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마흔일곱 초
15화. 갈색 크레파스의 집
타일 위에 엎어진 종이컵에서 밀크커피가 반원으로 퍼지고 있었다. 설탕 냄새가 소독약 냄새 위로 잠깐 떴다가 가라앉았다. 임경아는 그것을 밟고 들어왔다. 슬리퍼 바닥이 두 걸음마다 끈적하게 떨어졌다.
나머지 한 잔은 왼손에 들려 있었다. 뚜껑 틈으로 넘친 것이 손가락 사이를 따라 손목까지 내려갔는데도 컵을 내려놓지 않았다.
“유안아.”
이름이 끝까지 나왔다. 두 번째도 끝까지 나왔다.
“유안아.”
세 번째부터 끝이 잘렸다. 임경아는 아이 얼굴을 보지 않고 이불 위를 봤다. 아이의 왼손을 잡아 두 번 흔들었다. 손목이 접혔다가 펴졌다. 놓자 그 손은 이불 위로 떨어져 손바닥이 위를 향한 채 멈췄다.
아이 옆구리 옆에 종이 두 장이 겹쳐 있었다. 위가 새벽에 내가 뽑은 열두 줄이었고, 아래가 갈색 크레파스로 쓴 것이었다. 압박 중에 밀려서 각이 어긋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먼저 집고 싶었다. 손이 나가지 않았다.
임경아가 위의 것을 집어 눈앞까지 들어 올렸다. 인쇄된 글자였고, 첫 줄에 3년 전 11월이라는 숫자가 있었다. 입술이 그 숫자를 소리 없이 따라 움직였다.
그러고는 그 종이를 왼쪽으로 젖혀 아래 것을 들췄다. 젖은 손끝이 종이에 닿는 자리마다 갈색 획이 물을 먹었다. 크레파스가 아니라 갈색 색연필 자국처럼 가늘게 옆으로 번지면서, 아이가 힘주어 눌러 쓴 부분만 진하게 남았다. 임경아가 손끝을 떼자 지문 모양이 종이에 옅게 찍혔다. 그 자리의 글자 하나가 반쯤 뭉개졌다.
“쿵쿵.”
거기까지 읽고 멈췄다. 종이를 든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아이 이름 옆의 서명을 봤다. 여덟 살 아이가 자기 이름 석 자를 크레파스로 쓴 자리였다.
“이게… 이게 뭐예요, 선생님.”
나는 대답을 만들지 못했다.
“우리 애가 이걸 왜 갖고 있어요.”
높임말이 벗겨지는 데 한 문장이 걸렸다.
“네가 쓰게 했지. 애한테 이걸. 여덟 살한테.”
임경아가 종이를 든 손을 내 가슴 쪽으로 뻗었다. 컵이 오른손으로 옮겨 갔고, 남은 커피가 카디건 소맷단으로 흘렀다. 한여순 선생이 뒤에서 임경아의 어깨를 옆으로 눌러 보조 의자에 앉혔다. 어깨를 잡는 힘이 세지 않았는데 임경아는 그대로 앉았다.
“어머니, 여기 앉으세요. 애 손 잡으시고.”
그리고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시간 부르고.”
나는 모니터를 봤다. 선이었다. 반 박자 늦게 입이 열렸다.
“네 시 이십일 분.”
조하늘이 앰부를 카트 위에 올려놓았다. 야간 간호사가 아이 팔에서 압박대를 풀었다. 아이 가슴 가운데의 붉은 자리는 아직 그대로 있었다. 임경아는 아이 손을 다시 잡았고, 이번에는 흔들지 않았다.
한여순 선생이 커튼을 반쯤 닫으며 내 팔꿈치를 스쳤다. 나는 그 틈에 침대 위로 손을 넣어 두 장을 겹친 채로 집었다. 아래쪽 갈색 종이가 살짝 젖어 손바닥에 붙었다.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손을 뺐다. 임경아는 보지 않았다. 아이 손등의 테이프만 보고 있었다.
데스크 등만 켜져 있었다. 기록지를 클립보드에서 빼서 펼쳤다.
칸은 정해져 있었다. 인지 시각, 압박 시작 시각, 약물, 제세동, 결과. 47초를 적을 칸은 없었다. 침대 난간에 두 손을 붙이고 있던 시간을 적는 칸도, 갈색 크레파스로 받은 서명을 적는 칸도 없었다. 그런 칸을 만들어 쓰면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진술이 된다.
압박 시작 시각에 03시 52분을 썼다. 에피네프린 두 번, 투여 시각. 제세동 없음. 결과란에 다섯 글자를 썼다.
자발순환 회복 없음.
시행자 란으로 펜을 옮겼다. 3년 전 같은 서식의 같은 칸을 비워둔 채 넘긴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썼다. 서지원.
