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죽었던 여자가 계약서를 쓴다
2화. 4분 만에 3,000장 완판
“대표님, 이거 진짜 열어요?”
민서가 재고 리스트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섰다.
새벽 두 시. 형광등이 한 번 껌뻑였다.
지안은 대답 대신 송장 번호를 하나씩 짚었다.
인플루언서 열두 명. 박스 열두 개. 다 어제 오후에 수령 완료.
“열두 개 다 도착했어. 내일 아침 아홉 시부터 순서대로 24시간 후 사라지는 게시물 올라와.”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협찬 보내고 그냥 묻히는 경우가 절반인데요.”
“묻힐 사람은 안 골랐어.”
지안은 리스트 옆에 붙여둔 메모를 손끝으로 밀었다.
이름 열두 개. 그 옆에 각각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 사람은 9월에 구독자 4만에서 11만 돼. 이 사람은 8월 말에 결혼 발표하고 방문자 두 배. 이 사람은 데님 리뷰만 올리면 저장 수가 세 배로 뛰어.”
“…그건 또 어디서 나온 숫자예요?”
“내가 알아.”
‘전생에 이 열두 명이 다른 브랜드를 띄웠어. 이번엔 내 쪽으로 온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민서가 리스트를 흔들었다.
“셔츠원피스를 3,000장이나요? 그것도 오버핏 데님이요. 요즘 그거 아무도 안 입어요. 지금 잘 나가는 건 슬림한 니트에 미니예요, 대표님. 동대문 도매만 봐도.”
“알아.”
“아시면서 8,400만 원을 다 넣으셨어요?”
“응.”
“그게 우리 전부잖아요.”
민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 어제 사무실 관리비 이체하려다가 잔고 보고 손이 떨렸어요. 육십만 원이요. 육십. 만약에 이거 안 팔리면 저는 월급 못 받는 건 참는데, 대표님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지안은 업로드 예약 시각을 오전 열한 시로 맞췄다. 저장. 확인창이 떴다 사라졌다.
노트북을 덮고 나서야 민서를 봤다.
“유행은 예측하는 게 아니야. 내가 먼저 만드는 거지.”
민서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대표님, 그거 어디서 배운 말이에요?”
“죽을 만큼 비싸게.”
‘값은 이미 다 치렀어. 목숨으로.’
지안은 의자 등받이에 걸린 재킷을 걷어 민서 어깨에 던졌다.
“열 시 반에 와. 서버 앞에 앉아 있어야 해.”
“서버는 왜요? 3,000장이면 하루는 걸릴 텐데.”
지안은 사무실 문을 잡고 웃었다.
“안 걸려.”
*
열 시 이십오 분.
민서가 편의점 커피 두 개를 들고 뛰어 들어왔다.
“대표님, 인스타 보셨어요?”
“봤어.”
“어제 저녁부터 24시간 후 사라지는 게시물 여섯 개 올라왔고요, 그중 하나는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서 조회수가, 조회수가요.”
민서가 폰을 들이밀었다.
“삼십일만이요.”
지안은 화면을 눌러 소리를 켰다. 오버핏 데님 셔츠원피스가 한 바퀴 돌았다.
댓글창이 밑에서 올라왔다.
어디예요. 브랜드 어디. 링크 주세요. 원피스 이름 아는 사람.
“댓글에 ‘어디예요’만 사백 개예요.”
“열한 시라고 답 달아둬. 정확히 열한 시.”
“이미 달았어요.”
“잘했어.”
민서가 마우스를 잡고 앉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조회수랑 매출은 다르잖아요. 예전에 저 다니던 데도 짧은 영상 백만 찍고 열두 장 팔았어요.”
“오늘은 달라.”
열한 시 정각.
상품 안내 화면이 열렸다.
한 번에 들어온 사람 카운터가 세 자리에서 멈칫하더니, 한 번에 네 자리로 넘어갔다.
“…대표님.”
“봐.”
1분 47초. M 사이즈 품절 처리.
