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우산을 접으며
17화. 젖은 어깨와 접히다 만 우산
비가 왔다.
첫 출근 날 아침에 비가 오는 걸 나는 좋은 징조로도 나쁜 징조로도 읽지 않으려 했다. 그런 걸 따지던 시절은 지나갔다고, 물을 내리고 나온 화장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매며 생각했다. 현관에 우산이 두 개 서 있었다. 신발장 위에 낡은 삼단이 하나, 그 아래 살이 하나 휜 오백엔짜리 비닐우산이 하나. 손이 먼저 아래로 갔다.
삼단은 도쿄로 떠나던 여름 이후로 한 번도 펴지 않았다. 접힌 채 먼지가 앉아 손잡이 고무가 끈끈해져 있었다. 나는 그걸 지나쳐 헐거운 비닐우산을 집어 들었다. 문을 열자 골목 바닥에 고인 물 위로 빗줄기가 동그란 자국을 찍고 있었다. 우산을 펴는 순간 손잡이가 삐걱 돌았고, 얇은 비닐이 툭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그 위에서 빗방울이 잘게 부서졌다.
얇아서 잘 들린다던 소리였다. 가나자와행 계단을 오르기 직전에 웃던 목소리가, 젖은 아침 공기를 뚫고 귓가로 왔다. 이상하게 그 순간 코끝에 풀 냄새가 났다. 반지하 골목의 시멘트와 하수구 냄새 위로,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누워 있던 그 잔디밭의 초록이 얇게 겹쳐 왔다. 신주쿠 교엔의 낮 동안 데워진 잔디. 나는 골목 입구에 잠깐 서서 그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추가 채용은 떨어졌다. 일곱 번째였다. 나흘 뒤 면접장을 나오면서 나는 이미 알았고, 그래서 불합격 메일이 왔을 때 손이 떨리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화면을 껐다 켰다 하며 문장을 다시 읽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한 번 읽고 화면을 껐다. 여덟 번째를 준비하는 대신 나는 갈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지금 출근하는 곳은 직원 열두 명짜리 무역회사였다. 초봉은 예전에 떨어진 곳들의 절반이 될까 말까였고, 사무실은 오래된 상가 건물 삼층에 있었다. 합격 전화를 받던 날, 총무를 겸한다는 여자분이 “우리 회사가 좀 작아요” 하고 미리 말해 주었다. 예전의 나라면 그 말에 어깨가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누가 어디 다니냐고 물으면 회사 이름을 흐리고, 또 어디론가 도망칠 궁리부터 했을 것이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눈높이를 낮췄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그런 말은 아직도 나를 조금 찌르는 데가 있어서, 그냥 다닐 수 있는 곳에 다니게 됐다고만 스스로에게 말해 두었다.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십 분이었다. 우산 속에서 나는 어깨를 조금 웅크렸다. 반 뼘밖에 안 되는 지붕이라 한쪽 어깨가 젖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빗방울이 얇은 비닐 위에서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정수리 바로 위에서 났다. 두꺼운 우산이었다면 둔탁하게 튕겨 나갔을 소리가, 이건 그대로 통과해 귓속까지 들어왔다. 그때도 그랬다. 교엔 담장을 따라 걷던 밤, 하루의 어깨와 내 어깨가 한 뼘도 안 되게 붙어 있었고, 우리 둘 위로 떨어지던 비는 소리를 하나도 숨기지 않았다.
차 한 대가 옆 차선의 고인 물을 밀며 지나갔다. 바짓단이 튀어 종아리가 서늘해졌다. 나는 발을 반 걸음 안쪽으로 옮겼다. 예전 같으면 젖은 바짓단을 내려다보며 오늘 하루를 미리 망친 것처럼 굴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냥 걸었다. 셔츠 왼쪽이 축축해지는 감각을 나는 가만히 견뎠다.
우산을 조금 오른쪽으로 기울여 보았다. 그러면 왼쪽 어깨가 더 젖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오른쪽에 아무도 없는데도, 없는 사람 쪽으로 지붕을 밀어 주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빈자리를 느끼면서도 예전처럼 시리게 아프지는 않았다.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며 나는 헐거운 손잡이를 한 번 고쳐 쥐었다. 살이 하나 휜 자리로 빗물이 흘러 손목을 타고 내려왔다.
“다시 시작하는 거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그 말을 나는 신호가 바뀔 때까지 속으로 한 번 더 굴렸다. 서툰 한국어로, 조약돌을 하나씩 내려놓듯 천천히 이어 붙이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였다. 신호가 파랗게 바뀌었고, 나는 젖은 어깨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역이 가까워지자 우산을 쓴 사람들이 늘었다. 큼직한 장우산 사이에서 내 반 뼘짜리 비닐은 유난히 작고 헐거워 보였을 것이다. 누군가 힐끔 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우산을 바꿔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발장 위의 삼단은 오늘도 접힌 채였다. 그걸 두고 온 게 아니라, 이걸 골라 든 거였다.
셔츠 밖에서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안주머니 속 코팅한 종이가 천 너머로 딱딱하게 만져졌다. 라무네를 들고 웃는 나, 그리고 오른손 자리가 비어 있는 그림. 잘 다녀와요, 그리고 잘 살아요. 빈 손은 가나자와가 아니라 서울에서 채우는 거라던 말을, 나는 매일 아침 그 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러 확인했다. 셔츠 위로 넥타이 매듭이 함께 만져졌다. 손바닥에 닿는 천은 체온에 미지근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면서, 출근하면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항철도에서 합격 발표가 아직 안 났다고 거짓말했던 그 여름 이후로, 내가 먼저 소식을 전하는 건 처음이었다. 부산 사투리가 벌써 들리는 것 같았다. 밥은 묵고 댕기나. 회사는 언제부터 나가노. 첫날부터 늦으면 안 된다이. 걱정을 그런 문장으로밖에 못 하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안다. 이번에는 그 말을 채근으로 듣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회사 이름을 대면 엄마는 못 들어본 데라고 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작아도 다닐 만해, 하고 대답할 참이었다.
지하철 입구 앞에서 나는 우산을 접었다. 살 하나가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아 비닐이 한쪽으로 삐죽 벌어졌다. 완전히 접히지 않는 우산을 억지로 여미려다, 나는 그만두었다. 접힌 자리에서 물방울이 손등으로 떨어졌다. 헐거운 손잡이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안에서 그게 한 번 돌았지만, 놓치지는 않았다.
야나카의 무너진 담 앞에 쭈그려 앉아 이끼를 들여다보던 아침이 떠올랐다. 부서진 자리에서도 이끼는 자란다고, 그때 나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속으로 삼켰었다. 그날은 그저 스쳐 가는 생각이었는데, 서울의 이 아침에야 나는 그 말을 처음으로 내 것으로 믿었다. 계단 아래에서 열차 들어오는 소리가 젖은 공기를 밀고 올라왔다. 나는 한쪽이 젖은 어깨로 계단을 내려갔다. 개찰구 앞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접히다 만 우산을 옆구리에 낀 채 승강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주머니 속 종이가 걸음마다 가슴을 한 번씩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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