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엔의 우산2화 / 전 18화2

1부 소나기가 시작되는 곳

2화. 가부키초의 217호

정우


“니하쿠 주나나.”

프런트의 남자가 열쇠를 카운터 위로 밀며 말했다. 나는 그 숫자를 알아듣지 못했다. 남자가 손바닥을 펴 열쇠에 찍힌 숫자를 내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217. 그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열쇠를 집었다.

나리타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간판을 하나도 읽어내지 못했다. 붉고 노랗고 파란 글자들이 뭉개진 채 뒤로 밀려났고, 나는 그것들이 무슨 가게의 이름인지 끝내 알 수 없었다. 캡슐호텔은 신주쿠 동쪽 끝, 가부키초로 접어드는 길목의 좁은 건물 오 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사람 둘이 겨우 설 만큼 작았고, 로커실은 낮에도 형광등을 켜둬야 할 만큼 창이 없었다.

217. 나는 열쇠를 손안에서 몇 번 굴렸다. 여기서 나는 217이었다. 김정우도 아니고, 최종에서만 여섯 번 미끄러진 남자도 아니고, 그냥 로커 하나에 붙은 숫자. 누구도 이 숫자에게 발표가 언제 나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고, 이 숫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배낭을 로커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자 짤깍,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마음을 놓이게 했다.

캡슐은 관처럼 좁았다. 누워서 팔을 뻗으면 천장에 손끝이 닿았고, 몸을 뒤척이면 어깨가 벽에 닿았다. 그런데도 아늑했다. 옆 칸에서 누군가 코를 골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낮게, 아무 악의 없이. 그 소리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서울의 원룸에서 천장을 노려보며 뒤척이던 밤들과 달리, 여기서는 낯선 사람의 숨소리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를 그저 내버려두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잠이 오지 않아 도로 떴다. 배는 고팠고, 시계는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다시 열쇠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밤 열한 시의 가부키초는 잠들 생각이 없었다. 파친코 가게의 문이 열릴 때마다 쇠구슬이 쏟아지는 소리가 안에서 왈칵 밀려 나왔다. 그 소리는 파도 같기도 하고 박수 같기도 했는데, 어느 쪽이든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골목 어귀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서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뭐라 뭐라 빠르게 말을 붙였다. 나에게도 그중 하나가 다가와 무언가를 권했다. 나는 그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건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젓고 그냥 지나쳤고, 남자는 곧 다른 사람에게로 몸을 돌렸다. 서울에서라면 이런 무시가 무례했겠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나를 편하게 했다.

골목 안쪽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냉장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가격표에서 제일 낮은 숫자를 골랐다. 튀김이 몇 조각 얹힌 도시락과 캔커피 하나. 계산대의 점원이 뭐라고 물었다.

“온대티메데스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이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넣었고, 잠시 뒤 데워진 도시락은 손에 들기 어려울 만큼 뜨거웠다. 필요 이상으로 뜨거웠다.

편의점 앞 화단 턱에 걸터앉아 나무젓가락을 쪼갰다. 반듯하게 갈라지지 않고 한쪽이 뾰족하게 떨어져 나왔다. 튀김은 데운 탓에 눅눅했고, 밥은 어쩐지 설익은 듯 딱딱했다. 그래도 나는 꾸역꾸역 먹었다. 아무도 내가 뭘 먹는지, 왜 이 시간에 혼자 화단 턱에 앉아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무관심이 반찬처럼 얹혔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꺼내 보니 액정에 ‘엄마’ 두 글자가 떠 있었다. 나는 젓가락을 든 채 그 두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받으면 물을 것이다. 밥은 묵고 댕기나. 발표는 언제 나노. 언제 들어올 낀데. 나는 대답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진동이 멎었다. 도시락으로 눈을 돌리는데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캔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목구멍으로 미지근한 단맛이 넘어가는 동안 두 번째 진동도 끝까지 흘려보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화면을 엎어 도시락 옆에 내려놓았다. 검은 뒷면이 위를 향하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죄책감은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것은, 이 도시에서만은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였다. 서울에서 나는 늘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다음 발표는 언제고, 이번엔 어디까지 갔고, 왜 또 떨어졌는지. 여기서는 217이면 됐다. 데운 도시락을 먹는 남자면 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가부키초의 네온이 붉게 번져 오른 자리, 그 위로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낮보다 어두운데도 구름의 배가 붉은 빛을 받아 무겁게 부풀어 있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나는 서울 원룸의 우산꽂이에 그대로 꽂아두고 온 낡은 삼단 우산을 잠깐 떠올렸다. 살이 하나 어긋나서 펼 때마다 손에 걸리던 그것. 챙길까 하다가 그냥 두고 나온 물건이었다. 도쿄에서 비 맞을 일이 뭐가 있겠나. 며칠 숨어 있다 돌아갈 사람에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도로 접어 넣었다.

식은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화면을 엎어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도로 넣고, 캔커피를 마저 비웠다. 그러고는 아직 잠들지 못한 골목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등 뒤에서 파친코 문이 또 한 번 열렸고, 쇠구슬 쏟아지는 소리가 나를 지나 어딘가로 흘러갔다. 구름은 여전히 낮았다. 그때 나는, 그 구름 밑에서 내가 며칠 뒤 어떤 우산 하나를 얻어 쓰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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