민서가 마우스를 놓쳤다.
“M이 지금 나갔어요. M이 1,200장이었는데요?”
“S 봐.”
3분 12초. S 소진.
주문 알림이 초 단위로 겹쳐 울리다가 소리 자체가 뭉개졌다.
민서가 스피커 볼륨을 급하게 내렸다.
“이거 소리 왜 이래요? 알림이 밀려요.”
“밀리는 게 아니고 겹치는 거야.”
3분 40초, L도 두 자리로 떨어졌다.
지안은 화면 오른쪽 아래 재고 숫자만 봤다.
87. 41. 12. 3.
4분.
0.
그리고 화면이 하얗게 비었다.
“어, 어? 안 열려요. 안 열린다고요!”
민서가 비명을 질렀다.
“장바구니 페이지가 안 떠요. 대표님, 서버 뻗었어요! 지금 결제 중인 사람들 다 튕겨요!”
“3,000장 다 팔렸어.”
“그러니까 서버가!”
“결제 완료 건은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튕긴 사람은 결제 안 된 사람이고, 그 사람들 건 원래 팔 물건이 없어.”
지안은 이미 다른 전화를 귀에 붙였다.
“아뜰리에 안입니다. 서버 대여 등급 두 단계 올려주세요. 지금요. 접속량 상한 열 배로.”
“오늘 신청은 내일 반영인데요.”
“결제 즉시 반영되는 옵션 있죠. 그거 결제할게요. 카드번호 받아주세요.”
“고객님, 그 옵션은 월 단위 계약이고 위약 조항이……”
“압니다. 여섯 달 선결제로 갈게요. 지금 카드 긁을게요.”
민서가 옆에서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방금 다 팔았는데 또 돈을 써요?”
“이제 시작이야.”
지안은 통화를 끊고 카카오 채널 창을 열었다.
문의가 이미 사백 건 넘게 쌓여 있었다.
“민서야. 답변 세 개만 복사해서 돌려.”
“세 개요?”
“하나. 재입고 알림 신청하시면 순서대로 안내드립니다. 둘. 결제 실패 건은 자동 취소되며 승인 취소는 삼 일 내 반영됩니다. 셋.”
지안은 잠깐 멈췄다.
“9월 첫째 주 재입고 예정입니다. 수량은 이번보다 열 배입니다.”
민서 손이 키보드 위에서 굳었다.
“…열 배요?”
“응.”
“3만 장이요?”
“응.”
“대표님, 저 지금 좀 앉아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앉아서 쳐.”
지안은 곧바로 동대문 번호를 눌렀다.
세 번째 신호에 박 사장이 받았다.
“서 대표! 나 방금 기사 봤어. 4분이라던데, 그게 진짜야?”
“진짭니다. 사장님, 인디고 3만 장 추가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뭐?”
“3만. 원단은 같은 롤로, 봉제 라인 9월 첫 주 독점, 그대로 갑니다.”
“서 대표.”
박 사장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가 원단 장사 이십 년 했어. 3,000장 판 애가 3만 장 지르는 거 나 두 번 봤는데, 둘 다 지금 없어. 폐업했어.”
“열 배로 지르는 게 아니고, 정확히 필요한 수량입니다.”
“근거를 대.”
“오늘 4분에 3,000장 나갔고, 재입고 알림이 지금 이 통화 중에 이천 건 넘었습니다. 도매에서 카피 뜨는 데 이 주, 카피가 시장에 깔리는 데 삼 주. 그 전에 원본이 물량으로 깔려야 합니다.”
“카피 안 뜰 수도 있잖아.”
“뜹니다. 사장님 원단 사러 온 사람 중에 오늘 저녁부터 데님 인디고 찾는 사람 몇 명 늘어나는지 세보세요.”
박 사장이 잠깐 말을 잃었다.
“…그건, 좀 무섭게 맞는 소리네.”
“10월 둘째 주까지 다 팔립니다.”
“어떻게 알아?”
