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 하지 마요, 약속10화 / 전 19화1

3부 취소된 예약

10화. 찢지 않는 약속

서지원


인턴 첫 달에 선배가 알려준 것 중에 아직 지키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보호자를 만날 때는 얼굴보다 손을 먼저 보라는 것이었다. 손에 뭘 들고 있는지로 그 아침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체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여덟 시 십 분, 6번 침대 커튼 앞에 임경아가 서 있었다. 손에 종이컵이 없었다. A4 한 장이 들려 있었고, 사무실 프린터로 뽑은 회색 인쇄였다. 화면을 확대해서 찍은 사진을 다시 확대해 출력한 탓에 유안의 손이 부풀어 뭉개져 있었고, 검정 크레파스 글자는 테두리가 번져 있었다. 날짜 아래 내 이름만 또렷했다.

“선생님, 이거 지금 여기서 찢어 주세요.”

밤새 벼린 문장이었다. 나는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찢지 않겠습니다.”

“찢어 주시면 저는 아무 말도 안 하겠습니다. 교체 요청서도, 저 그거 취소할 수 있어요. 지금 여기서 찢으시면요.”

“찢지 않겠습니다.”

높임말이 한 겹 벗겨졌다.

“여덟 살이 쓴 낙서를 왜 못 찢어. 왜 못 찢어요.”

“유안이 정한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야 내 목소리가 낮은 데서 갈라진 걸 들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처음이었다.

임경아는 침대 걸이 쪽으로 몸을 돌려 클립을 손톱으로 톡톡 쳤다. 두 번, 세 번. 클립 입에는 제 손글씨 요구서 사본이 두 장, 원무과 접수증 사본이 한 장 겹쳐 있었다. 종이가 흔들리면서 난간에 부딪혀 마른 소리를 냈다.

“아홉 시에 낸 요청서, 오늘 다시 확인하러 갈 거예요. 어제 접수만 하고 끝난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오후에 회의가 있다던데요.”

“저도 들었습니다.”

“선생님 손이 어떤 손인지 8번 침대 어머니도 알아요. 사진도 봤고요. 병동 전체가 봤어요.”

가습기 물 냄새가 커튼 안쪽에서 올라왔다. 유안은 눈을 감고 있었다. 감은 눈꺼풀이 아래쪽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이 아이가 자는 척을 어떻게 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숨을 조금 크게 쉬어서 티를 내는 쪽으로 실수를 한다.

“어머니, 안에서 듣고 있습니다.”

임경아가 커튼 틈으로 아이를 봤다. 한 손으로 사진을 접었다. 반으로, 다시 반으로 접어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접을 자리를 손톱으로 눌러 세우는 걸 나는 보고 있었다. 나와 같은 방식이었다.

“제출용이에요. 원본은 저한테 없으니까.”

그리고 병동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슬리퍼가 아니라 구두였다. 원무과에 갈 신발이었다.

아홉 시 사십 분에 문선주 주임이 데스크로 내려왔다. 봉투를 카운터에 올려놓고 손등으로 두 번 밀었다. 수신인 란에 내 이름이 정자로 인쇄되어 있었다.

“각서 원본 제출 요구서입니다. 오늘 오후 다섯 시까지요. 어제 경위서에 쓰신 표현은 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부분입니까.”

“’놀이’와 ‘정서 안정’이요. 밑줄 그어서 올렸는데, 그 두 군데만 지적이 왔습니다. 소아 환자에게 소생 중단 문구가 적힌 문서에 담당의가 서명한 사안을 놀이로 기재한 게 문제라는 거예요. 6번 침대 담당 배제 건은 오후 세 시 회의에 올라갑니다.”

세 시라는 숫자가 걸렸다. 신경과 외래는 세 시 반이었다. 나는 그 계산을 삼 초쯤 하고 접었다.

“원본은 못 냅니다.”

문선주가 볼펜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거부 사유를 쓰셔야 합니다.”

