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마지막 페이지
15화. 노란 금과 연탄재 온기
병실 유리로 든 아침 볕이 이불 위에 노란 금을 그었다. 나는 그 금이 엄마의 발끝께에서 무릎께로 조금씩 기어오르는 것을 보다가, 협탁 위에 편지를 폈다. 밤새 손바닥으로 밀어둔 접힌 자국이 아직 종이 가운데를 가로질러 남아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선을 한 번 더 눌렀다. 종이가 협탁의 인조대리석에 밀착되며 미세하게 소리를 냈다.
엄마는 눈을 떠 있었다. 링거 줄이 걸린 손등을 이불 위에 얹은 채, 물끄러미 그 종이를 보다가 눈길을 창 쪽으로 돌렸다.
“갖다 놓으라 캤제.”
목소리는 어제 그 소리가 아니었다. 화가 다 빠져나간 자리에, 밤을 새운 사람의 지친 숨만 남아 있었다. 나는 편지를 집어 가방에 넣지 않았다. 대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어제까지의 나라면 여기서 손이 먼저 가방을 여몄을 것이다.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무슨 말을 준비해 왔는지 나는 여전히 한 줄도 정하지 못한 채였다. 준비한 말은 없었고, 대신 열두 살 겨울 이후로 한 번도 나오지 않던 것이 목을 밀고 올라왔다. 소리는 없었다. 어깨가 먼저 흔들렸고, 뒤늦게 뜨거운 것이 눈두덩을 넘었다. 나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종이 위에 그것이 떨어져 잉크를 번지게 할까 봐서였다. 엄마의 글씨가 또 물에 뭉개지는 건 견딜 수 없었다.
“울지 마라, 다 큰 기…”
엄마가 나지막이 그렇게 말하다가 끝을 삼켰다. 병실은 조용했다. 커튼 너머 옆 침대 쪽에서 배식 수레가 덜컹거리며 지나갔고, 스테인리스 뚜껑이 부딪는 소리가 몇 번 났다. 나는 그 소리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얼굴을 든 채 눈만 감고 있었다. 볕이 어느새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다.
한참 만에 엄마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어제처럼 벽 쪽으로 돌아눕지 않았다.
“무서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엄마는 여전히 창을 보고 있었다.
“니 애비 나가고, 아침에 눈 뜨는 기 제일 무서벘어. 눈만 뜨모 오늘 하루를 또 우예 사노, 그 생각뿐이라. 도망가고 싶었다. 니 두고 어데로 가뿌고 싶었어.”
엄마 입에서 그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십 년 동안 엄마의 그 시절은 ‘데였다 마’, ‘다 지난 일이다’ 같은 짧은 말들로만 닫혀 있었다. 나는 갚을 말을 찾으려다 실패했다. 아무 문장도 그 자리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손을 뻗어, 이불 위에 놓인 엄마 오른손등의 흉터에 손가락을 얹었다. 밀랍처럼 두툼하게 솟은 자국 위로 아침 볕이 얇게 깔려 있었다.
“그래도 새벽마다 일어난 기.”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니 숨소리 때문이라. 방구석에서 니 자는 숨소리가 들리모, 이불 밑에서 니 발이 꼼지락거리는 소리가 나모, 연탄 갈러 안 일어날 수가 없드라. 불 꺼지모 니가 추울까 봐. 그거 하나 때문에 일어난 기라.”
그제야 편지 속 문장이 몸으로 들어왔다. 니 때문에 산 게 아이라, 니 덕에 살았다. 머리로 읽을 때 그 말은 엄마가 나를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위로처럼 들렸다.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엄마 인생을 갉아먹은 비용이 아니었다. 꺼지려는 불 앞에서 엄마를 밤마다 일으켜 세운 것, 방 저쪽에서 들리던 그 숨소리가 나였다. 갚아야 할 빚이라고 이십 년을 짊어져 온 것의 정체가, 사실은 갚을 것이 없는 쪽에 있었다.
“엄마.”
목이 잠겨 소리가 갈라졌다.
“나 그거 다 갚을라꼬 살았어. 전화도 그래서 못 하고, 명절에도 그래서 못 내려오고. 미안해서. 근데 그거 빚 아이라며. 여기 그래 써놨드라.”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불 밖으로 손을 조금 내밀었다. 링거가 걸리지 않은 왼손이었다. 마디가 굵고, 손톱 밑에 지워지지 않는 회색이 아직 배어 있는 손. 나는 두 손으로 그 손을 감쌌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그 온기 속에서 오래된 연탄재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착각이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십 년을 명치 아래 눌러두었던 무언가가 그 온기 안에서 천천히 물러지고 있었다. 굳었던 것이 처음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나는 편지를 다시 접지 않았다. 협탁 위에 편 채로 두고, 손바닥으로 접힌 자국을 한 번 더 눌러 폈다.
“엄마, 이거 도로 안 갖다 놨어.”
엄마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내가 가질 끼야. 장롱 밑에 안 넣을 끼라고. 계속 가지고 있을 끼야.”
엄마는 눈을 감았다. 어제처럼 등을 돌리지도, 이불을 끌어올리지도 않았다. 감은 눈꺼풀 밖으로 물기가 얇게 번져 속눈썹 끝에 맺혔다. 엄마는 그것을 닦지 않았고, 나도 닦아주지 않았다. 잡은 손에 힘이 조금 들어왔다가, 다시 편안하게 풀렸다.
볕이 이불 위 노란 금을 지나 엄마의 가슴께까지 올라와 있었다. 창밖 어디선가 배식 수레가 다시 덜컹거렸다. 나는 아직 엄마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지 않겠다는 말. 며칠째 속으로만 정해놓고 입 밖에 내지 못한 그 말을, 나는 감은 엄마의 얼굴을 보며 언제 꺼내야 할지 가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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