‘원’의 마지막 획을 그으면서 펜 끝을 봤다. 획이 곧았다. 종이에 볼펜이 긁히는 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간격이었다.
3년 전 11월 이후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해 겨울부터 나는 처치 전에 화장실에 들러 찬물에 손을 담갔다가 나왔다. 봉합 전에 손등을 눈높이로 들고 오 초를 셌다. 넷째 손가락 끝이 먼저 흔들렸고, 그러면 국소마취 주사기를 들었다 놓았다 두 번쯤 한 뒤에야 피부에 댔다. 회진 전 커피는 두 손으로 잡았다. 한 손으로 들면 수면이 컵 안에서 미세하게 떨렸고, 그걸 누가 볼까 봐 복도에서는 아예 마시지 않았다. 동의서에 서명할 때 이름 끝 획이 두 번 갈라진 적도 있었다. 그 떨림을 나는 3년 동안 양심이라고 불렀다. 손이 떨리는 동안에는 내가 아직 그날을 잊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펜을 놓고 손등을 위로 뒤집어 눈높이까지 들었다. 오 초를 셌다. 열까지 셌다. 손가락 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형광등 아래에서 힘줄 그림자만 가만히 있었다.
손을 내렸다가 다시 펜을 쥐고, 기록지 뒷장 여백에 세로로 선을 하나 그었다. 자로 그은 것처럼 곧게 나갔다. 하나 더 그었다. 두 선의 간격이 위에서 아래까지 같았다.
그것이 하필 오늘 사라져서, 상급처럼 내 손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은 선을 손톱으로 긁어 보다가 그만두었다. 기록지의 잉크를 손등으로 스치지 않게 조심해서 클립보드에 다시 끼웠다.
야간 간호사가 약 카트를 밀고 지나가다가 멈췄다.
“선생님, 아까 그 전화요.”
“네.”
“김 선생님이셨어요. 아침에 6번 인수인계 받기 전에 밤 사이 상태 먼저 물어보시려고요. 새벽에 미리 알아두면 아홉 시에 덜 걸린다고.”
“뭐라고 하셨어요.”
“지금은 좀 어렵다고 했어요. 다시 걸겠다고 하셨는데.”
간호사가 카트를 밀고 갔다. 나는 데스크 시계를 봤다. 네 시 삼십사 분이었다. 아홉 시까지 네 시간 반이 남아 있었다. 아홉 시가 오면 나는 6번 침대의 담당이 아니게 된다고 어제 아이에게 설명했다. 아이는 그때까지 세어야 할 작대기가 몇 개 남았는지를 물었다.
아홉 시는 이제 오지 않는다. 오전 아홉 시에 인수인계할 침대가 없다.
기록지를 덮었다. 사이에 끼워두었던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와 신발 등 위로 떨어졌다. 갈색 집이었다. 문이 없고 창문만 있고, 창문은 안에서만 열린다고 아이가 규칙을 정해준 집이었다. 마지막 남은 갈색 크레파스로 벽을 다 칠하려다가 오른쪽 아래 모서리만 흰 채로 남아 있었다.
주워서 무릎에 올려놓았다. 왁스 냄새가 아주 옅게 났다. 벽면을 엄지로 문질렀더니 손끝에 갈색이 얇게 옮겨 묻었다. 나는 그것을 바지에 닦지 않았다.
한여순 선생이 뒤에 와서 섰다. 장갑을 벗은 손에서 소독약 냄새가 났다.
“기록은 다 했어?”
“네.”
“그럼 됐다.”
잠깐 서 있었다. 6번 침대 쪽에서 임경아가 아이 이름을 다시 부르는 소리가 커튼을 지나 왔다. 이번에는 끝까지 나왔다.
“어머니는 사망 확인서 나올 때까지 저기 계실 거야. 선생님은 두 시간쯤 있다가 다시 들어와.”
“네.”
한여순 선생이 데스크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짚었다.
“네가 뭘 지켰는지는 네가 알겠지.”
그리고 6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커튼 고리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47초를 아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기록지에도, 단체방에도, 오늘 오전 조정실에 들어갈 어떤 서류에도 그 숫자는 없었다.
나는 갈색 집을 세로로 접었다. 창문 다섯 개가 접힌 선 양쪽으로 나뉘었다. 한 번 더 접어 왼쪽 주머니에 넣었다. 오른쪽 주머니에는 아까 침대에서 집어온 두 장이 그대로 있었고, 아래쪽 갈색 종이가 아직 마르지 않아 위의 인쇄물에 붙어 있었다.
창밖은 어두웠다. 유리에 병동 등만 두 줄로 비쳤다.
복도 저쪽에서 커튼 고리가 한 번 더 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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