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안지랑, 2005
7화. 버티는 이유라는 네모 칸
여름 대목은 손끝에 먼저 왔다.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종이 뒤로 볼펜이 눌러 파고든 자리가 지문에 걸렸다. 나는 벽등을 조금 당겨 노트를 그 아래 밀어 넣었다. 문장이 있어야 할 여백마다 숫자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자 십이만. 월세 삼십오. 그 아래로 연탄 두 장에 얼마, 세 장에 얼마, 하는 식으로 잔셈이 붙었다. 어떤 줄은 덧셈이 두 번 어긋나 위에 그은 줄을 다시 지우고 옆에 고쳐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고친 숫자들을 눈으로 따라갔다. 엄마가 화덕 앞에 쭈그려 앉아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폈다 하며 이 셈을 맞췄을 밤이 페이지 안에 접혀 있었다. 문장은 짧고 숫자는 길었다. 하루의 대부분이 돈을 세는 일이었다는 얘기였다.
칠월로 넘어간 장에서 손이 멈췄다. 다른 줄과 달리 힘을 준 글씨였다.
수학여행비 팔만원.
그 옆으로, 마치 뒤늦게 떠올린 것처럼 잇달아 붙은 글씨가 있었다. 곗돈 미룸. 그 아래 조금 떨어져, 미자한테 오만원 빌림.
경주였다. 나는 그 여행을 기억했다. 첨성대 앞에서 반별로 사진을 찍었고, 나는 회비를 반에서 제일 늦게 낸 아이였다. 담임이 종례 때 아직 안 낸 사람, 하고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책상만 봤다. 집에 와서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저녁상 앞에서 회비 냈나, 하고 물었을 때도 응, 하고만 대답했다. 나는 그 늦음이 창피했다. 우리 집에 돈이 없어서 늦었다는 걸 엄마 입으로 확인받는 게 싫어서, 묻지도 않은 말에 먼저 등을 돌렸다.
그 팔만원이 어디서 왔는지 이제야 알았다. 엄마가 붓던 곗돈을 한 달 미루고, 미자 이모한테 오만원을 손 벌려 겨우 맞춘 숫자였다. 나는 그 여행 내내 회비 얘기가 다시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지, 그 돈이 엄마 통장에서 어떻게 긁어모아진 건지는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신발을 벗으며 삼킨 그 말, 응, 이 지금 목에 걸렸다.
다음 장은 글씨가 흔들려 있었다. 줄이 아래로 처지고, 획 끝이 떨렸다.
오늘 그 사람 빚쟁이가 가게로 왔다. 손님 다 앉은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을 받으러 온 남자가 대낮의 순이네 홀 한가운데 서서 상을 쳤다는 것이, 곱창 익는 연기 속에서 손님들이 젓가락을 놓고 눈치를 봤다는 것이 몇 줄 안 되는 글에 다 들어 있었다. 그 아래 이어진 문장은 더 짧았다.
나는 그냥 불판을 갈았다. 손이 떨려서 집게를 두 번 떨어뜨렸다.
엄마는 그 남자 앞에서도 화덕을 떠나지 못했다. 소리 지르는 사람이 홀 한가운데 서 있어도, 불이 꺼지면 그날 장사가 죽으니까. 나는 떨어진 집게를 두 번 다시 줍는 손을 그려봤다. 벌겋게 달아오른 불 앞에서, 등 뒤로는 남자의 고함을 들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새 불판을 얹는 손을. 이어지는 줄에 미자 이모가 나왔다.
미자가 와서 그 사람을 밀어냈다. 됐다 마 하고 내 등을 두드렸다.
그 장면 위에 이모의 목소리가 저절로 얹혔다. 야이 문디야, 남으 장사하는 데서 뭐 하노. 팔을 걷어붙이고 남자의 등을 문 쪽으로 떠밀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엄마 등을 두어 번, 됐다 마, 됐다, 하고 두드렸을 것이다. 그날의 일기는 이렇게 닫혀 있었다.
그래도 오늘 곱창 다 팔았다. 불 안 꺼뜨렸다.
가장 오래 눈이 멎은 건 그 아래였다. 지금까지의 숫자는 전부 나가는 돈이었다. 그런데 페이지 맨 아래,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반듯한 네모 칸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그 칸 위에 볼펜으로 두 번 겹쳐 눌러쓴 글씨가 붙어 있었다. 버티는 이유.
나는 칸 안을 들여다봤다. 거기엔 숫자가 없었다. 이자도, 월세도, 연탄값도 아니었다.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안.
그 밑으로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이 목표처럼 줄지어 있었다. 중학교 졸업까지. 고등학교. 그리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대학. 그해 여름의 엄마가 아직 손에 쥐지도 못한 시간들을, 마치 이미 갚아야 할 빚처럼 미리 적어둔 것이었다.
나는 스무 해 넘게 나를 이 노트 어딘가의 지출 항목이라고 여겨왔다. 팔만원짜리 수학여행비, 교복값, 참고서값. 엄마 인생을 한 줄씩 갉아먹은 비용의 목록에 내 이름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명절에 돈만 부치고 전화를 미룬 것도, 얼굴을 보면 그 목록이 눈앞에 펼쳐질 것 같아서였다. 갚아야 하는데 갚을 방법을 몰라서 나는 자꾸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나는 나가는 칸이 아니라 남는 칸에 있었다. 버티는 이유, 라고 두 번 눌러 그은 네모 안에.
나는 노트를 덮지 못했다. 손가락을 그 네모 위에 얹었다. 종이 뒤까지 배어 나온 볼펜 자국이 지문에 걸렸다. 두 번 겹쳐 쓴 그 힘이, 이십 년 뒤의 벽등 아래에서 손끝을 눌렀다. 짐이었다고 믿어온 자리가 처음으로 어긋났다. 딱 손톱만큼, 아주 가느다랗게. 그 틈으로 뭔가가 새어 들어왔다. 나는 오래 그 칸을 만졌다.
이 노트는 첫 권이었다. 나머지는 옛집 장롱 속에 그대로 두고, 나는 이 한 권만 가방에 넣어 모텔로 들어왔다. 그때는 한 권이면 충분하다고, 아니 한 권도 다 읽어내지 못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2005년 여름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옛집에 두고 온 나머지 권들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거기 어딘가에 이 여름의 네모 칸 같은 것이 몇 개나 더 접혀 있을지, 엄마가 나 몰래 지워둔 장면이 얼마나 더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권들을 언제 다시 가지러 갈지 정하지 못한 채, 첫 권의 이 페이지만 다시 폈다 덮기를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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