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엔의 우산1화 / 전 18화3

1부 소나기가 시작되는 곳

1화. 계단처럼 아래로 이어진 여섯 번의 문장

정우


밤 열한 시 십칠 분. 메일이 도착했다.

원룸 형광등이 노트북 화면 위로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여섯 번째였다. 발신인 이름도, 제목도, 본문의 첫 문장도 다섯 번째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귀하의 역량은 훌륭하나 금번 채용 인원에 부합하지 않아.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세 번을 읽어도 훌륭하다는 말은 나를 향한 게 아니라 봉투에 찍힌 도장 같았다. 아무 데나 눌러도 되는, 같은 얼굴을 반복해서 찍어내는 도장.

지우지 않았다. 마우스를 휴지통 위로 가져갔다가 도로 뗐다. 지울 힘도 없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나는 손가락을 화면 아래로 밀었다. 다섯 번째 메일이 그 아래 그대로 있었다. 네 번째, 세 번째도. 여섯 개의 같은 문장이 계단처럼 아래로 이어졌고, 나는 그 계단이 어디로도 내려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새 창을 열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항공권 앱. 검색창에 도쿄를 치는 동안 나는 내가 무얼 하려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내일 새벽 나리타행. 편도. 가격 옆에 뜬 숫자를 보면서 통장 앱을 나란히 켰다. 적금 만기까지 넉 달 남은 돈이 거기 잠들어 있었다. 언젠가 입사하면, 첫 월급을 보태 목돈을 만들려고 묶어둔 돈. 그 언젠가는 이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결제 버튼을 누르는 동안 이상하게 손이 떨리지 않았다.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문자가 곧바로 왔다. 잔액이 확 줄어든 숫자를 보는데 마음 어딘가가 오히려 가벼워졌다. 도망치는 데에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구나. 조금 우스웠다.

짐은 십 분 만에 쌌다. 배낭 하나에 티셔츠 몇 장, 충전기, 여권. 세면도구를 쓸어 담고 나니 더 넣을 게 없었다. 스물다섯 해를 살고도 챙길 게 이것뿐이라는 뜻이겠지.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우산꽂이에 꽂힌 삼단 우산을 잠깐 봤다. 손잡이가 헐거워 접을 때마다 손가락을 무는 낡은 우산. 나는 그것을 두고 나왔다. 어차피 여행지에서 비 맞을 일은 없을 거라고, 그때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공항철도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창밖으로 검은 들판이 흘렀다. 논인지 밭인지 분간되지 않는 어둠 위로 가끔 물류창고의 붉은 등이 지나갔다. 그 붉은 점을 눈으로 좇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엄마였다.

받을까 말까 화면을 보는 사이 벨이 세 번 울렸다. 받았다.

“정우야, 이 시간에 어데고.”

“그냥, 좀 나가 있으려고요.”

“나가긴 어델 나가. 이 밤에.”

나는 창밖을 봤다. 검은 들판에 내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 있었다.

“면접은 우예 됐노.”

숨이 잠깐 멎었다. 열한 시 십칠 분에 도착한 문장이 배낭 속 휴대폰이 아니라 내 갈비뼈 안쪽 어딘가에 접혀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발표 안 났어요.”

거짓말은 물처럼 매끄럽게 나왔다. 매끄러워서 더 비참했다.

“밥은 묵고 댕기나. 언제 들어올 낀데.”

언제 들어갈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엄마, 나 신호 끊길 것 같은데. 터널 들어가나 봐.”

터널은 없었다. 나는 통화 종료를 눌렀다. 엄마의 목소리가 끊긴 자리에 열차 바퀴 소리만 남았다. 걱정을 걱정이라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과, 실패를 실패라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비껴갔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밀어낼 때 몸이 뒤로 눌렸다. 창밖에서 서울이 아래로 기울었다. 도로의 불빛, 아파트 창의 불빛, 이름 모를 건물들의 불빛이 고도가 오를수록 서로 번지며 뭉개졌다.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젖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미 다 젖은 기분이었다.

옆자리 남자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낮고 규칙적인 소리가 났다가 한 번씩 목에 걸린 듯 끊겼고, 끊기는 순간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남자의 팔꿈치가 팔걸이를 넘어와 내 팔에 닿았다. 나는 팔을 창 쪽으로 조금 당겼다. 손이 갈 데를 몰라 좌석 포켓을 뒤졌다. 구겨진 기내지, 멀미봉투, 그리고 안전 안내서. 코팅된 종이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모서리가 물렁하게 닳아 있었다. 비상시 산소마스크가 내려오는 그림, 물 위에 떠 있는 구명조끼 입은 사람의 그림. 손가락으로 그림 위를 문지르다가 도로 꽂았다. 다시 꺼냈다가 또 꽂았다. 엄지손톱으로 닳은 모서리를 눌러보고, 접힌 자국을 폈다가 다시 접었다. 손이 자꾸 무언가를 붙들고 놓지 못했다. 붙들 게 그것밖에 없었다.

도착하면 뭘 할 건지 나는 아무것도 정해두지 않았다. 호텔 하나 예약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에서 며칠쯤, 여섯 번 떨어진 김정우가 아닌 채로 숨어 있고 싶었다.

기내등이 꺼지고 창밖이 온통 구름으로 덮였다. 한참 뒤 구름이 갈라지는 틈으로 아래쪽에 도시가 나타났다. 낯선 도시의 노란 불빛이 어둠 속에서 촘촘히 반짝였다. 그것도 물에 번지듯 흐릿했다. 창에 이마를 대고 그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내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