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엔의 우산8화 / 전 18화7

2부 우산 하나의 폭

8화. 닫힌 헌책방의 처마 아래

정우


“이쪽으로.”

하루는 짧게 말하고 앞장섰다. 연못가에서 굵어진 비가 우리를 기치조지 뒷골목까지 몰아넣는 동안, 나는 그녀의 등을 놓치지 않으려고 반걸음 뒤에서 따라 걸었다. 배낭은 이미 어깨가 젖어 무거웠고, 우산은 여전히 그 안에 접힌 채였다. 펴야 한다는 생각과 펴지 말자는 생각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번갈아 발을 걸었다.

하루가 걸음을 멈춘 곳은 셔터가 반쯤 내려간 헌책방 앞이었다. 그녀가 처마 밑으로 몸을 들이밀며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두 사람이 서면 어깨가 닿을 만한 폭이었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섰고, 등 뒤로 빗줄기가 커튼처럼 내려앉았다.

하루의 젖은 소매가 내 팔뚝에 스쳤다가 떨어졌다. 처마가 좁아서, 둘 다 어깨를 안으로 말지 않으면 한쪽이 빗줄기에 닿았다. 나는 배낭을 앞으로 돌려 안았다. 조금이라도 자리를 만들려는 것이었는지, 사이에 무언가를 두고 싶었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처마 안쪽의 빗소리는 밖과 달랐다. 밖에서는 아스팔트를 때리는 소리였는데, 여기서는 그 소리가 한 겹 걸러져 낮게 웅웅거렸다. 서로 다른 비가 있고, 우리는 그 경계에 서 있었다.

유리문 안쪽에 노란 종이가 비뚤게 붙어 있었다. 잉크가 번진 붓글씨를 하루가 한참 들여다보더니 조그맣게 옮겼다.

“여기… 이제, 문 닫았어요.”

셔터 틈으로 곰팡내 밴 종이 냄새가 새어 나왔다. 오래 갇혀 있다가 비를 만나 겨우 풀려나온 냄새였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책이 그대로 잠들어 있는지,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내 운동화 코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한 방울, 잠깐의 사이, 또 한 방울. 나는 그 박자를 세다가 배낭 지퍼를 조금 내렸다. 손끝에 우산 손잡이가 잡혔다. 여전히 접힌 채였다.

펴면 이 좁은 처마 밑에서 견디고 있는 어색함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 어색함이 끝나는 게 싫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손을 도로 빼고 지퍼를 올렸다.

하루는 카메라를 들었다. 손안에서 검은 몸통의 모서리 칠이 벗겨져 있었다. 그녀는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한쪽 눈을 감았다. 숨을 멈추는 게 옆에서도 느껴졌다. 태엽 감기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짧게 끼어들었다. 그녀가 겨눈 것은 셔터 아래쪽에 번진 녹이었다. 붉은 얼룩이 물길을 따라 흘러내린 자국. 그녀는 무릎을 조금 굽혀 그 얼룩과 눈높이를 맞췄다. 셔터가 닫히는 소리가 나고, 그녀는 다시 태엽을 감았다. 그러고는 부서지는 것들만 골라 보는 그 눈으로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정우 씨는… 왜, 도쿄에 왔어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처마 밖으로 손을 내밀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나는 그 비를 핑계 삼아 시간을 벌었다. 대답을 미룰수록 물방울은 더 크게 운동화를 두드렸다. 그 박자를 다시 세는 동안 거짓말이 몇 개 떠올랐다. 그냥 여름휴가라고. 오래전부터 도쿄가 보고 싶었다고. 라멘이 먹고 싶었을 뿐이라고. 다 입술 앞까지 왔다가 도로 삼켜졌다. 하루는 재촉하지 않았다. 처마 끝에 눈을 둔 채, 내가 셔터의 녹을 다 세고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다만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자꾸 등을 밀었다.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먼저 나온 건 그 말이었다. 나는 셔터의 녹을 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발끝에 힘이 들어갔고, 배낭끈을 쥔 손가락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여섯 번째로요. 마지막까지 갔다가.”

말하고 나니 목이 아니라 어깨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다. 며칠째 배낭보다 무겁게 얹혀 있던 것이 처마 밖으로 굴러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무너질 줄 알았다. 낯선 사람 앞에서 그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최소한 목소리가 갈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리 내어 말한 실패는 스마트폰 속에 접어둔 불합격 메일보다 오히려 가벼웠다. 화면 안에서 지워지지 않고 나를 노려보던 그 글자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냥 빗소리에 섞여 흘러가버렸다.

하루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비어 있지 않았다. 빗소리를 다 듣고 나서야 입을 열 사람처럼, 그녀는 처마 끝을 바라보며 오래 뜸을 들였다. 카메라를 쥔 손이 가방 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조약돌을 물에 하나씩 던지듯 천천히 말했다.

“다시 시작하는 건…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발음이 서툴러 ‘부끄러운’이라는 말이 세 토막으로 끊겼다. 그래서 더 또렷하게 박혔다. 한국 드라마에서 주워 담았을 그 문장을 그녀가 어느 밤에 혼자 몇 번이나 굴려봤을지, 나는 잠깐 궁금했다. 골든가이 어느 골목의 불 꺼진 창가에서, 아니면 킷사텐 카운터 뒤에서, 손님이 다 빠진 시간에.

하루는 자기 어깨에 멘 캔버스 가방을 손등으로 툭툭 두드렸다. 안쪽에서 뻣뻣한 종이가 부딪히는 둔한 소리가 났다. 한 번 젖었다 마른 스케치북. 그녀는 눈으로 그 가방 안을 가리켰다. 굳이 열어 보이지 않고, 거기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그쪽도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하루는 대답 대신 처마 밖으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을 위로 펴자 빗물이 그 위에 고이기 시작했다. 손금을 따라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가, 이내 가장자리를 넘어 손목으로 흘러내렸다. 고이고, 넘치고, 다시 고였다. 그녀는 그 손을 한동안 그대로 두었다. 넘치는 것을 막지 않았다.

나는 그 손바닥을 봤다. 아무리 받아도 넘쳐버리는 물을, 그런데도 계속 받고 있는 손을. 여섯 번의 낙방이 내 손금에 새겨진 판결 같은 거라고 여기고 여기까지 도망쳐 왔는데, 그 순간 그게 조금 헐거워졌다. 어쩌면 여섯이라는 숫자가 나의 전부는 아닐지도 몰랐다. 도쿄에 온 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루가 손을 거두며 나를 보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끝으로 그녀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대답 없음이 어떤 대답보다 길다는 것을 알았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고, 나는 아직도 배낭 속 우산을 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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