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안지랑, 2005
4화. 번진 글씨 뒤의 눈 감기
모텔 방 열쇠에는 302라는 숫자가 매직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프런트의 사내는 하룻밤이냐 물었고, 나는 사흘치를 미리 냈다. 병원에서 걸어 십 분. 간판의 붉은 네온이 반쯤 죽어 ‘모’자만 깜빡였다.
방은 히터를 최고로 올려도 발끝이 시렸다. 형광등 한 짝이 나가서 켤 때마다 잠깐 파르르 떨다 붙었다. 벽지의 물때가 그 빛 아래 누렇게 떠 보였다. 나는 코트를 벗지도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가방을 열었다. 다음 주 교정지 뭉치 옆에 대학노트가 눌려 있었다. 손을 넣어 노트만 꺼냈다. 표지가 가방 안에서 조금 접혔다. 나는 접힌 모서리를 손톱으로 몇 번 눌러 폈다. 그러는 동안에도 표지를 넘기지는 못했다.
한참 만에 첫 장을 폈다. 잉크가 번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그 사람이 갔다. 지안이는 자는 척했다.
나는 그 문장을 읽었다. 다시 읽었다. 세 번째로 읽었을 때 손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잠든 척했는지, 그 뒤로 오래 스스로 대견해했다. 열두 살짜리가 어른들을 감쪽같이 속였다고 믿었다. 그런데 종이 위의 글씨는 그 믿음을 조용히 지워 나갔다. 나는 ‘자는 척’이라는 세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히터 바람이 종아리에 닿는데도 그랬다. 목구멍 안쪽이 마른 종이처럼 서걱거렸고, 나는 침을 삼켰다. 이십 년 가까이 나 혼자 지켜 온 비밀이 실은 비밀이 아니었다는 걸, 엄마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걸, 나는 그 번진 글씨를 통해 뒤늦게 넘겨받았다.
그 밤의 방은 좁았다. 벽 한 면에 장롱이 붙어 있고, 그 앞에 우리 둘의 요를 붙여 깔면 발 뻗을 자리가 겨우 났다. 연탄 냄새가 유난히 매캐했다. 아궁이 쪽 문틈으로 그게 새어 들어와 목구멍에 걸렸다. 이불은 오래 빨지 않은 솜이불이어서 꾹 누르면 눅눅한 무게가 얼굴 쪽으로 올라왔다. 나는 그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리고 벽을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벽지에 손톱으로 파 놓은 자국이 코앞에 있었다. 언제 그었는지도 모를 자국을, 나는 눈을 감기 전까지 들여다보았다.
현관에서 아버지가 신발을 꿰는 소리가 났다. 마른 발이 딱딱한 구두 안쪽을 비집는 소리. 비닐인지 지퍼백인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짐을 챙기는 소리였다. 그 사이사이 엄마가 부엌 쪽에서 물을 틀었다 잠그는 소리도 났다. 아버지가 나가는 마당에 엄마는 설거지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지안이 깨우지 마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숨을 골랐다. 자는 사람은 이렇게 숨을 쉰다. 배로 천천히, 어깨는 미동 없이. 나는 그 흉내에 온 신경을 모았다. 등이 뻣뻣하게 굳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힘을 뺐다. 뺄수록 더 굳었다. 콧등이 가려웠지만 긁지 않았다. 눈꺼풀 안쪽이 뜨거워지는데도 눈에 힘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눈을 꽉 감으면 자는 게 아니라 참는 것처럼 보일까 봐, 나는 눈두덩의 힘까지 신경 썼다.
문이 닫혔다. 여닫이가 아니라 미닫이여서, 레일 위로 드르륵 밀리고 탁 하고 걸리는 소리였다. 골목의 개가 한 번 짖었다. 그러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한 번쯤 흔들어 깨워 주기를 바랐다. 어깨에 손을 얹고 이름을 불러 주기를. 동시에 그게 두려웠다. 깨어 있는 걸 들키면 무슨 얼굴을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나는 몰랐다. 잘 가라고 해야 하나. 가지 말라고 해야 하나. 둘 다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어서, 나는 끝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개가 짖은 뒤로 엄마가 언제 자리에 누웠는지, 눕기는 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노트를 무릎에 올려둔 채 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벽을 향한 열두 살의 등을, 엄마는 뒤에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힘을 줄수록 더 굳던 그 등을. 나는 아이가 자는 줄 알고 어른들이 속아 넘어갔다고 믿었는데, 속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줄 아래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는 척하는 거 안다. 그래도 모른 척해줬다. 얼라가 무슨 죄고.
나는 노트를 덮었다. 손바닥으로 표지를 눌렀다. 그러고는 다시 폈다. 같은 자리를 폈다. 얼라가 무슨 죄고. 맞춤법이 하나 틀린 그 문장을 손끝으로 짚었다. 검지 끝을 글자 위에 얹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밀었다. 잉크가 손끝에 묻어나올 리 없는데도, 나는 짚은 자리를 바지에 문질렀다. 종이가 얇아서 뒷장의 글씨가 비쳐 보였다. 뒷장에는 숫자 같은 것이 몇 개 적혀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이 줄로 돌아왔다.
그날 밤 우리 둘은 한 방에서 각자 자는 척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엄마는 내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아버지가 나가는 걸 못 본 아이로 남고 싶었고, 엄마는 아이가 그걸 못 본 줄 알게 두고 싶었다. 둘 다 상대를 아끼느라 눈을 감았다. 나는 무릎 위의 노트를 한 번 고쳐 잡았다.
형광등이 한 번 깜빡이더니 방이 잠깐 어두워졌다. 남은 한 짝도 잠시 흔들리다 다시 붙었다. 나는 스탠드 대신 침대 머리맡의 벽등을 켰다. 창밖 어딘가에서 곱창 굽는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들었다. 이 시각까지 화덕을 놓지 않는 집이 골목 어귀에 있는 모양이었다. 기름이 연탄 위로 떨어져 타는, 그 익숙한 냄새.
나는 그제야 궁금해졌다. 그 밤, 그러니까 아버지가 미닫이문을 밀고 나간 그 밤에, 아궁이의 연탄불은 누가 갈았을까. 엄마는 나보다 먼저 잠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새벽 어느 참에 일어나 집게를 들었을 것이다. 다 탄 아래짝을 빼내고 위짝을 내리고 새 탄을 얹었을 것이다. 남편이 나간 밤에도 불은 갈아야 했으니까. 한 번 꺼지면 다시 붙이기 어려우니까.
노트를 무릎에서 내려놓지 못한 채, 나는 첫 장에서 다음 장으로 손가락을 넘겼다. 이월이라고 적힌 페이지가 나왔다. 여백에 벌써 숫자 몇 개가 적혀 있었다. 읽기가 무서웠다. 그런데도 벽등을 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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