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타는 것들
9화. 지워진 시간표와 새 연탄
벽에 붙은 냉장고가 낮게 울다 멈췄다. 그 소리가 그치자 방이 더 조용해졌고, 나는 노트를 벽등 밑으로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여름 페이지였다. 볼펜이 종이 뒤까지 밀고 나간 자리가 유독 깊었다. 다른 날의 글씨는 물 위에 뜬 것처럼 얇았는데, 이 줄만은 손톱으로 긁어낸 것처럼 파여 있었다.
‘그 사람이 왔다 갔다.’
나는 그 한 줄을 읽고, 담요를 끌어당겼다. 등이 서늘했다. 다음 줄에 눈을 옮겼다.
‘돈 빌리러 왔더라. 뻔뻔하게도.’
그 아래.
‘지안이 오기 전에 보냈다. 아 눈에는 안 비이게 하고 싶었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세 번을 읽어도 문장은 줄어들지 않았다. 2005년 여름, 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골목 어귀에서도, 가게 앞에서도, 없었다. 없는 게 당연하다고 스무 해를 믿어왔다. 그런데 있었다. 다만 내가 도착하기 전에 지워졌을 뿐이었다.
나는 그해 여름의 하루를 억지로 세워봤다. 방앗간 쪽으로 돌아 오던 하굣길, 매미 소리, 교복 등에 밴 땀. 그 밋밋한 오후 어딘가에, 내가 문을 열기 직전의 가게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앉았다 간 자리, 엄마가 훔친 불판,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새로 갈린 연탄.
다음 문단은 더 짧았다.
‘손 벌리더라. 곱창 값이라도 달라꼬. 나는 안 줬다.’
한 줄 띄우고.
‘줄 뻔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멈췄다. 안 줬다,에서 끝났으면 나는 이 페이지를 덮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한 줄을 비워두고, 그 아래 자기 손으로 줄 뻔했다,를 눌러썼다. 미워하면서 흔들린 밤, 원망하면서 손이 떨린 밤을, 혼자 앉아 옮겨 적었다. 나한테는 한 번도 내보이지 않은 밤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집었다.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미자 이모의 이름을 누르면서도, 이 시각에 무슨 소리를 들으려는 건지 나도 몰랐다. 신호가 두 번 가고 이모가 받았다.
“지안이가? 이 밤에 무슨 일이고. 니 엄마 어데 안 좋나.”
“아니요. 엄마는 병실에 있고, 저는 지금 모텔에 혼자 있어요.”
나는 목소리를 골랐다. 고르는데도 소리가 얇게 갈라졌다.
“이모, 그때… 2005년 여름에요. 아빠가 가게 온 적 있어요?”
수화기 너머로 무슨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숨인지 웃음인지 구분되지 않는 소리였다.
“니 그거를 우예 아노.”
이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텔레비전 소리가 낮게 깔리다 뚝 끊겼다. 리모컨을 누른 모양이었다.
“왔지. 한두 번이 아이라.”
나는 벽지를 봤다. 누렇게 번진 얼룩 하나가 등 오른쪽에 있었다. 물이 샜다 마른 자국 같았다.
“니 학교 파할 시간 되모 니 엄마가 나한테 전화를 해가꼬. 미자야, 애 좀 붙잡아도라. 방앗간 앞에서 아이스께끼라도 하나 사멕이고 시간 좀 끌어도라, 그캤다 아이가.”
나는 손끝으로 얼룩의 가장자리를 눌러봤다. 방앗간 앞. 이모가 나를 세워놓고 하드 봉지를 뜯어주던 오후들이 떠올랐다. 다 녹기 전에 먹어라, 손에 흐른다, 하면서 웃던 얼굴. 나는 그걸 이모의 정이라고만 알았다. 그 오후들이 실은 엄마가 짜놓은 시간표였다는 걸, 나는 스무 해가 지나 벽지 얼룩을 보며 알았다.
“몇 번이나요.”
얼룩을 누르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거를 우예 다 세노.”
이모의 말이 잠깐 끊겼다.
“니 엄마가 얼마나 독하게, 니 눈에는 아무것도 안 비이게 할라꼬… 아이고. 마 됐다. 옛날 얘기 해가 뭐하노.”
이모는 말끝을 흐렸고, 나는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화면이 어두워지자 방이 다시 냉장고 소리로 채워졌다.
지워진 장면은 하나가 아니었다. 내가 평온했다고 믿은 그 여름 전체가, 엄마가 나 대신 세워둔 시간표 위에 얹혀 있었다. 아버지가 다녀간 오후마다 이모가 골목 앞에 나와 있었고, 나는 하드를 물고 방앗간 쪽으로 느리게 걸어오면서 아무것도 몰랐다. 가게 안에서 손을 벌리던 사람도, 곱창 값이라도 달라던 목소리도, 줄 뻔했다는 그 밤도, 나는 하나도 몰랐다. 엄마는 그걸 다 치워놓고 다음 날 아침 냄새 하나 없는 얼굴로 내 도시락을 쌌다.
나는 둘째 권을 덮지 못하고 손을 얹은 채 앉아 있었다. 옛집 장롱 밑에 아직 한 권이 남아 있었다. 그 안에는 또 몇 번의 오후가, 몇 번의 왔다 갔다,가 지워진 채 눌러쓰여 있을 것이다. 못 읽는 줄이 아니라, 애초에 지워버린 오후들. 그게 몇 개인지 세는 일이 이제 무섭지 않은 대신, 그 권을 가지러 다시 옛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만 남았다.
창밖으로 새벽의 곱창 냄새가 얇게 올라왔다. 어느 집이 벌써 화덕에 불을 앉힌 모양이었다. 매캐하면서 기름진 그 냄새가 창틀을 넘어 방 안으로 스몄다. 나는 창을 닫지 않았다. 스무 해 동안 그 냄새가 코에 닿을 때마다 나는 반사적으로 미안했는데, 이번에는 미안하지 않았다. 냄새가 옷에 밴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어딘가에서 지금 막 갈리고 있을 새 연탄을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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