.

말은 하지 않았다.

유라가 지안을 노려봤다. 노려보는 시간이 삼 초 못 갔다.

어깨가 먼저 무너졌다.

“…광고 날아갔어요.”

종이컵을 두 손으로 쥐었다.

“태건 서포터즈, 최종 3인까지 갔어요. 스타일링까지 맞춰놨는데 그쪽 상무님 이름 한 줄로 엎어졌다고. 어제요.”

“소속사는요.”

“어제 계약 파기했어요.”

유라의 입술이 떨렸다.

“제가 위약금 물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저 회당 40만 받는 무명인데, 위약금은 저한테 받아가겠다는 거예요. 세상이 왜 저한테만 이래요? 저 진짜 열심히 했어요. 오디션 서른 개 봤어요, 올해.”

지안은 유라의 손을 봤다. 손톱이 물려 있었다.

전생,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지안의 폰 화면.

‘아뜰리에 안 대표, 해외 브랜드 카피 확정. 사생활도 엉망’이라는 문장을 처음 만든 계정.

그 계정 주인이 지금 종이컵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울어. 지금은 울어도 돼.’

목이 뜨거워졌다. 지안은 숨을 한 번 나눠 쉬고 목소리를 눌렀다.

사냥하지 않는다. 목마르게 만든다. 그러면 스스로 머리를 넣는다.

“유라 씨.”

“네.”

“오디션은 이미 3차 진행 중이에요.”

유라의 얼굴이 하얘졌다.

“거의 정리됐고요. 오늘은 그냥 얼굴 보러 오신 걸로 하죠. 늦었으니까 조심히.”

“아니, 아니요.”

유라가 상체를 앞으로 던졌다. 종이컵이 넘어져 물이 책상에 번졌다.

“저 할게요. 조건은 뭐든 맞추겠어요.”

“뭐든이라는 말은 계약에서 안 쓰는 말이에요.”

“뭐든이요. 진짜 뭐든.”

유라가 프로필 파일을 지안 쪽으로 밀었다.

“계약금 안 주셔도 돼요. 저 정세라보다 카메라 잘 받아요. 세라 씨는 화보 톤 안 나와요, 그 언니 얼굴 정면 약해요. 저 광고 촬영 밤새워도 안 지쳐요. 대표님 브랜드 지금 4분 모두 판매했잖아요. 저 그 옷 입고 싶어요.”

‘그래. 그게 네 첫 문장이었지, 전생에도.’

지안은 넘어진 종이컵을 세워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책상 왼쪽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미리 출력해 둔 서류 한 부가 클립에 물려 들어 있었다.

전속 모델 계약서(안).

3년 전속. 얼굴 사용권 전권. 품위유지. 스케줄 전면 조율. 제17조 위약금 10배.

지안은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유라가 읽을 수 있는 방향으로, 정확히 정면으로 돌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폰을 책상 위에 뒤집어 올리며 녹음 버튼을 눌렀다.

빨간 점이 켜졌다. 유라는 서류만 봤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유라의 눈이 확 커졌다.

“진짜요? 진짜 저요?”

“대신.”

지안이 펜을 유라 앞으로 굴려 보냈다.

“조건은 유라 씨가 먼저 말해요. 계약금이 얼마면 사인할 수 있죠?”

유라의 눈이 젖은 채로 반짝였다.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계산이 들어왔다.

“저… 실은 제가 뉴욕에서 연기 전공했고요.”

“네.”

“데뷔 전에 해외 홍보 활동 이력도 있어서요. 그… 유럽 쪽 브랜드요. 그거 감안하시면 시장가가 좀 다르거든요.”

지안은 펜 끝으로 계약서 첫 장을 톡, 짚었다.

“천천히 말해요. 학교, 연도, 홍보 활동 이름까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요. 그거 전부 계약서에 넣을 거니까요.”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