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죽었던 여자가 계약서를 쓴다
1화. 전생 궤도 1차 변경
모니터 불빛이 얼굴에 얹혔다.
‘[단독] 아뜰리에 안, 해외 브랜드 도용 확정… 서지안 대표 잠적’
조회수 4,012만.
새로고침을 누를 힘도 없어서 지안은 숫자만 봤다. 4,013만. 4,015만.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클릭하는 속도가 심장보다 빨랐다.
물류창고 바닥은 차가웠다. 반품 박스가 천장까지 쌓여 있고, 그 박스들이 전부 자기 옷이었다. 한 장도 못 팔고 돌아온 옷.
박스 하나에는 아직 세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지안이 밤을 열두 번 새워 옷본을 고친 라인이었다.
무릎이 먼저 꺾였다.
숨이 목 중간에서 걸렸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액정에 뜬 세 글자였다. 권재혁. 받지 않았다. 그게 이 생에서 지안이 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리고 등에 뭔가 딱딱한 게 닿았다.
접이식 매트리스.
곰팡이 냄새.
지안은 눈을 떴다.
천장에 물 얼룩이 번져 있었다. 창은 지면과 같은 높이여서, 지나가는 사람의 발목만 잘려 보였다. 반지하. 보증금 오백에 월 삼십오. 첫 사무실.
숨을 들이켰다. 폐가 아프지 않았다.
지안은 손등을 뒤집었다.
수액 바늘 자국이 없었다. 마지막 몇 달, 손등에서 지워지지 않던 누런 멍도 없었다. 흠 하나 없는 손. 스물여섯의 손.
몸을 일으켜 벽을 봤다.
달력. 3월. 연도는 3년 전.
책상 위에는 정산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창업 6개월 차. 누적 매출 1억 2,700만. 순이익 3,100만. 통장 잔고 8,400만 원. 옆에는 라벨 인쇄기, 그 옆에는 표지에 흠집 하나 없는 검은 노트.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지안은 딱 3초를 셌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노트를 펼쳐 볼펜을 쥐었다.
‘9월 첫 주. 데님 셔츠원피스. 쪽빛. 유행 통째로 전환.’
‘10월. 버터옐로 니트, 오버사이즈. 소재 대란 동시 발생.’
‘이듬해 2월. 물류 대란. 항만 적체 6주.’
‘6월. 태건 유통 자금줄, 도용 업체 소송.’
손이 저릴 때까지 썼다. 컬러, 소재, 실루엣, 완판 날짜, 광고 단가가 튀는 달, 망하는 브랜드와 뜨는 인플루언서. 업계 사건은 월 단위로, 연예계 스캔들은 주 단위로.
이건 능력이 아니다. 초능력도 아니고 시스템도 아니다.
기억이다. 3년을 미리 살아본 사람의 기억.
‘남들이 감으로 찍는 걸, 나는 답지를 보고 쓴다.’
노트 열두 장을 채웠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두 시.
액정에 뜬 세 글자.
권재혁.
지안은 화면을 오래 봤다. 이 전화를 알고 있었다. 전생의 이 밤, 이 시간, 이 목소리.
받았다.
“자고 있었나? 미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느긋하고 부드러운 톤. 사람을 아래에 두고 하는 다정.
“지안아, 이런 사무실에서 고생할 필요 없어. 옷이 하고 싶으면 태건 안에 브랜드 하나 만들어주면 되고. 내 옆자리는 비워뒀는데, 반지 사이즈만 말해.”
전생에 이 문장을 듣고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밤이 그대로 겹쳐졌다. 그 끄덕임 하나로 브랜드도 명예도 목숨도 넘겨줬다.
지안은 스피커폰을 켰다.
그리고 노트북 화면에 발주 계산기를 띄웠다. 야드당 단가, 봉제 품싹, 라벨 비용.
“권 이사님.”
“어, 왜 그렇게 딱딱해.”
“저는 남의 옆자리보다 제 자리에 관심이 많아서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스피커로 넘어갔다.
“청혼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번호는 오늘부터 거래처 전용으로 쓸게요. 새벽 통화는 안 받습니다.”
3초. 침묵이 길었다.
우아한 톤이 살짝 갈라졌다.
“……지금 네가 뭘 거절한 건지 알아?”
‘알지.’
3년 뒤 내 부고 기사 제목까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안녕히 계세요, 이사님.”
지안은 통화를 끊고 번호를 차단 목록에 넣지 않았다. 차단하면 안 된다. 저 남자가 어디까지 오는지 봐야 한다.
대신 통화 기록을 캡처해 노트 뒤에 날짜와 함께 적었다.
‘D+0. 청혼 거절. 전생 궤도 1차 변경.’
그다음에 전화를 걸었다. 동대문 원단 도매, 박 사장.
새벽 두 시 십오분에 세 번째 신호에서 받는 사람. 이 업계는 그렇게 돌아간다.
