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 하지 마요, 약속8화 / 전 19화2

2부 두 장의 종이

8화. 서른여섯 달의 명세

서지원


“2021년 12월부터 2024년 1월까지, 서른여섯 달입니다.”

강인호는 앉자마자 서류 뭉치를 자기 앞으로 당겨 클립을 풀었다. 클립 자국이 남은 첫 장을 검지로 짚고 읽기 시작했다. 남기석 과장이 볼펜을 들며 오늘은 조정 전 사전 면담이고 사실관계 확인만 하는 자리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강인호의 두 번째 항목 위에 겹쳐졌을 뿐이었다.

“요양병원 입원료 월 백사십칠만 원. 삼십육 개월. 경관영양 유동식 사천삼백이십 캔, 캔당 이천이백 원. 기저귀 대형 하루 여섯 장. 카테터 교체 월 두 번. 욕창 매트리스 대여료 월 구만 팔천 원. 앰뷸런스 전원 세 번, 회당 삼십오만 원.”

본관 6층 소회의실은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있었다. 긴 테이블 위에 종이컵이 세 개 놓여 있었고, 내 앞의 것은 손대지 않아서 표면에 얇은 막이 앉았다. 강인호는 종이를 넘길 때마다 검지에 침을 묻혔다. 그 소리가 방에서 가장 큰 소리였다. 나는 목록 안에 사람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것을 세면서 들었다. 입원료, 유동식, 기저귀, 카테터, 매트리스. 강복수라는 세 글자는 표지에만 있었다.

“항목이 열한 개입니다. 하나씩 근거 자료를 붙였습니다. 영수증은 요양병원에서 재발급받았고 전원 기록은 사설 구급업체 배차 내역입니다.”

“신청인 측 자료는 조정중재원에서 확인할 겁니다.” 남기석 과장이 말했다. “여기서 항목별로 다투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투는 게 아닙니다. 읽는 겁니다.”

강인호가 여덟 번째 장을 손바닥으로 눌러 펼쳐 놓았다.

“여덟 번째 항목입니다. 늑골 골절. 좌측 제오, 제육, 제칠. 십이월 일일자 흉부 방사선 판독문 사본을 붙였습니다. 요양병원 이송 후 첫 두 달 진통제 처방 내역도 같이 붙였습니다. 아세트아미노펜, 트라마돌. 합계 이십일만 사천 원입니다.”

세 번째 압박이었다. 나는 그 항목이 어느 순간에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두 번째와 네 번째 사이, 손바닥 아래에서 무언가 방향을 잃고 안으로 들어가던 감각. 그때 난 소리는 3년 동안 내 안에서 한 번도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무릎 위에 얹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강인호가 다음 장을 뒤집었다. 뒷장 구석에 사본 하나가 끼어 있었다.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였다. 오른쪽 아래가 번져서 종이가 한 번 젖었다 마른 자리가 복사기 빛을 먹고 회색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3년 전 새벽에 내 손끝이 마르지 않은 채로 그 종이를 만졌다.

“이 문서는 아버지 병상 걸이에 끼워져 있었습니다. 저희가 서명한 겁니다.”

“신청인께서 서명하신 건 확인됐습니다.” 남기석 과장이 종이 모서리를 정렬했다.

“그리고 이겁니다.”

강인호가 다음 장을 테이블 위로 밀어 보냈다. 심폐소생술 기록지 사본이었다. 시각과 약물, 압박 시작과 종료, 압박 깊이까지 칸마다 글씨가 들어차 있었고, 아래쪽 시행자 란만 비어 있었다. 그 빈칸은 복사를 거치면서 아주 옅은 회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그 회색이 비어 있다는 것과 지워졌다는 것 중 어느 쪽으로 보이는지 판단하려고 했다.

“여기 이름이 없습니다.” 강인호가 빈칸을 검지로 두 번 눌렀다. “이름 없는 사람이 서른여섯 달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기록지의 위쪽 칸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영이시 사십사분. 흉부압박 시행. 영이시 사십팔분, 자발순환 회복. 사 분입니다. 약물은 들어갔고, 압박도 들어갔습니다. 동의서에는 하지 말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아래에 제가 서명했습니다. 걸이에 끼워져 있었으니 앞면만 봐도 무슨 종이인지 알 수 있습니다. 뒷면에는 제 이름과 관계, 연락처가 있습니다. 그 종이를 만져 본 사람이 못 봤을 수는 없습니다.”

“신청인.” 남기석 과장이 볼펜 뚜껑을 딱 닫았다. “처치의 적정성 판단은 이 자리에서 다룰 문제가 아닙니다.”

