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 하지 마요, 약속6화 / 전 19화2

2부 두 장의 종이

6화. 불 꺼진 두 번째 버튼과 떨리지 않는 손

서지원


자판기 두 번째 버튼은 여전히 불이 죽어 있었다. 표시등만 나간 게 아니라 눌러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버튼이었고, 그래서 밤마다 누군가 그 자리에 검정 매직으로 엑스를 그려놓았다가 청소반이 지웠고, 다시 누군가 그렸다. 새벽 세 시 사십 분, 그 엑스 옆에서 세 번째 버튼이 눌려 있었다. 종이컵 안으로 밀크커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임경아는 자판기를 향해 서서 그 소리를 등으로 막고 있었다.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다. 라운딩 노트를 왼손에 들고 걸음의 폭을 좁혔다. 컵을 뽑아 든 그녀가 몸을 돌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선생님도 아이 앞에서 손이 떨리시던데요.”

나는 반 박자 늦게 멈췄다. 자판기 배출구 뚜껑이 저 혼자 딸깍 닫혔다.

“7번 침대 때 봤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그걸 잊는 사람이 아니고요.”

대답 대신 오른손을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두 번 접힌 종이의 모서리가 손끝 굳은살에 걸렸다. 나는 손을 그대로 빼냈다.

“그런 손에 유안이를 맡겨도 되는 건가요.”

애원과 요구가 한 문장에 붙어 있었다. 끝은 여전히 높임말이었다.

“환아 상태는 새벽 두 시 이후로 포화도 89에서 92 사이입니다. 산소 3리터 유지 중이고, 심박수는 백스물넷입니다.”

“…”

“아침 수치보다는 내려갔습니다. 오늘 아침 채혈 결과 보고 조정하겠습니다.”

말하는 동안 내 오른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노트를 든 왼손도 그랬다. 임경아가 그걸 봤다. 컵을 든 채로 내 손목 아래쯤을 오래 봤고, 나는 손을 감추지도 내밀지도 않고 그냥 두었다.

“지금은 안 떨리시네요.”

“네.”

“근데 저는 그날 손이 계속 보여요. 선생님이 그 애 가슴에 손 얹고, 팔을 못 펴시고, 소리가 갑자기 얕아지고, 다른 선생님이 옆으로 들어와서 밀어내는 거요. 그 다음부터 소리가 달라졌어요. 저는 소리를 들었어요.”

복도 끝 병동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가 닫혔다. 야간 청소원이 밀대를 세워 벽에 기대놓고 사라졌다.

“제가 뭘 잘못 봤다고 하시면 저는 할 말이 없어요. 저는 의사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선생님, 저는 그 소리를 알아요. 밤마다 여기 서서 그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나는 노트를 왼쪽 겨드랑이에 끼웠다. 뭐라도 해야 해서 그렇게 했다.

“압박 깊이는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그날 자발순환은 회복됐습니다. 세 시 사십일 분에.”

“그러니까 회복이 됐으니까 괜찮다는 말씀이시죠.”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뜻이에요.”

나는 대답을 만들지 못했다. 열두 번의 코드에서 손이 나를 배신할 때마다, 나는 그 떨림을 미워하지 않았다. 팔꿈치 안쪽이 굳고 손끝이 저리고 손목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동안, 아직 무뎌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내 손이 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양심의 증거. 3년 동안 나는 그 말을 혼자서만 썼다. 지금 그 말은 자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목소리로 다시 나왔고, 다른 이름이 붙어 있었다. 팔이 안 펴지는 사람. 소리가 얕아지는 사람. 옆으로 밀려나는 사람. 증거가 아니라 기량 미달이었다.

임경아가 컵 테두리를 엄지 손톱으로 눌렀다. 종이가 접히면서 갈색 물이 손등으로 조금 흘렀다. 닦지 않았다.

“담당 선생님을 바꿔달라는 요청서는 어디에 내면 되나요.”

자판기 냉각기가 웅 하고 돌기 시작했다.

“원무과 접수는 오전 아홉 시부터입니다.”

“양식이 있어요?”

“…서류 형식은 제가 정확히 모릅니다. 원무과에 물어보셔야 합니다.”

“형식이 없으면 제가 손으로 쓰면 되죠. 저는 손으로 쓴 것도 다 받아주셨잖아요.”