“어이구, 서 대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쪽빛 데님 3,200야드요. 오늘 아침에 픽업 갈게요. 그리고 봉제 라인 두 개, 9월 첫 주 납기로 통째로 잡아주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3,200야드? 서 대표 잔고 얼마야.”
“8,400만입니다.”
“전부?”
“전부요.”
“미친 겁니까. 지금 시즌은 플라워 원피스가 대세야. 여자 쇼핑몰들 전부 꽃무늬 시폰 잡고 있는데 셔츠원피스? 그것도 데님으로? 무거워, 안 팔려, 반품 산더미야.”
“9월 첫 주에 유행이 통째로 갈아탑니다.”
“그걸 서 대표가 어떻게 알아.”
“못 팔면 제가 야드당 두 배로 인수하죠. 각서 써드릴게요.”
또 침묵.
“각서. 서 대표, 그거 도장 찍으면 진짜 집 날아가는 종이야.”
“집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박 사장이 낮게 웃었다. 미친 사람 보는 웃음, 그러나 장사꾼의 계산이 섞인 웃음.
“각서를 쓴다니까 무섭네.”
“대신.”
지안이 말끝을 잘랐다.
“납기 하루 늦으면 배상금은 열 배로.”
“뭐?”
“열 배요. 하루당.”
“열 배는 미친 소리야. 봉제 사장들 그거 보면 라인 안 붙여.”
“안 붙이면 8월에 남 밑에서 야드당 반값에 넘기시겠죠. 붙이면 9월에 재발주 세 번 받으실 거고요.”
수화기 저편에서 라이터 켜는 소리가 났다.
“서 대표, 사람이 반년 만에 왜 이렇게 무서워졌어.”
“반년 만이 아니라서요.”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체 8,400만 원. 잔고 0. 발주서 PDF가 넘어가는 소리가 조그맣게 났다.
전 재산을 걸고, 지안은 조금도 떨지 않았다.
‘죽어본 사람은 돈이 안 무섭다.’
발주서를 넘기고 나니 손이 남았다. 지안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다음 시즌부터 이 사무실은 창고로도 써야 한다. 미리 비워야 한다.
명함 무더기, 만료된 사업자 서류, 라벨 스티커 뭉치.
그 밑에서 구겨진 종이 한 묶음이 나왔다.
‘투자 계약서(안)’
지난달 창업 박람회 부스에서 받은 것이다. 무명 투자 담당자이라며 명함도 안 주고, 사업계획서를 열두 장 전부 읽고 나서 이걸 내밀었다.
조건이 터무니없이 좋았다. 지분은 15퍼센트, 경영 간섭 조항 없음, 물류 원가 지원. 이름 칸은 비어 있었다.
전생의 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대기업 낀 돈은 목줄이에요. 저는 목줄 안 찹니다.”
그 말과 함께 종이를 밀어냈다. 남자는 웃으면서 종이를 다시 접어 지안 쪽으로 놓고 갔다.
지안은 계약서를 손바닥으로 펴서 주름을 눌렀다.
찢지 않았다.
검은 노트 뒤표지 안쪽에 끼워 넣었다.
‘계약서는 목줄이 맞아. 문제는 누가 쥐느냐지.’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모르는 번호. 문자 한 통.
‘발주 축하합니다. 셔츠원피스, 좋은 선택이네요.’
지안의 손이 멈췄다.
발주는 20분 전 일이다. 아는 사람은 셋. 자기, 박 사장, 그리고 원단상 경리.
박 사장이 새벽 두 시 반에 남 얘기를 할 사람은 아니다. 무엇보다 문자에는 ‘데님’이 아니라 ‘셔츠원피스’라고 적혀 있었다. 품목 이름을 정확히 아는 사람.
지안은 발신 번호를 한참 노려봤다.
전생 3년치를 통째로 뒤졌다. 이 번호는 없었다.
‘기억에 없는 게 벌써 하나.’
답장하지 않았다. 캡처해서 노트에 붙였다. 그 밑에 한 줄.
‘미상. 정보 경로 불명. 감시 가능성. 보류.’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지안은 노트북에 다른 창을 열었다.
오디션 커뮤니티 게시판. 배우 지망생들이 프로필을 올리고 서로 정보를 나누는 곳.
검색창에 세 글자를 쳤다.
한유라.
프로필 사진이 떴다.
보정을 과하게 먹인 셀카. 그런데도 얼굴이 좋았다. 눈이 예쁘고, 눈보다 절박함이 먼저 보이는 얼굴.
‘경력: 단막극 조연 1편, 광고 보조출연 3편. 현재 대기 중.’
‘출연료: 회당 40만 원 협의 가능.’
‘소속사: 없음.’
지안은 그 얼굴을 오래 봤다.
