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 하지 마요, 약속14화 / 전 19화1

4부 마흔일곱 초

14화. 겹쳐진 종이와 손목의 맥

서지원


“십 분만요. 커피 하나만 뽑고 올게요.”

임경아가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카디건을 어깨에 걸쳤다. 소매에 팔을 끼우지 않고 앞을 여미기만 했다.

“선생님, 그동안 여기 계실 거죠.”

나는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네.”

임경아가 커튼 자락을 손등으로 밀었다가, 아이 발끝 쪽을 한 번 보고 나갔다. 슬리퍼 소리가 두 걸음 만에 멀어졌다. 8번 침대의 모니터가 열네 초에 한 번씩 짧게 울렸다. 나는 두 번을 세고 세 번째를 기다렸다. 세 번째는 조금 늦게 왔다. 세 시 오십일 분이었다.

6번 침대 걸이에는 종이가 두 장 겹쳐 물려 있었다. 앞장은 임경아의 손글씨였고,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해 살려주십시오, 라는 문장의 마지막 획이 종이 끝까지 밀려나가 있었다. 그 뒤에 눌려 접힌 것은 갈색이었다. 내 가운 주머니에도 두 장이 있었다. 프린터에서 갓 나온 종이는 아직 미지근했고, 다른 한 장에서는 왁스 냄새가 났다.

유안은 눈을 감고 있었다. 왼손은 이불 위에 놓여 있었고 오른손 검지 하나만 베개 밑에 들어가 있었다. 베개 모서리 아래로 갈색 끝이 조금 나와 있었다. 나는 이불을 아이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종이 위의 작대기는 다섯 개였다.

모니터의 심박수가 백여덟에서 백둘로 내려갔다. 백둘에서 아흔넷, 아흔넷에서 칠십사가 되는 데 삼십 초가 걸리지 않았다. 세 시 오십구 분이었다. 나는 카트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칠십사가 오십일이 됐다. 네 시 정각에 알람이 길게 이어졌다. 8번 침대의 열네 초짜리 소리가 그 아래로 묻혔다.

야간 간호사가 커튼을 젖히며 발치의 응급카트를 끌어당겼다. 바퀴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나는 침대 난간을 두 손으로 잡았다. 스테인리스가 차가웠다. 손가락 마디가 봉에 눌려 하얘지는 것이 보였다.

“선생님, 지시요.”

모니터 아래에서 초 단위가 흘렀다. 나는 그것을 세기 시작했다.

셋. 심박은 사십사였다. 넷, 다섯. 사십사가 삼십구로 내려갔다. 산소포화도는 팔십칠에서 아래로 가는 중이었고 숫자 옆의 막대가 반쯤 비어 있었다. 여섯, 일곱.

두 손은 난간에 있었다.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손을 들지 않는 것이 이 밤에 내가 하기로 되어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여덟, 아홉, 열. 나는 걸이에 물린 종이 두 장을 봤다. 앞장의 글자는 크고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뒷장은 접힌 자리만 갈색으로 보였다. 열하나. 저 아이는 내 주머니에 있는 종이에 자기 손으로 글자를 썼다. 열둘. 나더러 서명하라고 내 손목을 끌어당겼다. 열셋. 여덟 살이 쓴 이름 옆에 내 이름 아홉 글자가 있었다.

“선생님, 보드 넣을게요.”

간호사가 아이 어깨를 들었다. 등 밑으로 판이 들어갔고 아이의 머리가 한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열넷, 열다섯.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산소포화도 숫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짧은 선이 떴다. 열여섯. 임경아는 지금 복도 끝 자판기 앞에 있었다. 동전이 떨어지고 종이컵이 내려앉고 밀크커피가 나오는 데 삼십 초쯤 걸렸다.

열일곱. 3년 전에 나는 동의서를 뒷면까지 읽었다. 열여덟. 읽고도 눌렀다. 열아홉, 스물. 그래서 이번에는 누르지 않으려고 여기까지 왔다. 스물하나. 그 문장을 속으로 발음하는 동안에도 오른손 검지가 난간 위에서 한 번 튀었다. 떨림은 아니었다. 스물둘.

커튼 밖에서 뛰는 소리가 났다. 스물셋, 스물넷. 조하늘이 커튼을 밀고 들어와 앰부백을 아이 얼굴에 대고 나를 봤다.

“선생님.”

스물다섯, 스물여섯.

“지시 주세요.”

스물일곱. 심박이 이십팔이었다. 스물여덟. 아이의 손끝이 이불 위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것이 아이가 움직인 마지막이었는지 내 눈이 잘못 본 것인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스물아홉, 서른.

“에피 준비됐습니다.”

간호사가 앰풀 라벨을 내 눈높이로 들어 보였다. 서른하나. 나는 라벨의 글자를 다 읽었다. 읽을 필요가 없는 글자였다. 서른둘.

주머니 안쪽에서 종이 두 장이 서로 스치는 감촉이 있었다. 서른셋. 한 장은 미지근했고 한 장은 왁스 냄새가 났다. 서른넷. 아이는 엄마가 그만해달라고 말한 사람으로 남는 것을 무서워했다. 서른다섯, 서른여섯. 그래서 누른 적 있는 손을 골랐다. 서른일곱. 누르는 사람이 안 누르면 그게 진짜 약속이니까.

