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젖은 나무
2화. 마르지 않은 알코올 젤
“선생님, 806호 창가 자리요. 포화도 78입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복도를 뛰었다. 8병동 복도 끝 창틀에 성에가 앉아 있었고, 난방이 과해서 뛰는 동안 가운 안쪽이 축축해졌다. 새벽 두 시 사십일 분이었다. 806호 문을 밀자 산소 마스크에서 새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커튼을 젖혔을 때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건 노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병상 걸이에 끼워진 종이 한 장이었다. A4 한 장, 위쪽 가장자리가 클립에 눌려 접혀 있었고, 아래로 갈수록 병실의 축축한 공기를 먹어 우글거렸다.
나는 그것을 뽑았다.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 흉부압박, 제세동, 기관삽관. 항목이 셋이었고 각 항목 앞 네모 안에 체크 표시가 있었다. 보호자란에 볼펜을 세게 눌러 쓴 강인호. 날짜 십일월 이십팔일. 담당의 서명. 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은 비어 있었다. 뒤집는 동안 노인의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두 번 났다.
강복수, 여든넷, 흡인성 폐렴. 산소 5리터에 포화도 78. 모니터 숫자가 76으로 내려갔다.
그날은 판단이 먼저였다. 나는 다 읽었다. 뒷면까지 읽었다. 열두 초쯤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종이를 시트 위에 내려놓았다.
환자복 단추 두 개가 실을 끌고 떨어졌다. 갈비뼈가 종이 위에 얹힌 것처럼 얇았다. 검상돌기를 손끝으로 찾고, 그 위 두 손가락 지점에 손꿈치를 얹고, 팔을 펴서 체중을 실었다.
세 번째 압박에서 젖은 나무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소리라기보다 감각이었다. 손목뼈를 타고 팔꿈치까지, 어깨까지 올라왔다. 그다음부터 가슴은 물먹은 스펀지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세었다. 하나, 둘, 셋. 소리 내서 세었는데 병실에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간호사가 카트를 밀고 들어온 건 스무 번쯤에서였다.
“선생님, 그 환자 디엔아르인데요.”
“알아요.”
압박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두 음절이 커튼에 먹히지 않고 벽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팔은 리듬을 잃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입술이 마르는 게 느껴졌고, 마스크 안쪽으로 내 숨이 뜨겁게 돌았다. 간호사가 카트 손잡이를 쥔 채 반 걸음 멈춰 섰다. 나는 그 사람의 신발 앞코가 침대 다리 쪽으로 다시 움직이는 것을 눈 아래로 봤다. 앰부 백에서 공기 밀려 나가는 소리가 났다. 아무도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뒤늦게 들어온 당직 3년차가 커튼 안쪽을 들여다보고 “얼마나 됐어”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이 분쯤요” 하고 답했다. 그가 시계를 봤다. 그게 전부였다.
사 분 뒤에 노인의 목에서 그르렁 소리가 났다. 모니터의 파형이 제 리듬을 잡았다. 포화도가 84, 88, 91까지 올라갔다. 3년차가 커튼을 젖히고 나가면서 말했다.
“어차피 아침까지도 못 갈 것 같은데.”
사람들이 흩어졌다. 노인의 벌어진 가슴 위에 내 장갑 지문이 남아 있었다. 나는 단추가 없는 자리를 여며보려다가 그만두고 이불을 끌어올렸다.
한여순 선생이 언제부터 내 뒤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그가 침대 시트 위에서 종이를 집었다. 두 손으로 가장자리를 펴서, 병상 걸이 클립에 도로 끼웠다. 종이 아래쪽에 내 장갑에서 묻은 알코올 젤 자국이 반투명하게 번져 있었다. 마르지 않은 채였다.
“읽었지.”
질문의 모양이 아니었다. 나는 반 박자 늦게 답했다.
“…네.”
“어디까지.”
“뒷면까지요.”
그가 나를 한 번 봤다. 놀라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 대답을 처음 들은 사람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는 카트 위에서 CPR 기록지를 집어 내밀었다.
“시각하고 약물만 적어. 시행자 란은 비워둬.”
“…제가 눌렀는데요.”
“거기 지원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면 너만 시끄러워져.”
나는 펜을 받았다. 압박 시작 02:44, 자발순환 회복 02:48. 에피네프린 없음. 제세동 없음. 시행자 란의 네모는 비워두었다. 펜을 쥔 손이 그때는 떨리지 않았다. 글씨가 평소보다 작았다.
한여순 선생이 기록지를 받아 클립보드에 끼우며 말했다.
“아들한테는 상태만 설명해. 순서는 말하지 말고.”
“순서요.”
“네가 종이 읽은 다음에 눌렀다는 순서.”
그가 커튼을 닫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병상 걸이의 종이를 봤다. 알코올 젤 자국이 조금 더 넓게 번져 있었다.
아들은 다섯 시가 넘어서 왔다. 검정 패딩에 목장갑을 낀 채였다. 침대 옆에 서서 아버지 얼굴을 봤다. 3초쯤이었다. 그 3초를 나는 나중에 여러 번 다시 세어봤다.
“그래서 며칠이나 갑니까.”
“장기적으로는 어렵고, 지금은 순환이 돌아온 상태라서요.”
“며칠이요.”
“…며칠에서 몇 주까지도 말씀드리기가.”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하루에 얼마죠, 여기.”
원무과 위치를 알려드리겠다고 하려다 말았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목장갑을 벗어서 패딩 주머니에 넣는 손이 보였다. 병상 걸이의 종이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자기 이름이 거기 적혀 있는데도.
아침 인계 때, 야간 특이사항을 말할 차례가 왔다.
“806호 강복수 님 새벽에 포화도 떨어져서 산소 올렸습니다. 지금은 91 유지 중입니다.”
선배가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코드 돌았어?”
“짧게요.”
“기록 정리해놓고.”
“네.”
말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인계 노트에 ‘포화도 저하, 산소 조절, 경과 관찰’이라고 적었다.
당직실 세면대의 수도는 온수 쪽으로 돌려도 미지근했다. 나는 손을 씻었다. 손톱 밑으로 물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는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오른쪽 손목 안쪽이 뻐근했다. 손꿈치 아래가 붉었다. 거울에는 내 얼굴이 반쯤 김에 가려져 있었다.
나는 거울을 보면서 문장을 하나 만들었다.
나는 사람을 살렸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입 모양만 만들어봤다. 거울 속에서 입술이 세 번 벌어졌다 닫혔다. 턱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혀가 걸리는 데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한 번 더 만들어보려고 입을 벌리다가, 김 위로 손바닥을 문질러 얼굴을 지웠다. 비누를 다시 짜서 손등을 문질렀다. 손목까지, 팔꿈치 아래까지. 거품이 손톱 밑에서 부옇게 빠져나갔다.
문 밖 복도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수도를 잠그지 않은 채 손을 계속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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