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취소된 예약
12화. 취하하지 않는 서명
무인 수납기 화면이 이십 초마다 한 번씩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카드를 넣으라는 안내 문구가 떴다가 사라지고, 다시 떴다. 로비 등은 가운데 줄만 켜져 있었고 원무 창구 셔터는 내려가 있었다. 편의점 쪽에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십 분쯤 전부터 자판기 옆 테이블에 앉아 휴대폰 통화 목록을 열어두고 있었다. 발신, 오후 여섯 시 이십이 분, 통화 시간 사십일 초. 내가 걸었다.
경비원이 카트를 밀고 지나가다가 나를 봤다. 면회 시간 끝났다고 말하려던 얼굴이었다가 가운을 보고 그냥 지나갔다. 바닥에 왁스를 새로 먹인 지 얼마 안 된 구역이어서 카트 바퀴 소리가 유난히 길게 끌렸다.
열한 시 십사 분에 회전문이 돌았다.
강인호는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지난번 소회의실에서 봤을 때는 목까지 단추를 채우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셔츠 깃이 벌어져 있었고 겨드랑이에 클리어파일 하나를 끼고 있었다. 그는 로비를 반쯤 건너오면서 이미 파일을 겨드랑이에서 빼내 들었다.
“항목을 여섯 개로 줄였습니다.” 앉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근거 없는 다섯 개는 뺐습니다.”
나는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오늘은 항목을 들으러 나온 게 아닙니다.”
그가 의자를 당기다 말고 나를 봤다. 자판기 두 번째 버튼은 눌러도 반응이 없는 채였다. 나는 세 번째 줄에서 옥수수수염차를 뽑아 그의 앞에 놓았다. 캔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로비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럼 뭘 들으러 나오셨습니까.”
“지난번에 제가 여쭤본 것, 답을 아직 못 들었습니다.”
그는 캔을 따지 않았다. 파일을 열고 명세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폈다. 여러 번 접혔다 펴진 종이여서 접힌 자리마다 섬유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고, 형광펜 자국이 줄마다 그어져 있었다. 그는 그 종이를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
“2021년 12월 3일 전원, 2024년 1월 9일 사망. 요양병원 입원료가 하루 사만 이천 원이었습니다. 여섯 개 항목으로 정리하면 오천사백삼십이만 원입니다.”
“선생님.”
“기저귀는 뺐습니다. 매트리스 대여료도 뺐습니다. 그건 어차피 저희가 쓴 거라고 하더군요.”
“강인호 선생님.”
그가 형광펜 자국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그날 왜 서명하셨습니까.”
로비 자동문 밖에서 택시 한 대가 섰다가 아무도 내리지 않고 그냥 갔다. 그는 명세서 오른쪽 아래로 손을 옮겼다. 합계란이었다. 거기 적힌 숫자를 손톱 끝으로 눌렀다. 종이에 초승달 모양으로 자국이 파였다. 한 번 더 눌렀다.
“팔십칠만 원이었습니다.”
“뭐가요.”
“중환자실 하루요. 원무과에서 그렇게 알려줬습니다. 산정 안 되는 게 많아서 더 나올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계속 합계란을 누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서른 번쯤 두드렸습니다. 같은 숫자가 나오는데도 계속 두드렸습니다. 한 달이면 이천육백십만 원입니다. 아버지 통장에 사백이십만 원 있었습니다. 제 신용카드 한도가 삼백이었고 그달에 이미 백팔십을 썼습니다.”
말이 끊겼다. 그가 캔을 한 번 돌렸다.
“간호사가 종이를 주면서 읽어보시라고 했습니다. 저는 안 읽었습니다. 어디에 서명하는지만 물었습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캔 뚜껑의 고리만 봤다. 은색 고리가 조금 들려 있었다.
“그래서 서명했습니다. 이유는 그거 하나였습니다. 아버지가 편하게 가셔야 한다든가,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났으면 좋았을 텐데 안 났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봤다.
“그런데 선생님이 누르셔서, 우린 3년을 더 갚았습니다.”
편의점 냉장고가 한 번 크게 울었다가 잦아들었다. 나는 고리에 손톱을 걸었다 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내가 준비해온 문장들이 몇 개 있었다. 조정실에서 쓰려던 것도 있었고, 어제 진술서 초안 첫 줄에 썼다가 지운 것도 있었다. 당시 저는 판단할 시간이 사 초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문장들이었다. 그 문장들을 놓을 자리가 테이블 위에서 사라졌다.
그가 서명한 이유가 하루 팔십칠만 원이었다면, 내가 누른 이유는 무엇이었나. 3년 전 그 새벽에 나는 당직실로 돌아가 세면대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 밤에 내가 혼자 완성한 문장이 하나 있었다. 그 문장을 완성하고 싶어서 눌렀는지, 눌러서 그 문장이 생긴 건지 나는 지금도 순서를 모른다. 그 뒤로 3년 동안 손이 떨릴 때마다 나는 그걸 내가 아직 그 밤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로 셌다. 셀 때마다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는 명세서로 샀고 나는 손떨림으로 샀다. 파는 쪽은 같았다.
“선생님.”
그가 파일을 덮었다.
“그날 그 종이, 읽으셨습니까.”
내 오른손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게 대답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손을 그대로 두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명세서를 접어 파일에 넣고 일어섰다. 접는 손이 익숙했다. 같은 자리를 여러 번 접어온 사람의 손이었다.
“이건 안 마시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캔은 테이블에 그대로 남았다. 그는 로비를 반쯤 건너가다가 회전문 앞에서 돌아섰다.
“구천육백삼십이만 원 중에 사천이백은 근거가 약하다고 하더군요. 조정위원 쪽에서요.”
“압니다.”
“그래도 취하는 안 합니다.”
그가 파일을 겨드랑이에 다시 끼웠다.
“취하하면 제 서명만 남으니까요.”
회전문이 그를 통과시키고 두 칸쯤 더 돌다가 멈췄다. 밖에서 그는 담배를 꺼내는가 싶더니 갑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걸어갔다.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 흰 셔츠만 잠깐 보였다.
나는 자리에 남았다. 무인 수납기 화면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청소반이 카트를 밀고 들어와 편의점 앞 쓰레기통을 비웠다. 봉지 묶는 소리가 두 번 났다.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종이가 두 장 들어 있었다. 한 장은 어제 내가 쓴 것이고 한 장은 아이가 준 것이다. 아이 것은 표면이 미끄러웠다. 손끝이 글자 위에서 두 번 미끄러졌다가 접힌 골에서 걸렸다. 나는 그 골을 따라 손끝을 움직였다.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진동했다. 화면에 내선 번호 네 자리가 떴다. 중환자실이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서 화면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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