서른여덟. 심박이 십이가 됐다. 서른아홉. 화면 위쪽 파형이 낮고 느린 물결로 바뀌었다. 마흔. 아이의 입술이 회색으로 변했다. 마흔하나.

“선생님.”

조하늘이 앰부를 두 번 짜고 나를 봤다. 마흔둘, 마흔셋. 나는 난간을 더 세게 잡았다. 봉이 손바닥 안에서 미끄러졌다. 손바닥에 땀이 있었다. 마흔넷, 마흔다섯, 마흔여섯, 마흔일곱.

손은 판단보다 먼저 움직였다.

난간을 놓은 기억이 없는데 손바닥이 이미 아이 가슴 한가운데에 있었다. 여덟 살의 흉골은 얇았다. 팔꿈치를 펴고 체중을 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압박에서 젖은 나무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3년 전과 같은 소리였는데 훨씬 작고 훨씬 짧았다. 손바닥으로 먼저 듣고 귀로 나중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흉골이 내려가고 반동으로 올라오고 내 몸이 그 반동을 따라 위아래로 흔들리고, 가운 주머니 입구가 벌어졌다. 종이 두 장이 아이의 옆구리 옆으로 떨어져 나란히 놓였다.

한 장은 프린터 잉크였다. 첫 줄의 날짜는 3년 전 십일월이었다. 새벽 두 시 사십사 분, 나는 동의서를 뒷면까지 읽은 뒤 압박을 시작했다. 다른 한 장은 갈색 크레파스였다. 쿵쿵 하지 마요. 약속.

두 장은 서로를 보지 않은 채 나란히 있었다.

“교대할까요.”

조하늘이 물었다.

“아니.”

내가 처음으로 짧게 대답했다.

열둘 열셋 열넷. 간호사가 에피를 밀어 넣고 시각을 소리 내어 불렀다. 스물 스물하나. 조하늘이 앰부를 두 번 짜고 다시 물러났다. 스물여덟쯤에 유안이 눈을 떴다.

아이는 나를 보지 않았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입이 벌어져 있었고 아래턱이 압박에 맞춰 조금씩 흔들렸다. 왼손이 이불 위에서 아주 느리게 올라왔다. 팔꿈치가 먼저 굽고, 손목이 나중에 따라왔다. 그 손이 내 오른쪽 손목을 잡았다.

여덟 살이 낼 수 있는 힘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힘이었다. 그러나 잡는 힘이었다. 엄지가 손목 안쪽에, 나머지 손가락이 바깥쪽에 걸렸다. 맥이 뛰는 자리였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놓지 않았다. 두 번의 압박 사이에 그 손이 미끄러져 내려가 이불 위로 떨어졌다.

오십일이었던 숫자가 삼십이 되고, 이십이가 되고, 그다음에 선이 됐다.

등 뒤에서 자동문이 열렸다. 종이컵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두 번 났다. 뜨거운 것이 바닥에 퍼지는 소리도 같이 났다.

“유안아.”

임경아가 불렀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보호자분, 이쪽으로.”

한여순 선생의 목소리는 낮았다. 커튼 고리가 레일에서 밀리는 소리, 슬리퍼가 젖은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소리, 누가 누구의 팔을 잡는 소리가 겹쳤다.

나는 계속 눌렀다. 서른둘 서른셋 서른넷. 조하늘이 다시 앰부를 짰다. 간호사가 두 번째 에피 앰풀의 목을 꺾었다. 유리가 부러지는 소리는 아주 작았고 조금 전에 들은 소리와 닮은 데가 없었다. 마흔 마흔하나 마흔둘. 아이의 갈비뼈가 내 손바닥 밑에서 아까와 다른 모양으로 내려갔다.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선생님.”

나는 두 번 더 누르고 손을 뗐다. 손바닥 자국이 아이 가슴 가운데에 붉게 남아 있었다. 조하늘이 앰부를 얼굴에서 떼고 뒤로 물러섰다. 모니터는 선이었고, 알람은 누가 껐는지 이미 꺼져 있었다. 커튼 너머에서 8번 침대의 소리가 다시 열네 초에 한 번씩 들려왔다.

침대 위의 종이 두 장이 압박 때마다 조금씩 밀려서, 이제는 완전히 겹쳐 있었다. 위에 놓인 것이 갈색 글씨 쪽이었다. 그 밑으로 프린터 잉크의 날짜가 반 줄쯤 나와 있었다.

임경아가 한여순 선생의 팔을 밀고 침대 옆으로 들어왔다. 카디건 앞자락에 갈색 물이 튀어 있었다. 아이 얼굴을 보지 않고, 이불 위를 봤다. 겹쳐진 종이 쪽으로 손이 왔다.

데스크에서 전화가 울렸다. 간호사가 받는 소리가 들렸다.

“네, 6번 침대요. 지금은 좀.”

수화기를 든 채 나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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