그 말이 6번 침대 걸이 클립을 정확히 가리켰다. 손글씨로 쓴 요구서와 그 위에 겹쳐 끼운 접수증 사본. 나는 그날 그 종이를 클립 입에 밀어 넣다가 아래쪽을 엄지로 눌렀다. 종이가 잘 들어가지 않아서 두 번, 세 번 눌렀다. 손톱 앞쪽이 남긴 눌린 자국이 반달 모양으로 남았다.

그 자국이 어느 쪽 종이에 남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래 것인지, 위에 겹쳐 끼운 것인지. 나는 그걸 떠올리려다 벽이 반 뼘쯤 기울었다. 눈을 한 번 감고 떴다.

“선생님.”

“네.”

“저는 선생님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요. 착한 분인 거 알아요. 우리 애한테 말도 잘 걸어주시고요.”

“…”

“근데 착한 거는 저한테 아무 소용이 없어요.”

컵을 쥔 손가락이 한 번 더 종이를 눌렀다.

“저는 소용 있는 손이 필요해요. 그거 하나만요. 그게 나쁜 말인가요. 선생님, 그게 그렇게 나쁜 말인가요.”

높임말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 문장만 자꾸 짧아졌고, 마지막 말끝이 갈라졌다. 임경아는 손등을 자기 옷깃에 문질러 닦고 나서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말했다.

“아홉 시에 가겠습니다. 유안이 아침 채혈 결과는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네.”

그녀가 병실 쪽으로 걸어갔다. 6번 침대 커튼 레일이 짧게 긁혔다. 낮은 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이불 스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자판기 앞에 남아 있었다. 두 번째 버튼을 눌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 다시 눌렀다. 손끝에 딸깍거리는 감촉조차 없는 플라스틱이 들어갔다 나왔다. 배출구는 열리지 않았다.

데스크에서 한여순 선생이 인계 노트를 덮었다. 밤번 인계 시간까지 두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도 노트를 덮었다. 볼펜을 노트 표지 위에 가로로 얹어놓고, 안경을 벗지 않은 채 나를 봤다.

“들었어.”

“…네.”

“아홉 시에 온다더라.”

“네.”

내 손이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언제 넣었는지 모르겠다. 두 번 접힌 종이가 접힌 자리에서 조금 부풀어 있었고, 나는 그걸 손바닥으로 덮었다.

커튼이 한 뼘쯤 벌어져 있었다. 그 틈으로 유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자는 척이 아니었다. 눈을 완전히 뜨고, 베개에 뺨을 붙인 채로, 코 위 캐뉼라가 조금 비뚤어진 채로. 아이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임경아는 침대 옆 보조 의자에 앉아 컵을 무릎에 놓고 등을 내 쪽으로 두고 있었다.

한여순 선생이 볼펜을 다시 집어 노트 표지를 톡 소리 나게 세워 세웠다.

“교체는 네가 안 떨었다는 걸 증명해서 막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데스크 조명 아래에 손등을 위로 놓았다. 다섯 손가락이 다 붙어 있었다. 새끼손가락 끝도 움직이지 않았다. 열 초쯤 그러고 있다가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봤다. 볼펜 잡는 자리에 굳은살, 알코올 솜에 자꾸 닿아 갈라진 엄지 옆면. 떨리지 않는 손이었고, 그게 아무것도 되돌려주지 않았다.

“안 떨립니다. 방금도요.”

“그래서.”

“…모르겠습니다.”

“그 손 접어.”

나는 손을 접어 가운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한여순 선생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서지원.”

“…”

“그 애 엄마는 형식을 몰라서 못 쓰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데스크에서 물러나 6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커튼 틈으로 손을 넣어 벌리지 않고, 레일 소리가 나지 않게 천을 손등으로 밀었다. 임경아가 고개를 돌리다 말고 다시 무릎의 컵을 봤다. 유안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침대 난간에 손을 얹고 몸을 숙여, 비뚤어진 캐뉼라를 아이 콧구멍 아래로 바로 놓았다. 뺨에 붙인 고정 테이프가 땀에 들떠 있었다. 엄지로 테이프를 눌렀다. 아이 피부가 따뜻했고, 눌린 자리가 하얘졌다가 다시 붉어졌다.

“조금만 참자.”

아이가 눈으로 한 번 끄덕였다. 손을 떼자 뺨에 내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달 모양이었다. 나는 그걸 보고 있다가 커튼을 원래대로 닫았다. 복도 시계는 세 시 오십육 분을 지나고 있었고, 자판기 두 번째 버튼은 여전히 불이 죽어 있었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