“쓰겠습니다. 대신 목요일 오전에 6번 침대 연명의료 논의를 정식으로 올리겠습니다. 서류는 어제 초안까지 잡아뒀습니다. 3년 전 건 진술서도 오늘 안에 법무팀에 냅니다.”

“그건 별개 사안이에요.”

“아이가 저를 고른 것도 별개는 아닐 겁니다.”

문선주가 나를 삼 초쯤 봤다. 그러고는 볼펜 뚜껑을 딸깍 닫았다.

“선생님, 담당에서 배제되면 그 논의를 올릴 자격도 없어집니다. 목요일 오전에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선생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압니다.”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오후 다섯 시까지요.”

문선주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나는 봉투를 들고 종이의 두께를 손끝으로 재봤다. 한 장이었다. 어제 아이가 준 종이보다 얇았다.

열 시에 커튼을 반만 열었다. 포화도 아흔둘, 심박수 백스물하나. 유안은 침대를 삼십 도쯤 올린 채로 앉아 있었고, 왼쪽 뺨에 어제 내가 테이프를 눌러 붙인 자리가 아직 옅게 남아 있었다. 어제보다 흐렸다. 하루면 지워지는 종류였다.

“오늘은 여섯 번이에요.”

“뭐가.”

“알람이요. 아침에 두 번 울렸어요. 그러니까 네 번 남았어요.”

“어떻게 알아.”

“어제는 다섯 번이었고, 그저께는 네 번이었어요. 하루에 하나씩 늘어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아이가 덧붙였다.

“규칙이 있으면 안 무서워요.”

포화도가 아흔하나로 내려갔다가 아흔둘로 올라왔다. 나는 캐뉼라 위치를 보고 손을 대지 않았다.

“선생님, 종이 아직 있어요?”

나는 가운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려 보였다. 안에서 두 장이 겹친 채로 둔한 소리를 냈다.

“엄마가 찢으라고 했지요.”

“들었어.”

“찢었어요?”

“안 찢었습니다.”

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른손을 베개 옆으로 슬쩍 밀어 넣었다. 손목이 베개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뭔가에 닿았는지 거기서 멈췄다. 잠깐 그대로 있었다.

“저도 있어요.”

“뭐가 있어.”

“나중에요.”

아이가 손을 빼서 이불 위에 놓았다. 손등의 정맥 라인 고정 테이프가 어제보다 한 칸 위로 옮겨져 있었다. 야간 근무자가 바꾼 자리였다.

“찢지 마세요. 약속은 종이에 써야 진짜예요.”

“찢지 않습니다.”

“엄마가 또 오면요.”

“그때도 안 찢습니다.”

유안이 나를 봤다. 여덟 살이 성인을 채점할 때 하는 얼굴이었다.

“오후에 오래요? 엄마가 아까 밖에서 전화했어요. 회의 얘기 했어요.”

나는 대답을 만들지 못하고 모니터를 봤다. 심박수가 백스물셋으로 올라갔다.

“오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선생님이요? 다른 선생님이요?”

“제가 옵니다.”

데스크로 돌아오자 한여순 선생이 중앙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후 세 시 회의 명단에 네 이름 올라간 거 알지.”

“들었습니다.”

“배제되면 6번 침대 커튼 안에 못 들어가. 회진도 못 붙어. 인수인계만 하고 나오는 거야.”

“압니다.”

“그리고.”

한여순이 6번 침대 파형 쪽으로 커서를 옮겼다. 어제 저녁부터의 심박 그래프가 오른쪽으로 조금씩 올라가 있었다.

“저 애가 목요일까지 못 갈 수도 있는 건 알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두 번 났다. 나는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운 채 두 손을 앞으로 펴봤다. 손가락 열 개가 나란히 멈춰 있었다. 이제는 이게 무엇도 되돌려주지 않는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6번 침대 알람이 울렸다. 세 번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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