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젖은 나무
3화. 비워둔 칸의 무게
복사기 토너 냄새가 먼저 났다. 3층 끝 방은 창이 북쪽으로만 나 있어서 오전 열 시에도 형광등을 켜두고 있었고, 그중 하나가 일정한 간격으로 깜박였다. 나는 밤새 당직을 서고 올라간 참이었다. 손등에 바른 알코올 젤이 아직 마르지 않아서 서류를 넘길 때마다 종이가 손가락에 붙었다.
남기석 과장이 봉투에서 서류를 빼내 클립을 풀고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서 하나는 자기 앞에, 하나는 내 앞에 놓았다.
“선생님, 이건 소송 아니고 조정이에요. 우선 사실관계만 정리하면 됩니다.”
첫 장 위쪽에 청구 취지가 세 줄로 적혀 있었다.
피신청인은 신청인에게 금 96,320,000원을 지급하라.
그 아래에 청구 원인이 있었다. 첫 문장을 읽었다. 환자는 심폐소생술 거부 의사를 문서로 밝혔음에도 소생되었고, 그로 인해 3년간 의식 없이 생존하였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소생되었고. 그로 인해. 생존하였다. 살렸다는 말이 손해가 발생한 원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문장 구조가 잘못된 데는 한 군데도 없었다.
“이런 청구가 되는 겁니까.”
“들어오면 일단 받아야 하죠. 인정될지는 다른 얘기고.”
남 과장은 샤프 뒤꼭지로 서류 모서리를 톡톡 쳤다.
“근데 이 신청인, 서류를 잘 만들었어요. 변호사 없이 혼자 쓴 것 같은데.”
뒷장부터는 명세였다. 요양병원 입원료 36개월. 경관영양 유동식 4,320캔. 기저귀 월 6박스. 흡인 카테터. 욕창 드레싱 재료비. 침대 각도 조절 매트리스 대여료. 앰뷸런스 전원료 4회. 항목마다 단가와 수량과 합계가 붙어 있었고, 오른쪽 끝 열은 계산기로 두 번 검산한 사람처럼 자리가 맞았다. 마지막 줄에 사망 2024년 1월 9일 08시 20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동식 4,320캔을 36으로 나누면 한 달에 백스무 캔이었다. 하루 넉 캔. 나는 종이컵을 들었다가 놓고 청구액을 날수로 나눠봤다. 하루에 팔만 팔천 원쯤이 나왔다. 3년을 항목으로 자르면 A4 두 장 반이었다. 강인호는 화가 들어갈 자리마다 숫자를 넣어놓아서, 문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읽는 내 손이 대신 떨렸다. 종이 끝이 젤에 붙어 넘어가지 않았고, 나는 손가락을 옷에 문질러 다시 잡았다.
“기일은 언제입니까.”
“신청인 쪽 일정 보고 잡을 거예요. 두 달, 석 달. 그전에 우리 쪽 답변서 한 번 냅니다.”
남 과장이 볼펜으로 서류 여백에 날짜를 적었다.
“그때까지 선생님은 그날 뭘 봤는지만 기억해두시면 됩니다. 안 본 건 안 본 거고.”
복도 쪽에서 여직원이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회의 자료 몇 부냐고 물었다. 남 과장이 손가락 넷을 펴 보였다. 문이 닫히고, 깜박이는 형광등이 한 번 길게 꺼졌다가 들어왔다.
첨부 자료 목록에 심폐소생술 기록지 사본이 있었다. 시행자 란은 복사에서도 비어 있었다. 복사기가 그 칸의 흰 것까지 성실하게 옮겨놓았다. 그 뒤에 동의서 사본이 있었다. 젤이 번져 뭉개진 부분이 회색 얼룩으로 찍혀 나와서, 글자가 있었던 자리가 흐린 물자국처럼 남았다. 3년 전 그 얼룩을 만든 게 내 손인지 한 선생님 손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이게 원본은 병원에 있는 거죠?”
“의무기록실에 있습니다.”
남 과장이 기록지 사본을 손끝으로 끌어당겼다.
“당직의가 누구였는지 기록에 없네요. 그날 806호, 기억나세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인턴 말이었습니다. 여러 명이 들어갔을 겁니다.”
“코드 들어가면 그렇죠.”
그는 그 줄에 형광펜을 그었다. 노란색이 빈칸 위로 지나갔다.
