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엔의 우산16화 / 전 18화11

4부 마지막 빗소리

16화. 젖은 우산과 헐거운 손잡이

정우


신주쿠역 지하 통로에는 새벽 다섯 시에도 젖은 우산 냄새가 고여 있었다. 밤새 통로를 지나간 사람들이 흘리고 간 물비린내가 환기되지 못한 채 바닥 가까이 눌러앉아 있었다. 우리는 표지판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자리에서 멈췄다. 화살표 하나는 오른쪽 계단으로, 하나는 왼쪽 개찰구로 뻗어 있었다. 나는 그 갈림이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앞에 서니 발이 붙었다.

하루는 왼팔로 봉지를 안고 있었다. 검은 꼬리 금붕어가 든 봉지였다. 밤새 흔들린 물이 봉지 안쪽에 작은 물방울로 맺혀 있었고, 그 방울들이 통로의 불빛을 받아 흐릿하게 빛났다.

“가나자와… 여기서, 저쪽.” 하루가 오른쪽 계단을 턱으로 가리켰다.

나는 공항행 열차가 반대쪽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저녁, 역 노선도를 몇 번이나 들여다봤으니까. 그런데도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방향을 말하는 순간 정말로 갈라지는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봉지 속 검은 꼬리가 한 번 몸을 트는 걸 지켜봤다.

셔츠 안쪽에서 종이학이 접혔던 그림이 살갗에 닿아 바스락거렸다. 나는 손에 든 것을 그제야 떠올렸다. 살이 하나 휜 오백엔짜리 비닐우산. 손잡이가 헐거워져서 두 손으로 쥐고 있어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거… 돌려드릴게요.” 나는 우산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원래 하루 씨 우산이니까.”

하루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대신 봉지를 안지 않은 오른손으로 내 손을 우산째 감싸, 도로 내 가슴 쪽으로 가만히 밀어 붙였다. 손이 차가웠다.

“돌려주지 마요. 비 올 때… 펴요.”

그 말이 통로의 죽은 공기 속으로 하나씩 떨어졌다. 나는 그 말이 우산에 관한 것이 아님을 알아들었다. 우산은 이미 살이 휘고 손잡이가 헐거웠다. 다음 비를 견딜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루는 그걸 나더러 다음 비에 펴라고 했다.

며칠 전 연못가에서 하루가 흘리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나자와는 비가 자주 오는 곳이라, 부모가 갤 청 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고. 맑으라고 붙여준 이름을 안고, 정작 하루는 늘 비 오는 도시로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아픈 어머니 곁으로, 그만두었던 그림 앞으로.

붙잡고 싶었다. 하루 씨도 서울로 오면 안 되냐고, 서울도 장마철엔 비가 많이 온다고, 이 얇은 우산 하나면 두 어깨쯤은 어떻게든 가려지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입안에서 문장이 몇 번이나 만들어졌다.

그러나 어젯밤 하루가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며 했던 말이 목구멍을 눌렀다. 비어 있는 오른손은 가나자와가 아니라 서울에서 내가 채우는 거라던 말. 그림 속에서 내 오른손이 비어 있던 이유. 그 손을 지금 이 자리에서 붙잡아 채워달라고 하는 건, 하루가 그려둔 그림을 내 손으로 다시 접어버리는 일이었다.

나는 삼켰다. 삼키는 데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천장 어딘가에서 가나자와행 개찰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울렸다. 일본어 여자 목소리가 역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고, 그 이름이 우리 사이로 지나갔다. 하루가 반걸음 물러섰다. 봉지 속 물이 그 걸음을 따라 출렁였다.

“정우 씨, 잘… 다녀와요.”

나는 끝내 사과도 고백도 하지 못했다. 어제 동정이냐고 몰아붙였던 말도, 종이학을 받고 하지 못한 말도 전부 목 안에 남아 있는데, 정작 입에서 나온 건 엉뚱한 소리였다.

“우산… 진짜 얇네요.”

하루가 웃었다.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루가 그렇게 웃는 걸 나는 처음 봤다.

“얇아서… 소리, 잘 들려요. 빗소리.”

하루는 금붕어 봉지를 고쳐 안고 오른쪽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비린내 나는 통로의 불빛 아래로 그녀의 등이 조금씩 멀어졌다. 계단을 한 칸 오를 때마다 봉지 속 물이 출렁였고, 검은 꼬리가 그 흔들림을 견디며 함께 실려 올라갔다.

계단 중간에서 하루의 걸음이 한 번 멈췄다. 나는 그녀가 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봉지를 든 팔을 고쳐 안는 짧은 동작이었을 뿐인데, 그 짧은 사이에 나는 이름을 부를 뻔했다. 입술이 벌어졌고, ‘하루 씨’의 첫 음이 목 안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한 칸을 올랐고, 또 한 칸을 올랐다. 운동화 밑창이 젖은 계단을 딛는 소리가 물기 먹은 통로에 낮게 번졌다.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저 작은 것이 살아남을지 어떨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루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것을 품에 안고 비 오는 도시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뛰어가지 않았다. 팔을 뻗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헐거운 우산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손잡이가 흔들리지 않도록, 살이 더 휘지 않도록. 붙잡지 않는 것이 이번만은 밀어내는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그 계단 앞에서야 알았다. 받은 온기를 손에서 흘리지 않고 데려가는 일이었다. 어제 잔디밭에서 나는 밀어냈고, 오늘 이 통로에서는 흘리지 않기로 했다.

두 번째 안내방송이 하루의 뒷모습을 삼켰다. 계단 위로 그녀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통로에는 다시 젖은 우산 냄새와 나만 남았다. 나는 한동안 빈 계단을 올려다봤다. 마지막 방송의 여운이 천장 스피커에서 지지직 끊기고, 첫차를 타러 나온 사람들의 발소리가 반대편에서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캐리어를 끌고 내 옆을 스쳐 지났다. 바퀴 소리가 통로를 길게 긁었다.

나는 반대쪽으로 돌아섰다. 공항행 플랫폼을 알리는 화살표가 왼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셔츠 안쪽에서 종이학 그림이 다시 살갗에 닿았다. 걸음을 뗄 때마다 접힌 종이가 배에 눌렸다. 나는 왼손으로 우산을, 오른손으로 셔츠 위를 가만히 눌러 그림이 구겨지지 않게 했다.

도쿄에 온 첫날 밤, 나는 이 도시로 도망쳐 들어왔다. 개찰구를 빠져나오면서 뒤를 몇 번이나 돌아봤고, 밟는 계단마다 뒤에 두고 온 것들이 발목을 잡아당겼다. 이제 나는 같은 발로 서울을 향해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는데도 발이 무겁지 않았다. 젖은 우산을 쥔 손끝이 조금씩 데워지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나흘 뒤, 서울에서 일곱 번째 최종면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떨어질지도 몰랐다. 떨어지면 여덟 번째를 준비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우산을 한 번 고쳐 쥐었다. 손잡이가 손안에서 헐겁게 돌았지만, 놓치지는 않았다.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리자 몸이 위로 실려 올라갔다. 공항선 개찰구 너머로 이른 아침의 첫 열차가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나는 표를 넣고 개찰구를 지났다. 등 뒤에서 개찰기가 짧게 삑 울렸다. 열차 안은 아직 비어 있었고,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젖은 우산을 무릎 위에 눕혔다.

서울에 장마가 오면, 나는 살이 휜 이 오백엔짜리를 펴고 빗소리를 들어볼 생각이었다. 얇아서 잘 들린다던, 그 소리를. 문이 닫힐 때까지, 나는 헐거운 손잡이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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