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 하지 마요, 약속16화 / 전 19화1

4부 마흔일곱 초

16화. 혀 안쪽의 스물세 자

서지원


회색 재킷은 인턴 면접 날 한 번 입고 사물함 맨 안쪽에 걸어둔 채였다. 오늘 아침 여섯 시 사십 분에 꺼냈더니 어깨 선에 옷걸이 자국이 두 군데 솟아 있었다. 나는 그걸 손바닥으로 문질러 눕히다 말고 그냥 입었다.

아홉 시 사십 분, 조정중재원 3층 대기 의자에서 가운을 벗었다. 소매를 안으로 접어 무릎에 올렸다가, 다시 펴서 등받이에 걸었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두 장을 꺼냈다. 열두 줄짜리 출력물과 그 아래 붙어 있던 갈색 종이가 새벽보다 더 단단히 들러붙어 있었다. 떼지 않고 그대로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왼쪽 주머니의 집 그림은 두 번 접힌 채였고, 셔츠 가슴께에 넣자 단추 사이로 각이 한 번 걸렸다가 들어갔다.

남기석 과장이 서류철을 무릎에 세워 놓고 앉아 있었다. 표지에 붙인 노란 색인지가 다섯 장이었다.

“선생님, 오늘은 서면 범위 안에서만요.”

과장이 색인지 하나를 손톱으로 세웠다.

“당시 인턴 말 당직이었다. 환자 상태 급변으로 소생술을 시행했다. 여기까지가 정리된 문장입니다. 그 앞뒤로는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안 하시는 게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내 대답이 반 박자 늦게 나왔다. 과장이 나를 한 번 보고 서류철을 다시 세웠다.

휴대폰을 꺼냈다. 문선주 주임이 보낸 각서 원본 제출 거부 사유서 서식이 맨 위에 있었고, 그 아래 신경과 외래 예약 부도 안내가, 그 아래 원무과 부재중 두 통이 쌓여 있었다. 하나도 열지 않고 화면을 껐다.

조정실은 창이 하나였다.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빛이 테이블 가운데까지 들어왔다가 서류 더미에서 끊겼다. 강인호는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여섯 항목으로 줄인 명세서를 정면에 펴 놓고, 종이 왼쪽 위 모서리를 계속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웠다 놓았다. 뒤쪽 참고인 자리에 한여순 선생이 앉아 있었다. 흰 근무복 위에 남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조정위원이 물병을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 주었다.

“기록 시작하겠습니다. 피신청인, 2021년 11월 28일 새벽 경위를 진술하시겠습니까.”

남기석 과장이 펜을 고쳐 쥐었다. 검지 손등의 뼈가 한 번 솟았다.

“환자는 806호 창가 자리, 흡인성 폐렴으로 입원 중이었습니다. 새벽 두 시 사십사 분에 호출을 받고 갔습니다.”

“네.”

“병상 걸이에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과장의 펜이 멈췄다.

테이블 아래에서 과장의 손이 내 재킷 소매를 두 번 눌렀다. 짧게 두 번, 신호였다. 나는 물병을 끌어와 컵에 물을 따랐다. 컵 안의 물이 오르다가 멈추고, 표면이 흔들리지 않았다. 새벽 네 시 이십일 분에 6번 침대에서 그 손으로 흉골을 눌렀다. 뼈가 내려앉는 감각이 손바닥 가운데에 아직 남아 있었다. 컵은 조용했다.

정리된 문장은 이미 혀 안쪽에 놓여 있었다. 그 시점에 동의서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어제 오후 회의실에서 과장이 두 번 읽어 주고, 내가 세 번 소리 내어 따라 읽은 문장이었다. 세 번째에는 목소리가 처음보다 작아졌고 과장이 다시 한 번 읽어 보라고 했다. 스물세 자였다. 스물세 자만 내보내면 오늘 기일은 끝났다.

숨을 들이켜자 셔츠 가슴께에서 두 번 접힌 종이의 각이 갈비뼈에 걸렸다. 지붕이 삼각형이고 창문이 네 개인 집이었다. 창문 하나에는 안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피신청인?”

조정위원이 볼펜 끝으로 서류를 짚었다. 벽시계 초침이 두 칸 갔다. 복도에서 복사기가 종이를 뱉는 소리가 세 번 났다.

뒤쪽에서 카디건 소매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여순 선생이 앉은 자리는 내 등 뒤 왼쪽이었고,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3년 동안 그가 내게 한 말은 열 문장이 넘지 않았다. 그중 하나는 인계 데스크 앞에서였다.

“선생님은 그날 밤을 어디에 두고 다니십니까.”

물음표가 없는 것처럼 마른 말투였다.

나는 컵을 내려놓고 손을 무릎으로 가져갔다. 손바닥을 바지에 두 번 문질렀다. 과장이 내 소매를 세 번째로 눌렀다. 이번에는 조금 길었다.

“선생님.”

과장이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낮게 불렀다.

