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은 밤새 갈아야 한다14화 / 전 18화0

4부 마지막 페이지

14화. 사랑까지 네 번 접어 누른 마음

서지안


“이제 안 쓴다.”

나는 그 다섯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셋째 권 마지막 장은 반쯤 비어 있었고, 날짜도 없이 그 말만 볼펜 자국으로 눌려 있었다. 아래 여백은 하얗게 남아 있었다. 쓸 말이 없어 접은 게 아니라, 더 쓰면 안 될 것 같아 손을 뗀 사람의 자리처럼 보였다.

노트를 덮으려는데 뒤표지 안쪽이 손끝에 걸렸다. 표지 종이가 한 겹 들뜬 자리에 무언가 끼워져 있었다. 두툼했다. 벽등을 조금 당겨 각도를 맞추고 손톱을 밀어 넣자 네 번 접힌 종이 한 장이 딸려 나왔다. 오래 눌려 있던 접힌 자국이 손바닥에 버텼고, 펴는 동안 종이는 마른 잎을 밟는 소리를 냈다.

아버지 앞으로 쓴 편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원망이든 애원이든, 떠난 사람에게 쓰다 만 글일 거라고. 나는 반쯤 겁을 먹은 채 마지막 접힌 자리를 폈다.

맨 윗줄의 수신인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지안이 보아라.

나는 그 이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 이름이었다. 스무 해 동안 지출 항목과 못 읽는 줄과 번진 잉크 사이에서 조각조각 만나던 그 이름이, 여기서는 편지의 첫머리에 통째로 앉아 있었다. 글씨부터가 달랐다. 급하게 눌러쓴 일기 글씨가 아니라, 획을 하나하나 세워 또박또박 쓴 글씨였다. 언젠가 남이 읽을 걸 알고, 그 남이 제 딸일 걸 알고 앉은 사람의 손이었다.

니가 이거 읽을 때쯤이면 나는 없을란가 모르겠다.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

그 아래로 맞춤법이 흔들리는 문장들이 이어졌다. 받침이 하나씩 어긋나고, 띄어쓰기가 제멋대로였다. 나는 그 서툰 획을 눈으로 더듬어 내려갔다.

니 때문에 산 게 아이라, 니 덕에 살았다. 그러니 니는 빚진 거 하나도 없다.

목이 막혔다. 소리 내어 다시 읽어보려는데 첫 글자에서 숨이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스무 해를 정반대로 알고 살았다. 엄마의 인생을 내가 갉아먹었다고. 그 손등의 흉터가 내 몫으로 남은 빚이라고. 곗돈을 미룬 팔만 원도, 된장을 바른 손도, 서문시장의 두 시간짜리 잠도, 전부 내가 갚아야 할 원금 위에 붙은 이자라고. 그런데 편지는 그 셈을 통째로 뒤집어 놓았다. 엄마는 나를 비용으로 적은 적이 없었다. 편지의 어느 줄에도 갚으라는 말이 없었다.

편지 아래쪽에 이런 줄이 있었다.

니한테 이거 주면 니가 또 미안해할까 봐, 그기 무서버서 몬 준다.

낮의 병실이 눈앞에 다시 섰다. 창가 침대, 링거 줄에 매달린 물방울, 소독약 냄새 밑에 얇게 깔린 병원 밥 냄새. 오후 볕이 침대 발치까지 밀려와 있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옛집 장롱 밑에서 노트를 찾았다고. 세 권 다 읽었다고.

엄마는 숟가락을 든 채였다. 식판 위 미역국은 반도 줄지 않았다. 내 말이 끝나자 숟가락이 국그릇 가장자리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한동안 천장만 봤다. 눈 깜빡이는 것도 잊은 사람 같았다. 그러다 성한 왼손으로 이불깃을 목까지 끌어 올리더니, 링거 꽂힌 오른팔이 당기는 것도 아랑곳 않고 몸을 벽 쪽으로 홱 돌렸다.

“그거를 와 봤노.”

목소리가 갈라졌다.

“당장 도로 갖다 놔라. 그 자리에 고대로.”

나는 침대 난간에 얹은 손을 떼지 못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엄마, 나는 그냥……”

“됐다. 됐다 마.”

말끝이 이불 속으로 잦아들었다. 엄마의 등이 좁았다. 환자복 사이로 드러난 어깨뼈가 이불 밑에서 얕게 오르내렸다. 링거대에서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 소리만 세고 있었다.

이불을 쥔 손등의 흉터가, 반질반질 당겨진 그 자리가 창밖 빛을 받아 도드라졌다. 나는 그것을 만지지도, 다시 부르지도 못하고 병실을 나왔다. 복도 자판기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던 것 같다. 무엇을 잘못 건드렸는지 알 수 없어서, 손끝만 계속 문지르며.

그때 나는 엄마가 제 흉터를 들킨 게 부끄러워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딸한테 낱낱이 읽힌 게 창피해서 등을 보이는 거라고. 손등에 밴 자국처럼, 감추고 싶은 세월을 들켜서 그러는 거라고.

아니었다. 엄마는 이 편지를 보여주려고 남긴 게 아니었다. 끝까지 감추려고 표지 안쪽에 밀어 넣은 거였다. 미안함을 내 손에 쥐여주지 않으려고, 자기 사랑까지 네 번 접어 종이 뒤에 눌러둔 사람. 딸이 아플까 봐, 제가 딸을 아프게 할까 봐, 사랑한다는 말조차 무기가 될까 봐 숨긴 사람.

우리는 같은 짓을 했다. 나는 냄새를 숨겼고 엄마는 편지를 숨겼다. 서로를 지키겠다고 각자의 부끄러움을 정반대편에 묻어두고, 이십 년을 모르는 척 지나온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묻은 것은 열두 살의 도시락이었고 엄마가 묻은 것은 제 목숨을 붙들어준 이유였다는 것뿐이다.

창밖에서 새벽 골목의 냄새가 얇게 흘러들었다. 어느 집 화덕이 벌써 밑불을 살리는지, 기름과 연기가 섞인 냄새가 창틀 아래로 스몄다. 나는 편지를 다시 접지 않았다. 접힌 자국을 손바닥으로 밀어 폈다. 종이는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나는 그 골을 따라 몇 번이고 눌렀다. 이건 갖다 놓을 게 아니었다. 갚을 빚이 아니라 데리고 살 말이라면, 나는 이제 갚는 사람이 아니라 적어두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휴대폰을 들었다. 엄마 이름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지금 걸면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또 먼저 끊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화면의 불빛만은 죽이지 않고 켜둔 채, 협탁 위에 그대로 엎어두지 않고 위를 보게 놓았다. 액정에 엄마 이름이 밝게 떠 있었다.

니는 빚진 거 하나도 없다.

이번에는 목이 막히는 대신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따뜻한 게 차올랐다. 나는 편지를 무릎에 펼쳐놓은 채 오래 앉아 있었다. 내일 아침 병실에 이걸 들고 가면 엄마는 또 벽 쪽으로 돌아누울지 몰랐다. 도로 갖다 놓으라고, 니 보라고 쓴 거 아이라고 소리칠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번에는 가방을 다시 닫지 않을 생각이었다. 화면의 불빛이 꺼지지 않고 방 한쪽을 밝혔다. 나는 그 불이 꺼지기 전에 무슨 말을 준비해 가야 할지, 아직 한 줄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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