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엔의 우산5화 / 전 18화2

2부 우산 하나의 폭

5화. 정오의 회색과 마르지 않은 우산

정우


우산은 밤새 침대 발치에 세워져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캡슐호텔 217호의 좁은 천장이 먼저 보였고, 그다음으로 그 우산이 보였다. 접힌 비닐이 형광등 빛을 받아 물비린내처럼 뿌옇게 반짝였다. 나는 침대에 앉아 한참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플라스틱 이음매에 손톱을 걸었다가 뗐다가,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물건 하나 돌려주러 가는 것뿐이었다. 어제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런 문장을 속으로 몇 번 굴렸다. 그런데도 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데 평소보다 오래 걸렸는지는 굳이 따져 보지 않았다.

배낭은 놔두고 우산만 들고 나왔다. 그것이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행자의 짐 없이, 물건 하나만 손에 쥔 채로 나는 낮의 신주쿠를 걸었다.

신주쿠 뒷골목으로 꺾어 드는 길은 낮에 보니 어젯밤과 딴판이었다. 밤새 불을 밝히던 좁은 가게들은 셔터를 내렸고, 어제 소나기가 만들어 둔 웅덩이는 가장자리부터 말라 얼룩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얼룩을 밟지 않으려고 걸음을 조금 비틀었다. ‘雨宿り(비 피하기)’라고 새긴 나무 간판이 정오의 햇빛 아래 색이 바래 보였다. 밤에는 그 글자가 물에 젖어 검게 번져 있었는데, 지금은 마른 나뭇결이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문을 밀자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어제와 같은 소리였다. 카운터 안쪽에서 백발의 주인이 나를 힐끗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잔을 닦았다. 나를 알아본 기색도, 못 알아본 기색도 없었다. 그 무심함이 오늘은 조금 고마웠다.

나는 접힌 비닐우산을 카운터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우산… 돌려주러 왔는데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우산은 대리석 카운터 위에서 미끄러지듯 조금 굴렀고, 나는 그것을 손끝으로 붙잡아 세웠다.

주방 안쪽에서 하루가 앞치마를 벗으며 나왔다. 어제 교엔에서 본 그 조용한 얼굴이 오늘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놀란 것 같기도, 반가운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카운터 앞에 선 나를, 그리고 그 앞에 세워진 우산을 번갈아 보았다.

“정말… 왔네요.”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그렇게만 말했는데, 나는 왠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안 부른 것이 더 마음에 남았다.

“안 오면 안 되잖아요. 남의 물건인데.”

필요 이상으로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나서, 나는 곧 그 말이 얼마나 옹졸하게 들렸을지 후회했다. 하루는 개의치 않았다. 우산을 집어 들더니 접힌 비닐 위에 아직 남아 있던 물기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어제 밤새 다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카운터로 떨어졌다.

“오늘… 나 쉬는 날이에요. 우연히.”

그녀는 단어를 하나씩 내려놓듯 말했다. 한국어의 어느 대목에서는 잠깐 멈췄고, 그 멈춤이 문장 사이에 작은 물웅덩이처럼 고였다.

“정우 씨, 도쿄… 처음이죠? 길, 잘 몰라요.”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지나온 골목의 마른 얼룩이 창유리 너머로 보였다. 안내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혼자 다니는 게 편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이 나흘 동안 정말 혼자 잘 다녔으니까. 낯선 도시의 소음 속에 나를 숨기려고 여기까지 온 거였으니까.

“안내는 무슨. 저 혼자 잘 다녀요.”

그렇게 말해 놓고도 나는 배낭을 고쳐 메지 않았다. 애초에 배낭은 217호에 두고 왔다. 나는 문 쪽으로 발을 옮기지도 않았다. 손에 든 것도 없이, 나갈 이유도 나갈 채비도 없는 사람처럼 카운터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루는 그런 나를 가만히 보았다. 재촉하지도, 웃지도 않고, 그저 내 대답과 내 발이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는 걸 이미 알아챈 사람처럼. 그러더니 카운터 위의 우산을 다시 내 쪽으로 밀었다.

“이거… 정우 씨 가져요. 또 비 와요, 도쿄.”

우산 손잡이가 애매한 각도로 돌아와 나를 향했다. 어제 교엔 출구에서 내밀던 그 각도 그대로였다. 받으라는 것도, 받지 말라는 것도 아닌, 결정을 내 쪽에 슬쩍 밀어 놓는 손. 나는 그 손잡이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거절하면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건 내가 도쿄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우산을 받아 버렸다.

주인 노인이 그제야 커피 두 잔을 카운터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언제 내렸는지 모를 만큼 조용한 손이었다. 잔에서 김이 얇게 피어올랐다. 노인은 창밖으로 다시 흐려지기 시작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메다네.”

정오의 파랑이 사라진 자리로 회색이 밀려오고 있었다. 어제 이 골목을 적신 비가, 마르기가 무섭게 또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손에 쥔 우산의 얇은 비닐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이 값싼 물건 하나가 이제 완전히 내 것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돌려주러 왔다가 오히려 도쿄에 붙들리는 구실을 하나 더 늘려 버린 셈이었다.

하루가 앞치마를 카운터 뒤 고리에 걸었다. 벗어 두는 손놀림이 익숙했다. 쉬는 날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나는 그 동작에서 알았다.

“커피 마시고… 나가요.”

그녀가 잔 하나를 내 앞으로 밀며 말했다. 나가자는 건지, 나가는 길을 안내하겠다는 건지, 그 짧은 한마디는 여전히 끝이 흐렸다. 나는 그 흐린 끝을 되묻지 않았다. 김이 오르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면서, 오늘 하루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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