“안 팔리면 위약금 열 배, 제가 물죠. 계약서에 그 조항 이미 넣었잖아요. 사장님이 넣으라고 하셨고요.”
숨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 조항, 내가 넣으라고 했지.”
“네.”
“그거 물면 서 대표 사무실 보증금까지 날아가.”
“알고 넣었습니다.”
박 사장이 욕 한 마디를 짧게 뱉고, 다시 물었다.
“3만 장 원단값 선금은?”
“오늘 오후 정산 들어오면 60퍼센트 바로 쏩니다. 나머지는 입금일 지정해서 공증까지 드릴게요.”
“공증까지?”
“사장님도 위에 대야 할 사람 있으실 텐데요.”
“…미쳤어, 서 대표.”
“오후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민서가 걱정스레 그 손을 봤다.
“대표님, 손 떨려요.”
“응.”
두려움이 아니었다.
‘죽은 다음에야 알았던 숫자가, 살아 있는 통장에 찍히고 있어.’
*
오후 세 시.
정산 화면에 숫자가 떴다.
1억 1,400만 원.
민서가 모니터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어제 우리 잔고가 육십만 원이었는데요.”
“이제 3만 장 값이 나갈 거야.”
“…대표님은 좀 기뻐하시면 안 돼요?”
지안은 그제야 웃었다. 아주 짧게.
“기뻐하면 뭐가 달라져?”
“제 기분이 달라져요. 저 아침부터 심장이 세 번 멈췄어요.”
“그럼 이거 봐.”
지안이 화면을 돌려줬다. 재입고 알림 신청 수치였다.
민서가 숫자를 세 번 읽었다.
“…육천사백이요?”
“3만 장, 이제 좀 작아 보이지?”
패션 전문지 기사가 세 시 십 분에 올라왔다.
무명 쇼핑몰, 업로드 4분 완판. 오버핏 데님의 귀환.
‘귀환. 단어 잘 골랐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이틀 전, 발주 20분 만에 품목명을 정확히 맞혔던 그 번호였다.
「축하드립니다. 4분이면 예상보다 빨랐네요. 3만 장이면 다음 주부터 택배사 물량이 막힙니다. 파주 3터미널에 여유 있습니다.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지안은 문자를 세 번 읽었다.
3만 장은 두 시간 전에 결정한 숫자였다. 아는 사람은 셋. 지안, 민서, 박 사장.
서랍을 열었다.
검은 노트를 꺼내 뒤표지에서 접힌 종이를 뽑았다. 3년 전 창업 박람회에서 받은 투자 계약서(안). 도장 자리는 비어 있고, 서명란도 비어 있다.
문자와 종이를 책상에 나란히 놓았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편해. 편한 건 대체로 함정이야.’
지안은 답장을 찍었다.
「제 재고를 아는 사람은 셋뿐인데, 그쪽은 누구시죠?」
답은 삼 초 만에 왔다.
「지금은 아무도 아닌 사람요. 그래도 물류는 진짜입니다.」
민서가 뒤에서 목을 뺐다.
“누구예요?”
“아무도 아닌 사람.”
“…뭐라고요?”
「파주 3터미널, 하루 몇 화물 받침대요?」
「하루 40. 다음 주부터는 60까지 빼드릴 수 있습니다.」
지안은 숫자를 노트 여백에 옮겨 적었다. 40. 60.
전생에 지안이 물류 때문에 무릎 꿇은 건 그해 10월이었다.
주문은 밀려드는데 택배사가 물량을 잘랐다. 배송 지연 리뷰가 사흘에 이천 개 붙고, 반품이 매출을 갉아먹었다.
‘이 사람, 내가 아직 모르는 걸 알거나 내가 아는 걸 아는 거야. 둘 중 뭐가 더 무섭지.’
「조건은요.」
「없습니다. 아직은요.」
「세상에 조건 없는 물류는 없어요.」
「그럼 하나 걸죠. 다음에 만나면 놀라지 마세요.」
지안은 답하지 않고 폰을 뒤집어 놓았다.
