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소나기가 시작되는 곳
4화. 반 뼘의 지붕과 갤 청의 이름
지금도 원두 냄새를 맡으면 그 골목의 입구가 먼저 떠오른다. 갈아놓은 커피가 아니라, 오래 눅어 있던 나무에 커피가 배어든 냄새. 몇 해가 지나도 그 냄새만은 순서를 지키지 않고 불쑥 앞으로 나온다.
그날 정문을 나서자 잦아들던 비가 다시 굵어졌다. 하루는 우산을 접지 않은 채, 젖은 아스팔트 건너편 좁은 골목 안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기… 따뜻해요, 조금.”
서툰 한국어 끝에 낮은 일본어가 붙었다. 나는 그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따뜻해요’ 하나는 알아들었다. 젖은 어깨가 무거웠고, 어디든 젖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었으므로, 나는 그 반 뼘의 지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골목은 사람 둘이 우산을 나눠 쓰고 지나기에도 빠듯했다. 실외기가 토해내는 미지근한 바람, 어느 가게 뒷문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냄새, 발밑에 고인 웅덩이가 우리 걸음마다 튀어 종아리를 적셨다. 골목 끝에 낡은 나무 간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물기가 번져 글자가 흐릿했지만, 검은 획이 아직 남아 ‘雨宿り(아마야도리)’ 세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비를 긋는다는 뜻이라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하루가 유리문을 밀자 안쪽의 종이 낮게 울렸다. 원두와 눅눅한 나무 냄새가 한꺼번에 얼굴로 밀려왔다. 좁은 가게였다. 창가에 자리 두엇, 카운터에 낡은 스툴 몇 개. 손님은 없었다. 카운터 안쪽에서 백발의 노인이 나를 한 번 보았다. 젖은 채 들어선 낯선 남자를,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잠깐 눈에 담았다가, 마른 수건 한 장을 카운터 위에 툭 밀어놓았다.
“아메다네.”
비네. 그 짧은 한마디가 전부였다. 나는 그 무관심이 이상하게 편했다. 어디서 왔느냐고, 왜 젖었느냐고, 왜 혼자냐고 아무도 묻지 않는 것.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창가 자리에 몸을 접듯 앉았다. 젖은 티셔츠가 등에 달라붙어 등받이에 닿을 때마다 서늘했다.
하루는 문가에 우산을 세워두고 앞치마를 둘렀다. 카운터 뒤로 들어가더니 노인 옆에서 뭔가를 조심스레 다루는 소리가 났다. 물 끓는 소리, 유리가 부딪는 맑은 소리. 잠시 뒤 그녀가 김이 오르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하나를 내 앞에 놓았다.
“이거… 서비스.”
‘서비스’라는 단어를 그녀는 입 안에서 한 번 굴렸다가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아마 한국 드라마에서 주워들었을 그 말이, 손바닥에서 만지작거리던 조약돌처럼 매끈했다. 나는 그 다정함이 왜인지 부담스러웠다. 공짜로 받아 든 것들이 나중에 어떤 표정으로 되돌아오는지, 나는 그때 여섯 번쯤 배운 참이었다.
“돈은 낼게요.”
말이 필요 이상으로 퉁명스럽게 나왔다. 하루는 개의치 않았다. 맞은편 스툴에 앉아, 제 잔에 두 손바닥을 붙이고, 유리창을 타고 내려오는 빗줄기를 오래 바라보았다. 물줄기가 갈라졌다가 다시 만나고, 아래로 흘러 창틀에 고였다. 그녀는 그것을 무슨 그림이라도 보듯 눈으로 따라갔다.
나는 속으로 잔뜩 대비하고 있었다. 이제 곧 물어오겠지. 왜 아까 비를 그냥 맞고 있었느냐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그런 질문이 들어오면 나는 커피값만 던지고 나갈 셈이었다. 그러나 하루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제 이름을 먼저 내려놓았다.
“나, 하루.”
그러고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를 저었다.
“봄, 아니에요. 하루… 하레루의 하루.”
무슨 설명인지 얼른 와닿지 않았다. 그녀는 손바닥을 위로 펼쳐 하늘을 받치는 시늉을 했다가, 창밖의 비를 가리켰다가, 결국 어긋난 채로 웃어버렸다. 웃으니 왼쪽 볼에 얕은 보조개가 잠깐 팼다. 봄 춘(春)이 아니라 갤 청(晴), 비가 갠 하늘의 하루라는 걸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도시락은 잊어도 우산은 잊지 말라는 가나자와, 그렇게 비가 잦은 데서 나고 자란 아이한테 부모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했다. 나는 그 서툰 설명이 자꾸 헛도는 게 이상하게 나쁘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김정우.”
오랜만이었다. 내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한 것이. 도쿄에 온 지 나흘, 나는 217호였고, 지우지 못한 메일 속 어느 불합격의 이름이었고, 아무도 부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름은 입 안에서 낡은 물건처럼 굴러 나왔다.
“정우… 씨.”
하루가 그 이름을 서툴게 되뇌었다. 받침을 삼키고, 억양을 엉뚱한 데 얹어서,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처럼 들렸다. 그런데도 나는, 그 순간 다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숫자가 아니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된 기분. 별것 아닌 일이었는데, 안쪽 어딘가가 조용히 부풀었다.
하루가 문가로 눈을 돌렸다. 벽에 기대선 비닐우산에서 아직 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오백엔짜리, 살이 얇고 손잡이가 헐거운 그 흔한 우산.
“이거, 오늘… 빌려줘요.”
그녀가 우산을 가리켰다.
“내일, 여기 오면… 돌려주면 돼요.”
나는 돌려줄 것도 없다고, 그냥 사겠다고, 오백엔이면 얼마 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돌려주러 오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아버렸다. 내일 다시 여기 와도 된다는 초대. 그걸 알아챈 게, 그리고 그게 싫지 않은 게, 나 자신에게 조금 놀라웠다. 나는 도망치러 온 사람이었다. 아무 데도 정 붙이지 않고, 아무 약속도 만들지 않고, 12일을 흘려보내다 돌아갈 셈이었다.
“네.”
그렇게만 대답했다.
노인이 카운터 안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 유리에 마른 천이 스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라디오도, 손님의 말소리도 없이 빗소리와 그 소리만이 가게를 채웠다. 나는 식어가는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온기가 손바닥에서 손목으로 천천히 번졌다.
창밖의 비는 여전했다. 골목의 웅덩이가 넓어지고, 처마 끝에서 물이 줄기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 비를 오래 바라보았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이 도시에서 아무 데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내일 이 우산을 들고 다시 이 골목을 찾아올 나를, 나는 미리 조금 궁금해하고 있었다.
문가의 우산에서는 아직도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웅덩이가 마르기 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텐데. 어쩐지 나는 조금 더 앉아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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