거짓말은 한 문장도 하지 않았다. 방을 나올 때 그 서류 어디에도 내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그 안도가 목구멍으로 올라오면서 쇠 맛이 났다.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계단을 내려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2층 참에서 한여순 선생님과 마주쳤다. 그이는 카트에서 손을 뗀 채 서 있었고, 내 겨드랑이의 봉투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왔어?”
“네.”
“금액 봤어?”
“구천육백만.”
그이는 난간에 손을 얹고 아래쪽을 잠깐 봤다. 1층 로비에서 안내 방송이 두 번 울렸다.
“3년 동안 아무도 안 물어봤지.”
그건 질문의 모양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봉투를 다른 쪽 겨드랑이로 옮겼다.
“기록지 사본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럴 거야.”
“시행자 란이 비어 있었습니다.”
“내가 비워뒀으니까.”
그이가 나를 봤다. 눈꺼풀이 밤 근무한 사람처럼 무거웠다.
“그때 비워둔 칸, 지금은 누가 채워도 채워지는 칸이야.”
나는 그 말이 보호인지 통고인지 묻지 못했다. 그이는 카트를 밀고 3층 쪽으로 올라갔다. 바퀴 하나가 계단참 턱에서 걸렸다가 넘어갔다.
중환자실로 돌아와 손을 소독하고 6번 침대 앞에 섰다. 유안은 자고 있었다. 입을 조금 벌리고,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올린 채였다. 모니터에 심박이 백스물 몇으로 떠 있었고 산소포화도는 아침보다 두 자리 낮은 쪽에서 흔들렸다. 위층 리모델링 공사 소리가 천장 어딘가로 얇게 들어왔다. 드릴이 돌다 끊기고, 한참 있다 다시 돌았다.
봉투를 침대 발치 난간에 걸쳤다. 서류 무게에 봉투 아래쪽이 벌어졌다.
침대 걸이 클립에는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스프링 입만 반쯤 벌어진 채 위를 향해 있었다. 그 옆에 코팅된 라벨 하나가 아직 붙어 있었다. 소아중환자실에서 올라온 침대라서 이전에 쓰던 아이의 이름표가 남은 것이었다. 이름은 지워졌고 성 하나만 반쯤 남아 있었다. 그 아래 유성펜 글씨로 금식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알코올로 몇 번 닦였는지 획이 뭉개져 있었다.
나는 라벨 끝을 손톱으로 긁었다. 접착제가 오래돼서 종이만 얇게 벗겨지고 밑면은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만두고 클립을 만졌다. 손가락으로 눌렀다 놓으면 딸깍 소리가 났다. 두 번 더 눌렀다. 소리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크기로 났다.
3년 전 806호 침대 걸이에는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병원 로고가 위쪽에 인쇄된 양식이었고, 뒷면 아래쪽에 보호자 서명이 있었다. 나는 그 뒷면까지 읽었다. 읽고 나서 눌렀다. 그 순서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두 명이고, 한 명은 방금 카트를 밀고 3층으로 올라갔다.
비어 있는 클립을 보고 있으니 손이 저절로 주머니로 갔다. 주머니에는 접힌 처방 메모지와 볼펜이 있었다. 아무 종이라도 한 장 끼워 넣으면 이 걸이가 정상적으로 보일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다시 빼서 가운 옆구리에 문질렀다. 빈 칸은 누가 채워도 채워진다. 그 말을 들은 지 십오 분이 지났다.
간호사 하나가 수액 라인을 들고 옆을 지나갔다.
“선생님, 6번 오전 채혈 나갔어요. CRP는 이따 올라올 거고요.”
“네.”
“보호자분은 아까 잠깐 나가셨어요.”
“알겠습니다.”
그가 6번 침대 모니터 알람 볼륨을 한 칸 낮추고 갔다. 유안이 자면서 손을 조금 움직였다. 손등에 붙은 정맥 라인 고정 테이프가 한쪽 끝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걸 손가락으로 눌러 붙였다. 아이는 깨지 않았다. 테이프 밑에서 피가 조금 배어 나와 갈색으로 굳어 있었다.
봉투를 다시 겨드랑이에 끼우고 물러났다. 걸이는 그대로 비어 있었다. 나는 그 빈 입을 한 번 더 보고 데스크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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