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엔의 우산15화 / 전 18화11

4부 마지막 빗소리

15화. 미완성의 손과 반 뼘의 지붕

정우


아마야도리의 미닫이문이 등 뒤에서 닫히던 소리를, 나는 지금도 꺼내 들을 수 있다. 낡은 홈을 따라 나무가 나무를 긁으며 끝까지 밀려가 탁, 하고 멈추던 그 소리. 그게 그 가게에서 내가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노인은 이미 주방 뒤편으로 사라진 뒤였고, 불이 꺼진 창 안에서 검은 꼬리 하나가 유리 어항 속을 천천히 돌고 있었다.

나는 결국 우산을 접은 채로 들고 나왔다. 살이 하나 휜 오백엔 우산은 손잡이가 헐거워 걸을 때마다 손안에서 조금씩 돌아갔다. 밖은 여전히 비였다.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오래 내릴 작정을 한 비.

신주쿠 교엔의 담장을 따라 걸었다. 밤 여덟 시가 지난 담장 안쪽에서 젖은 벚나무 잎들이 저희끼리 물방울을 주고받았고, 그중 하나가 내 목덜미로 떨어져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하루가 우산을 폈다. 어차피 반 뼘밖에 가려주지 못하는 지붕이었다.

“우산이, 아직도 얇네요.”

나는 또 사물을 말했다. 사흘 전에도 같은 말을 했었다. 하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할 말 없는 사람의 말인지 알았다.

하루가 느리게 웃었다.

“그래서… 좋아요. 빗소리, 다 들려요.”

우리는 우산 하나 아래에서 어깨를 다시 맞댔다. 젖은 셔츠 너머로 서로의 팔이 닿았고, 나는 그 온도가 사라지는 게 무서워서 걸음을 일부러 늦췄다. 담장 위로 떨어지는 비, 우산의 투명한 천장을 두드리는 비, 발밑 웅덩이에서 튀는 비. 소리들이 층층이 겹쳤다. 하루의 말대로였다. 얇아서 다 들렸다.

담장이 한 번 꺾이는 자리에서 하루가 멈췄다. 우산을 내 쪽으로 슬쩍 기울여 든 채, 다른 손으로 캔버스 가방을 뒤졌다. 손잡이가 거뭇하게 손때 먹은, 처음 만난 날부터 그녀 어깨에 매여 있던 가방이었다. 그 안에서 한 번 젖었다가 마른 스케치북이 나왔다. 표지가 물결처럼 우글거려 제대로 덮이지 않는 그것을.

하루는 스케치북을 펴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끝으로 갈피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 뭔가 들어 있다고, 말 대신 알려주듯이. 그러고는 접힌 종이학 하나를 꺼내 내 손바닥에 올렸다. 학은 젖지 않으려는 듯 작게 접혀 있었고, 날개 끝이 조금 눌려 있었다.

“펴… 봐요. 지금 말고. 기차 안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지 못할 걸 알면서 끄덕였다. 나흘 뒤면 나는 이 도시에 없을 것이고, 그녀도 다른 기차에 실려 다른 도시로 가 있을 텐데, 우리에게 ‘기차 안’이라는 같은 시간은 없었다.

세 걸음쯤 더 걷다가 나는 가로등 밑에서 멈춰 섰다. 참지 못하고 젖은 손끝으로 학의 날개를 폈다. 종이가 눅어 잘 펴지지 않았고, 접힌 자국을 따라 연필선이 번져 있었다.

번진 선 안에서 내가 웃고 있었다. 라무네 병을 든 채로. 구슬을 눌러 따느라 손목까지 탄산이 튀던 그날의 내가, 서툴게, 어색하게, 그러나 분명히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런 표정을 짓는 나를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림 속 내 오른손 자리는 비어 있었다. 팔목까지는 선이 이어지다가,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뚝 끊겨 종이의 흰 바탕만 남아 있었다. 그 아래 삐뚤빼뚤한 한글이 적혀 있었다.

잘 다녀와요, 그리고 잘 살아요.

목소리가 먼저 떨렸다.

“왜… 여기만, 안 그렸어요.”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산 밖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가로등 불빛이 손금을 따라 고이는 빗물을 노랗게 물들였고, 손바닥에 얕은 물웅덩이가 만들어졌다. 하루는 그것을 잠깐 들여다보다가, 손을 기울여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건… 정우 씨가 채워요. 가나자와 아니고… 서울에서.”

나는 그제야 알았다. 손이 비어 있는 이유를. 그녀가 며칠 못 간다던 금붕어를 굳이 가나자와까지 데려가겠다고 한 이유를. 이 다정함이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아래로 내려온 손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도 무너진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다시 붓을 잡으려는 사람이, 같은 높이에서 옆으로 내미는 손이라는 것을. 동정은 위에서 온다. 이건 옆에서 왔다.

나는 종이학을 손바닥에 가만히 쥐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무 데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나, 서울로 돌아가요. 나흘 뒤에 면접이 있어요.”

한 박자 쉬고, 나는 남은 말도 마저 꺼냈다.

“또 떨어질지도 몰라요. 이번이 일곱 번째니까.”

일곱 번째, 라고 소리 내어 말하면서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 숫자가 나를 판결하지 못했다. 여섯 번의 낙방으로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이 도시로 도망쳐 온 나를, 나는 그 가로등 밑에서 조용히 놓아주었다.

하루가 이전에 연못가에서, 헌책방 처마 밑에서 했던 말을 다시 얹었다. 자기 자신에게 하던 그 말을.

“다시 시작하는 거…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정우 씨.”

빗소리가 우산 천장을 고르게 두드렸다. 나는 접었던 학을 도로 접으려다 그만두었다. 한 번 편 날개는 다시 접히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건 기차 안에서 펼 물건이 아니라, 지금 이 담장 밑에서 펴야 하는 물건이었다.

우리는 우산을 접지 않았다. 반 뼘짜리 지붕 아래로 어깨를 맞댄 채, 꺾인 담장의 끝을 향해 다시 걸었다. 나는 미완성의 손을 그린 종이학을 셔츠 안쪽에 넣었고, 하루의 가방 속에서는 검은 꼬리 하나가 물봉지를 흔들며 함께 실려 갔다. 담장 끝에는 가로등이 하나 더 서 있었고, 그 불빛이 젖은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우리 둘의 그림자가 그 위로 겹쳐졌다가, 걸음마다 벌어졌다가, 다시 겹쳐졌다.

담장이 끝나는 자리에서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우산 하나의 폭이 우리에게 허락된 마지막 밤이라는 것을. 새벽이 오면 우리는 서로 다른 플랫폼에 서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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