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우산 하나의 폭
9화. 붉은 종이등과 유효기간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어디선가 야키소바 굽는 냄새가 계단을 타고 흘러내려왔다. 소스가 철판에 눌어붙는 냄새, 그 사이로 아이들이 지르는 소리와 나무 딱따기 두드리는 소리. 저녁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고, 계단 양옆으로 붉은 종이등이 한 알씩 불을 받아 켜지는 중이었다. 아래쪽은 아직 꺼져 있고 위로 갈수록 밝았다. 우리는 그 불이 켜지는 순서를 거슬러 올라갔다.
하루는 유카타를 입지 않았다. 낮에 골목을 걷던 그대로, 물 빠진 회색 셔츠에 캔버스 가방을 어깨에 걸친 차림이었다. 나는 그게 고마웠다. 유카타를 입은 여자들 사이에서 나 혼자 어제 입던 티셔츠 그대로였다면, 나는 또 어딘가 잘못 끼워진 사람처럼 느꼈을 것이다. 사람이 웃고 떠드는 자리에 서면 나는 늘 채점이 끝난 시험지가 된 기분이었다. 붉은 도장이 어디에 찍혔는지 모두가 아는데 나만 뒤집어 보지 못한 시험지.
“정우 씨, 이거.”
노점 앞에서 하루가 유리병 두 개를 사서 하나를 내밀었다. 병목 안쪽에 유리구슬이 걸려 있었다.
“밀어요. 세게.”
내가 엄지로 구슬을 눌렀다. 처음엔 꿈쩍도 안 하다가 톡, 하고 안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탄산이 병 입구로 솟구쳐 손등으로 튀었다. 차갑고 끈적한 것이 손목까지 타고 내렸다. 하루가 웃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어깨만 잠깐 흔들리는 웃음이었다. 나는 손등을 닦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 웃음이 끝나기 전에 무언가로 붙잡아두고 싶었는데, 손에 든 게 미지근해지는 라무네 병뿐이었다.
라무네는 달고 미지근하고 어딘가 약 냄새가 났다. 그런데도 나는 그걸 천천히 마셨다. 빨리 마시면 이 노점 앞을 떠나야 할 것 같아서.
금붕어 건지기 수조 앞에 쪼그려 앉았을 때, 하루가 먼저 종이 뜰채를 물에 담갔다. 붉은 금붕어들이 뜰채를 피해 흩어졌다. 한 번, 종이가 젖어 흐물거렸다. 두 번, 가장자리가 벌어졌다. 세 번째에 뜰채는 가운데가 뚫려버렸고, 하루가 손끝에 걸린 종이 조각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또 실패.”
그녀가 그 단어를 고르는 게 우스웠다. 한국 드라마에서 주워 담았을 그 말을, 금붕어 앞에 쪼그려 앉아 이렇게 쓸 줄이야.
“실패는 제 전문인데요.”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종이등 아래에서까지 그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는데. 하지만 하루는 개의치 않고 팔꿈치로 내 팔을 툭 쳤다.
“그럼 정우 씨가 해요. 전문가.”
새 뜰채를 받아 들었다. 아저씨가 하는 걸 낮에 어깨너머로 봐둔 게 있었다. 종이를 물에 세우면 찢어지고, 눕히면 버틴다. 나는 무릎이 젖는 것도 모르고 수조 앞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등 뒤로 딱따기 소리와 아이들 웃음이 지나갔지만, 손끝의 얇은 종이 한 장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붉은 무리 뒤쪽에 꼬리만 검은 작은 놈 하나가 처져 있었다. 다른 놈들이 뜰채를 보고 튀어 달아날 때, 그놈만 물 아래쪽에서 느리게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나는 뜰채를 수면과 나란히 눕혀 물살 아래로 조심히 밀어 넣었다. 종이가 물에 닿는 순간부터 젖어드는 게 손가락으로 전해졌다. 서두르면 안 된다. 세우면 안 된다. 나는 숨을 멈추고, 물살을 거스르지 않고 그 아래로 뜰채를 흘려보내듯 밀었다.
“천천히… 천천히요.”
옆에서 하루가 낮게 말했다. 재촉이 아니라, 자기도 같이 숨을 참는 목소리였다. 검은 꼬리가 뜰채 위로 올라앉는 게 보였다. 나는 손목을 세우지 않고, 팔 전체를 들어 올리듯 그대로 수면 밖으로 뜰채를 끌어냈다. 종이는 찢어지지 않았다. 검은 꼬리가 젖은 종이 위에서 한 번 파닥, 튀어올랐다.
“오…”
하루가 짧게 소리를 냈다. 내가 뭘 이뤄서가 아니라, 그 작은 것이 종이 위에서 살아 파닥이는 게 신기해서 내는 소리였다. 나는 왜인지 그 소리에 목이 뻐근했다.
비닐봉지에 물을 받아 금붕어를 담았다. 봉지째 하루에게 내밀자 그녀가 두 손을 모아 받았다. 그때 어깨가 닿았다. 우산도 없는데, 우리 사이의 폭은 낮에 그 얇은 비닐우산 아래에서보다 좁았다. 봉지 안에서 검은 꼬리가 천천히 흔들렸다. 하루의 손이 봉지를 받쳐 든 채로 잠깐 그대로 멈춰 있었다. 봉지 표면에 맺힌 물기가 두 사람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웠다. 나는 손을 떼야 하는 때를 놓치고, 검은 꼬리가 봉지 벽을 따라 도는 걸 하루와 함께 들여다봤다.
하루가 봉지를 받으려고 몸을 기울일 때, 어깨에서 캔버스 가방이 앞으로 흘렀다. 벌어진 틈으로 빳빳한 종이 모서리가 보였다. 낮에 언뜻 스쳤던 그 각진 것이 스케치북 귀퉁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인쇄된 활자가 있었다. 金沢, 라는 세 글자와 그 옆에 찍힌 날짜.
나는 시선을 봉지 속 금붕어로 돌렸다. 검은 꼬리가 봉지 벽에 부딪혔다가 다시 물 가운데로 물러섰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우산은 빌린 것이었다는 걸. 킷사텐 이름이 비를 긋는다는 뜻이라는 것도, 그녀가 언젠가 가나자와로 돌아간다는 것도, 나는 어렴풋이 알면서 모르는 척해왔다. 그런데 활자로 박힌 날짜를 보니 그 어렴풋함이 딱딱해졌다. 이 여름에도 유효기간이 찍혀 있었다. 종이 위에.
나는 눈을 감듯 마음을 감았다. 못 본 것으로 하는 데에도 힘이 들었다. 봉지를 하루의 손에 완전히 넘기고, 나는 다 마신 라무네 병 안에서 구슬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정우 씨, 다음은 뭐 할까요.”
종이등이 하루의 얼굴 한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 날짜를 보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를 골랐다. 낮에 그녀가 서툰 한국어 단어를 고르던 것처럼, 나도 하나를 골라야 했다.
“라무네요. 하나 더.”
하루가 고개를 끄덕이고 노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봉지 속 금붕어를 다시 봤다. 물은 얼마 되지 않았고, 봉지는 내 손 안에서 조금씩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이 작은 물속에서 검은 꼬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나는 굳이 세어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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