3년 뒤, 이 여자는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뜰리에 안이 해외 브랜드를 베꼈고, 서지안 대표가 남자 문제로 업계에서 유명하다고. 목소리는 청순했고 문장은 전부 자기가 피해자라는 결론으로 끝났다.
기사 조회수 4천만. 그중 절반은 그 인터뷰 때문에 붙었다.
지안은 검은 노트 첫 페이지 맨 위로 돌아갔다. 3년치 유행보다 앞자리, 아직 비워둔 줄.
거기에 볼펜을 눌렀다.
‘한유라.’
옆에 숫자를 달았다.
‘40.’
‘내 브랜드를 죽인 여자. 지금 시세, 회당 사십만 원.’
전생에 이 이름을 알았을 때 지안은 그 여자를 찾아가 머리채를 잡고 싶었다.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다.
머리채는 한 번 잡으면 끝난다. 계약서는 3년을 끈다.
지안은 새 문서를 열었다.
첫 줄을 쳤다.
‘전속 모델 계약서(안)’
‘갑: 아뜰리에 안, 대표 서지안. 을: 한유라.’
‘제1조 계약기간: 3년. 갑의 단독 갱신권 포함.’
‘제3조 얼굴 사용권: 계약기간 내 발생하는 얼굴 사용권, 이름 사용권, 광고 활용권 일체는 갑에게 귀속한다.’
‘제9조 품위유지: 을은 갑이 설정한 브랜드 이미지에 반하는 언행, 교제, 사적 접촉을 하지 않는다.’
‘제11조 스케줄: 을의 모든 대외 활동은 갑의 사전 서면 승인을 받는다.’
커서가 제17조에서 멈췄다.
‘제17조 배상금.’
지안은 잠깐 손을 뗐다가, 숫자 칸에 입력했다.
‘계약금의 10배.’
그리고 처음으로 웃었다. 이 밤에 처음, 3년 만에 처음.
‘사냥은 한 번이면 끝나. 나는 널 살 거야.’
계약금은 낮게 잡아야 한다. 낮으면 유라가 물고, 낮으면 나중에 배상금 계산도 우스워진다. 대신 조항은 무겁게 박는다. 무명 배우는 계약서를 읽지 않는다. 사다리만 본다. 그 습관을 지안은 아주 잘 알았다.
물론 이 계약서를 지안이 들고 찾아가면 안 된다. 갑이 먼저 움직이면 그 순간부터 을이 아니다.
‘네가 와야 해. 네 발로.’
지안은 파일을 저장했다. 파일명은 ‘17’.
노트를 덮으려다 게시판 화면으로 돌아갔다. 유라의 프로필 아래, 작성자 최근 글이 목록으로 떴다.
맨 위 글의 등록 시각이 ‘방금 전’이었다.
‘다음 주 태건 계열 브랜드 서포터즈 광고 최종 오디션 봅니다. 3차까지 붙었어요. 응원해주세요ㅠㅠ’
지안의 손이 마우스에서 떨어졌다.
전생에 이 여자가 태건 계열 광고를 처음 찍은 건 2년 뒤였다. 권재혁과 처음 마주친 것도 그 촬영장이었다.
2년 뒤가 아니다.
다음 주다.
지안은 노트를 다시 펴서 아까 적어둔 줄을 찾았다. ‘한유라 40’. 그 밑에 새로 한 줄을 눌러 적었다.
‘접점 발생 예정. 오차 2년. 기억 어긋남 2호.’
볼펜 끝이 종이를 뚫었다.
‘답지가 틀리기 시작했으면, 문제를 내가 바꿔야지.’
시계를 봤다. 새벽 세 시 사십분.
오디션까지 남은 시간, 닷새.
지안은 휴대폰을 뒤집어 잠금을 풀었다. 차단하지 않고 남겨둔 번호를 눌렀다가, 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아니야. 재혁부터가 아니지.’
지안은 대신 다른 창을 열었다. 오디션 정보 페이지. 주최사 항목에 익숙한 로고가 박혀 있었다.
태건.
그 옆에 대행사 이름이 있었다. 지안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3년 뒤에 부도가 나는 회사, 지금은 현금이 급한 회사.
지안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이 시간에.”
“아뜰리에 안 서지안 대표입니다. 광고주 하나 소개해드리려고요. 지금 통화 되시죠?”
부스럭거리는 소리. 잠이 확 깬 목소리가 돌아왔다.
“광고주요? 어디…”
“저희요. 다음 주 태건 서포터즈 오디션, 최종 심사 하루 앞에 저희 촬영 하나 끼워주세요. 모델료는 현금, 선입금.”
“대표님, 그게 순서가 좀.”
“팀장님, 이번 달 정산 밀린 거 있으시죠.”
수화기가 조용해졌다.
지안은 검은 노트를 손바닥으로 눌러 덮었다.
“금액은 지금 말씀드릴게요. 대신 지원자 명단 하나만 봐주세요. 한유라. 아직 3차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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