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엔의 우산7화 / 전 18화5

2부 우산 하나의 폭

7화. 오리배와 젖은 스케치북

정우


이노카시라선은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햇빛도 없는 하늘 아래를 달렸다. 하루는 창밖만 보았다. 나는 그녀의 무릎에 놓인 캔버스 천 가방을 곁눈질했다. 손잡이가 손때로 거뭇해진, 원래는 무슨 색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가방이었다. 흔들릴 때마다 안에서 무언가 딱딱한 것이 모서리로 천을 밀어냈다.

“기치조지, 좋은 데예요?”

내가 물었다. 하루는 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금 웃었다.

“연못이 있어요. 오리… 배.”

그녀가 두 손가락을 물갈퀴처럼 폈다 오므렸다. 발로 젓는 오리 모양 보트를 흉내 내는 손짓이었다. 나는 그 서툰 손짓이 좋아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웃음을 감췄다. 전철이 다음 역에서 몸을 흔들 때, 그녀의 가방이 무릎에서 반 뼘쯤 미끄러졌고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다. 하루가 먼저 가방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아이의 어깨를 붙드는 손 같았다.

공원의 연못가 벤치는 물을 먹었다 마른 나무라 앉으면 서늘했다. 오리배 몇 척이 흐린 물 위에서 느리게 원을 그렸다. 사람은 없고 배만 남아 저희끼리 도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튀김을 굽는 기름 냄새가 젖은 흙냄새에 섞여 흘러왔고, 나는 그 두 냄새가 어울리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배가 고파졌다.

하루가 카메라를 꺼내려고 가방을 뒤적였다. 손이 안쪽을 더듬는 동안 입구가 벌어졌고, 그 틈으로 스케치북 하나가 반쯤 밀려 나왔다. 표지 모서리가 물결처럼 우글거려 있었다. 한 번 흠뻑 젖었다가 마른 종이가 그렇게 부푼다는 걸 나는 알았다. 서울 원룸 책장에 오래 꽂혀 있던 문제집들이 장마철이면 꼭 그 꼴이 되곤 했으니까.

“그림, 그리세요?”

말이 먼저 나갔다. 하루의 손이 가방 안에서 멈췄다. 그녀는 카메라를 꺼내는 대신 스케치북을 손바닥으로 꾹 눌러 도로 밀어 넣었다. 종이가 천에 쓸리는 소리가 났다.

“옛날에요.”

그녀가 물 쪽을 보며 말했다.

“미대… 그만뒀어요.”

그만뒀어요. 그 단어를 하루는 다른 단어들보다 느리게, 발음 하나하나를 확인하듯 내려놓았다. 어제 무너진 담벼락 앞에서, 담에서 떨어진 고양이를 보고 나와 함께 웃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편평한 소리였다. 나는 더 묻고 싶었다. 왜요, 언제요, 지금은요. 질문들이 목 안에서 서로 밀쳤다. 그러나 누가 내 상처를 들여다보려 할 때마다 가시부터 세우던 내 버릇이 떠올랐다. 위로랍시고 건네는 손을 동정으로 읽고 쳐내던 손. 나는 그 손을 하루에게 뻗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는 발밑의 자갈을 보며 말했다.

“저도 뭔가 그만두고 왔어요. 서울에.”

사물을 내려놓듯 툭 던진 말이었다. 무엇을, 이라고 그녀가 물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하루는 묻지 않았다. 물 위에서 도는 오리배를 눈으로 좇으며 짧게 말했다.

“알아요.”

그 두 글자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 나는 오래 생각했다. 내가 캡슐호텔 217호에서 무엇을 지우지 못한 채 들고 다니는지 하루가 알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 ‘알아요’는 채근이 아니었다. 부산에서 걸려 오던 전화 속 엄마의 목소리, 밥은 묵고 댕기나 언제 들어올 낀데, 그 걱정과는 결이 달랐다. 하루의 알아요는 나를 어디로도 데려가려 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 놓였다.

바람이 한 번 불었다. 가방 지퍼가 반쯤 열린 틈으로 스케치북 갈피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이 살짝 들렸다 가라앉았다. 연필로 그리다 만 선 몇 개가 보였다. 무엇을 그리려던 선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옆에 종이 하나가 더 접혀 있었다. 뾰족하게 각을 세운 날개 끝 같은 것. 종이학이었는지, 다른 무엇이었는지, 눈에 스친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루가 재빨리 지퍼를 올렸다. 손이 급했다.

나는 못 본 척 연못으로 눈을 돌렸다. 오리배를 셌다. 하나, 둘, 셋. 셋째 배가 물풀에 걸려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정우 씨.”

하루가 낮게 불렀다. 나는 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만둔 거…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 질문이 나에게 던진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발밑의 젖은 자갈 하나를 신발 코로 굴렸다. 자갈이 다른 자갈에 부딪혀 작게 딸그락거리고 멈췄다.

연못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물 위에 동그란 파문이 생겼다 지워졌다. 오리배 위로도 떨어졌지만 배들은 개의치 않고 계속 돌았다. 나는 배낭 지퍼를 조금 열어 안에 든 비닐우산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확인했다. 접힌 채였다. 아직 펴지 말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루가 이 비를 어떻게 맞는지 보고 싶었다. 우산을 펴는 순간 이 자리에 고인 무언가가 흩어져버릴 것 같았다.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졌다. 하루는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물을 보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질문에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접힌 종이 속 그리다 만 선들이 자꾸 떠올랐다. 무엇을 그리다 멈춘 것인지, 왜 그것을 젖은 스케치북 갈피에 접어 넣고 다니는지. 물어볼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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