“판단을 요구한 게 아닙니다. 항목을 요구했습니다. 갈비뼈 세 대가 항목입니다. 서른여섯 달이 항목입니다. 합계 구천육백삼십이만 원입니다. 병원에서 조정하실 금액이 아니라, 누른 사람이 답할 금액입니다.”

강인호는 과장을 보지 않았다. 나를 봤다. 눈이 붉지 않았고 목소리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명세서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처음으로 숫자가 아닌 말을 했다.

“선생님. 그날 왜 누르셨습니까.”

내 오른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무릎을 눌렀다. 슬개골 위쪽에 손바닥을 붙이고 체중을 실었는데도 손끝이 옷감 위에서 잘게 나갔다. 나는 그 떨림을 감추려고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뒤집어 놓으려 했다. 손이 미끄러져 화면을 켰다.

신경과 외래 예약 안내. 내일 오후 세 시 반. 여섯 번 취소하고 일곱 번째로 잡아둔 채 잊고 있던 알림이 이 초쯤 떠 있다가 저절로 꺼졌다. 검은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형광등이 이마 위에 흰 띠로 걸려 있었다.

왜 눌렀는지 대답할 문장이 하나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나는 그 떨림을 두고 혼자 쓰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름을 이 방에 가져올 수는 없었다. 대신 다른 문장이 반 박자 늦게 나왔다. 이번에는 손이 아니라 입이 먼저였다.

“선생님은 왜 서명하셨습니까.”

강인호가 종이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젖은 검지가 종이 위에 그대로 얹혀 있었고, 종이가 그 습기를 조금씩 먹어 들어가면서 그 자리가 어둡게 번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서명 말씀입니까.”

“동의서요. 아버님 성함 옆에, 보호자 란에.”

남기석 과장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과장을 보지 않았다.

“그날 새벽에 저는 그 종이를 읽었습니다. 앞면하고, 뒷면까지.”

거기서 멈췄다. 그다음 문장은 아직 내 것이 아니었다. 강인호의 턱이 한 번 움직였다. 그리고 얼굴이 무너지려다 굳었다. 무너지는 쪽으로 갔다가 도로 돌아온 얼굴이었다. 광대 위쪽 근육이 한 번 당겨졌고, 그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하루에.”

두 음절만 나왔다. 그는 입을 닫고 클립을 집었다. 종이 뭉치를 각을 맞춰 두드리고, 클립을 물리고, 손등으로 표지를 눌렀다. 그 동작이 다 끝날 때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삼 초쯤이었다. 그 삼 초가 서른여섯 달의 명세보다 길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강인호가 일어섰다. “다음 기일은 조정중재원에서 통지합니다. 자료는 항목별로 다시 정리해 오겠습니다. 근거 없는 항목은 빼겠습니다.”

“연락은 병원 법무팀으로 주십시오.” 남기석 과장이 명함을 밀었다. 강인호는 명함을 받아 서류 뭉치 안쪽에 끼웠다.

문고리를 잡은 채 그가 한 번 돌아봤다. 내 얼굴이 아니라 내 손을 봤다.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던 왼손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 도어클로저가 낡아서 마지막 몇 센티미터를 아주 느리게 좁혔다.

“진술서는 언제 낼 겁니까.” 남기석 과장이 서류를 봉투에 넣으며 물었다. “법무팀에서 나한테 두 번 물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 선생. 방금 읽었다고 한 말, 그거 무슨 뜻으로 한 겁니까.”

“인턴 말이었습니다.”

“그 대답은 지난번에도 들었어요.” 과장이 봉투 입구를 접었다. “이런 건 순서가 있어요. 저쪽이 항목을 늘리기 전에 우리가 사실관계를 먼저 세워놔야 합니다. 늑골 골절까지 판독문을 붙여 왔어요. 압박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다음 기일 첫 질문이 될 겁니다.”

과장이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고 나갔다. 나는 테이블 아래에 내려둔 손을 들어 올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빛에 대 보았다. 손가락 끝의 그림자가 테이블 위에서 흔들렸다. 강인호가 침을 묻힌 자리에 남은 물기가 아직 마르지 않아서, 종이가 없어진 그 자리에 자국만 둥글게 남아 있었다.

문이 다시 열리고 청소 담당이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종이컵 세 개를 겹쳐 들면서 내 컵 안을 한 번 보고, 그대로 겹쳐 버렸다. 그리고 젖은 행주로 테이블을 훑었다. 내 손 옆까지 왔다가 손을 피해 반원으로 돌아 지나갔다. 행주가 지나간 자리에서 락스 냄새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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