나는 손목을 뺐다. 안주머니 쪽으로 팔이 한 번 접혔다가 내려왔다. 스물세 자가 혀에서 미끄러졌다.

“저는 그걸 꺼내서 읽었습니다. 앞면을 읽고, 뒤집어서 뒷면까지 읽었습니다. 보호자 서명란에 강인호 씨 이름이 있는 것도 봤습니다. 그리고 종이를 걸이에 다시 끼우고, 눌렀습니다.”

세 군데에서 볼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남기석 과장의 서류철이 무릎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닿았다. 색인지 하나가 떨어져 나와 테이블 다리 쪽으로 밀려갔다. 과장은 그걸 줍지 않았다.

“피신청인, 지금 진술은 제출된 답변서 내용과 다릅니다. 정정하시는 겁니까.”

“정정합니다.”

“위원님, 잠시 피신청인 측에 시간을 주십시오.”

과장이 반쯤 일어섰다.

“괜찮습니다.”

내가 말했다. 과장이 나를 봤다. 나는 조정위원 쪽을 계속 보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다. 세 번째 압박에서 갈비뼈가 꺾였습니다. 두 시 사십팔 분에 자발순환이 돌아왔습니다. 아침 인계 때 저는 소생술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포화도 저하, 산소 조절, 경과 관찰이라고 했습니다.”

“기록지 시행자 란이 공란인 것은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비우신 겁니까.”

내가 대답하기 전에 뒤에서 의자가 밀렸다.

“제가 비웠습니다.”

한여순 선생이 손을 무릎에 두고 앉아 있었다.

“참고인, 순서대로 하겠습니다. 2021년 11월 28일 새벽에 무엇을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저 사람이 종이를 꺼내서 뒷장까지 넘기는 걸 봤고, 다시 끼우고 올라가는 것도 봤습니다. 순서대로 봤습니다.”

“제지하지 않으셨습니까.”

“안 했습니다.”

카디건 소매 끝이 근무복 밖으로 조금 나와 있었다.

“기록지 시행자 란은 제가 비웠습니다. 그건 안 적으십니까.”

조정위원이 잠깐 손을 멈췄다가 뭔가를 적었다. 옆자리 심사관이 서류를 한 장 넘겼다. 형광등이 한쪽 줄만 켜져 있어서 테이블 저쪽 끝은 어두웠다.

“신청인, 피신청인 진술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강인호가 명세서를 자기 쪽으로 조금 당겼다. 뒤집지도 않고 오래 들여다봤다. 목이 한 번 움직였다.

“…오천사백삼십이만 원입니다.”

그 뒤에 놓을 숫자를 찾는 사람처럼 명세서 아래쪽을 훑다가, 찾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숙이자 창에서 들어온 빛이 손등에만 남았다. 그는 하루 팔십칠만 원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그 말을 하지 않는 시간을 세고 있었다.

“피신청인 측, 오늘 추가로 제출하실 서면 있습니까.”

나는 안주머니 쪽으로 손을 올렸다. 재킷 안감 위를 엄지로 눌렀다. 위쪽 한 장은 얇아서 아래에 눌리며 미끄러졌고, 아래쪽 한 장은 뻣뻣해서 눌러도 형태가 그대로 남았다. 엄지를 조금 옮기자 크레파스가 눌린 자리가 도톰하게 솟아 손가락 끝에 걸렸다. 글자 획이 어느 방향으로 누워 있는지 나는 보지 않고도 알았다. 쿵쿵 하지 마요. 약속. 그 아래에 내 이름이 있었다.

“없습니다.”

“오늘 기일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기일 전에 피신청인 측 정정 답변서 제출해 주십시오.”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남기석 과장이 바닥의 색인지를 주워 서류철에 아무렇게나 끼웠다. 문 앞에서 그가 내 팔꿈치 옆에 섰다.

“선생님, 병원 입장은 오늘부로 달라집니다. 그건 아시죠.”

“압니다.”

“오늘 새벽에 6번 침대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여기서 다룰 사건이 아닙니다.”

과장이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앞서 나갔다. 한여순 선생은 복도 끝 정수기 앞에서 종이컵에 물을 받고 있었다. 나를 보고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가, 컵을 들고 반대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강인호가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나왔다. 복도 창으로 들어온 빛이 그의 신발코까지 와 있었다. 그는 내 앞에서 멈췄다. 봉투 입구를 손가락으로 벌렸다가 다시 눌러 닫았다.

“명세서 여섯 항목 중에요.”

“네.”

“2021년 11월 28일 하루치는 빼겠습니다. 팔십칠만 원.”

봉투가 그의 손 안에서 한 번 접혔다.

“그날 하루는 제가 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가 봉투를 다시 옆구리에 끼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안주머니 위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두께를 확인하고 재킷 단추를 잠갔다. 복도 끝 창이 열려 있어서 급수탑 배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어왔다. 어디선가 철제 캐비닛 문이 닫혔다. 나는 정수기 앞을 지나 반대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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