*
저녁 여덟 시.
민서를 보내고 혼자 남아 3만 장 생산 스케줄을 그렸다.
원단 입고 8월 넷째 주. 재단 나흘. 봉제 9월 첫째 주 독점 라인. 검단, 포장, 출고.
한 칸이라도 밀리면 도미노였다.
액정에 세 글자가 떴다.
권재혁.
지안은 두 번 울리게 두었다가 받았다.
“기사 봤어.”
우아하게 낮춘 목소리.
“축하해, 지안아. 4분이라니. 내가 사람 볼 줄은 안다고 했지?”
“용건만요.”
“섭섭하네. 지난주에 내 전화 끊었을 때는 그냥 자존심인가 했는데, 오늘 보니 그것도 계산이었나 싶어서.”
“질문 있으신 것 같은데요.”
짧은 웃음이 돌아왔다. 그 웃음 뒤로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산기든 펜이든, 재혁은 항상 숫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3년을 같이 산 여자만 아는 습관이었다.
“3만 장 발주했다고 들었어.”
지안의 손이 멈췄다.
“어디서요.”
“동대문은 좁아. 그런데 지안아, 그 물량 백화점 팝업 없이 어떻게 소화하려고? 온라인만으로는 안 돼. 서버 오늘도 뻗었잖아.”
“…”
“태건 유통 라인 타면 하루면 정리돼. 우리 계열 백화점 세 곳, 내가 자리 만들어줄 수 있어. 이윤은 삼십오, 아니, 지안이니까 삼십으로 해줄게. 조건은 저녁 한 번.”
‘전생이랑 순서만 바뀌었네. 그땐 청혼이 먼저였고, 이번엔 유통이 먼저야.’
“백화점 세 곳이면 3만 장 중에 몇 장 소화됩니까.”
“이천에서 삼천.”
“그거 받고 이윤 삼십 내주고, 브랜드 결정권은 어디로 갑니까.”
“결정권 같은 소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지안아. 너 지금 사무실이 반지하야. 직원이 한 명이고. 그런 데서 결정권을 얘기하면 사람들이 웃어.”
“제 판이니까, 제가 알아서요.”
“지안아.”
“끊겠습니다.”
“3만 장이면 봉제 라인 두 달 잡아야 하지 않나?”
지안은 전화를 내렸다.
액정에 통화 시간이 1분 12초로 남았다.
‘내가 얼마 발주했는지, 어느 공정에 며칠 걸리는지, 왜 알아.’
십 분 뒤 문자가 떴다.
박 사장이었다.
「서 대표. 봉제 라인 사장이 갑자기 계약 파기하겠대. 태건 쪽에서 3배 값에 라인 통째로 잡았다는데. 위약금 물어주고라도 빠지겠다고 지금 난리야. 전화 좀 받아.」
지안은 검은 노트를 펼쳐 9월 페이지를 짚었다.
거기 적힌 목록에 이 사건은 없었다.
전생의 9월에 태건은 아뜰리에 안이라는 이름을 몰랐다. 지안이 재혁과 결혼한 뒤였고, 브랜드는 그의 장식품이었으니까.
지금 태건은 지안을 브랜드로 보고 있었다.
‘궤도가 벌어졌어. 내가 꺾은 만큼.’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확인이었다.
‘내가 이번엔 위협이 된다는 뜻이지.’
폰이 다시 울렸다.
모르는 번호.
「봉제 라인 사장, 지금 성수동에 있습니다. 검은 세단 뒷자리요.」
지안은 화면을 노려봤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제가 그 차를 이십 분 전부터 보고 있으니까요.」
두 번째 문자가 곧바로 올라왔다.
「같이 탄 사람 이름, 들으면 대표님 표정이 좀 변할 겁니다.」
지안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 번에 받았다. 낮고 느긋한 남자 목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이름부터 말할까요, 아니면 제 이름부터 말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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