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엔의 우산3화 / 전 18화2

1부 소나기가 시작되는 곳

3화. 얇은 비닐우산 아래의 반 뼘

정우


신주쿠 교엔의 잔디는 낮 동안 데워져 풀 비린내를 뿜었다. 나는 배낭을 베고 누워 그 냄새를 맡았다. 도쿄에 온 지 나흘째였고, 하늘은 거짓말처럼 개어 있었다. 유리를 닦아놓은 것 같은 파랑 위로 이따금 제트기 한 대가 하얀 금을 그으며 지나갔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잔디밭 저편에서 아이가 넘어져 울었고, 젊은 부모가 달려갔고, 그 소란조차 나와는 상관없이 흘러갔다.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는 방에서 나온 사람에게 이 무관심은 이불 같았다. 나는 그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눈을 감았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한 번 짧게 울었다. 꺼내지 않았다. 엄마일 것이다. 아니면, 아직 지우지 못한 메일함 어딘가에서 올라온 진동이거나. 나는 그것을 잔디에 대고 눌러 진동을 죽였다. 눈을 감으면 서울에서 온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됐다. 떨어졌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정오가 지나자 풀 냄새가 갑자기 축축해졌다. 눈을 떴을 때 서쪽 하늘의 반이 이미 잿빛으로 뒤집혀 있었다. 도쿄의 여름 하늘은 마음을 먹으면 순식간이었다. 바람이 잔디를 한 방향으로 눕히더니, 굵은 빗방울 하나가 이마에 툭 떨어졌다. 그다음은 셀 수 없었다. 잔디밭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짧은 비명과 함께 일어나 도시락 보자기를 싸매고 뛰기 시작했다.

나는 배낭을 챙겨 가까운 느티나무 밑으로 뛰어들었다. 잎이 무성해서 잠깐은 막아주는 듯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빗물이 잎을 채우고 넘쳐 목덜미로 떨어졌다. 셔츠 등판이 순식간에 등에 달라붙었다. 물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처마도 없는 나무 밑에서 어차피 젖을 거라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다 젖어버려라. 발밑에서 흙탕물이 올라와 운동화가 무거워지는데도 나는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도망칠 데가 없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했다. 젖는 데에는 실패도 합격도 없었다.

그때 옆으로 투명한 지붕 하나가 슥 밀려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편의점 우산이었다. 오백엔짜리 비닐우산. 그 아래 그 여자가 서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골든가이로 넘어가는 좁은 골목 안, 낮에는 손님이 거의 없는 작은 킷사텐의 유리창 너머로 두어 번 스친 얼굴이었다. 물잔을 닦거나 창밖을 내다보던, 조용한 옆얼굴. 그 여자가 지금 잔디밭에서 나에게 우산을 기울이고 있었다.

“괜찮아…요?”

한국어였다. 조약돌을 하나 물에 내려놓듯, 그 여자는 그 단어를 천천히 얹었다. 드라마에서 주워 담은 것 같은 발음이었다. 나는 그 다정함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어서, 그게 나를 겨눈 것이라는 게 부끄러워서, 반사적으로 가시를 세웠다.

“제가 뭐, 불쌍해 보였어요?”

말해놓고 곧바로 후회했다. 빗소리가 그 문장의 못난 끝을 다 덮어주기를 바랐다. 그 여자는 웃지도, 놀라지도, 얼굴을 굳히지도 않았다. 잠깐 나를 보더니 우산을 내 쪽으로 반 뼘 더 기울였을 뿐이다. 제 어깨가 우산 밖으로 나가는 것을 개의치 않고서.

“비, 싫어하는 사람, 있어요.”

거기서 한 번 쉬었다.

“나는… 좋아해요.”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우산 아래로 반걸음 들어섰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우산은 얇았다. 빗방울이 비닐을 두들기는 소리가 그대로 통과해 머리 위에서 자글자글 끓었다. 지붕이라기보다 소리를 걸러주지 못하는 얇은 막이어서, 비가 그친 게 아니라 다만 비를 함께 맞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우리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출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우산 하나의 폭은 두 사람에게 좁았다. 걸음을 맞추려다 어깨가 몇 번 부딪혔고, 그때마다 젖은 옷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어색하게 뒤섞였다. 그 여자의 소매에서 나는 냄새는 커피와 낡은 나무 냄새였다. 킷사텐의 냄새였다.

바깥쪽 어깨가 다 젖어가는데도 그 여자는 우산을 자기 쪽으로 당기지 않았다. 나는 그 기울기가 자꾸 신경 쓰였다.

“우산이… 얇네요.”

하고 싶은 다른 말 대신, 나는 사물을 말했다. 감정을 삼키고 손에 잡히는 것을 골라 말하는 건 오래된 버릇이었다. 그 여자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물웅덩이를 하나 돌아 나올 만큼의 침묵이 지나갔다.

“얇아도, 둘은 돼요.”

천천히, 또박또박.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속으로 굴렸다. 얇아도 둘은 된다. 비를 완전히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혼자 맞는 것보다는 낫다는, 그 정도의 말. 그런데 그 정도의 말이 왜 목 안쪽을 뻐근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정문에 다다랐을 때, 비는 시작할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잦아들었다. 회색 하늘 한 귀퉁이가 벌써 얇아지고 있었다. 아스팔트에서 김이 오르고, 젖은 가로수가 뚝뚝 떨어졌다. 이제 우산을 접어도 되는 날씨였다. 나는 접지 않았다. 접으면 반 뼘의 거리가 다시 벌어질 것 같았고, 어깨에 남은 온기가 그 얇은 지붕 아래서만 마르지 않고 버티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우산 손잡이를 내 쪽으로 살짝 돌렸다. 가져가라는 뜻인지, 자기가 들겠다는 뜻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각도로. 나는 그 손잡이도, 그 각도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걸음을 늦췄다. 젖은 채로 조금 더 걷고 싶었다. 그날 내가 얻어 쓴 것이 우산 하나뿐이 아니었다는 걸, 그때의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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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비누2026.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