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마지막 빗소리
14화. 헐거운 우산과 뜨거운 잔
“스미마셍… 아노… 키노… 와타시가…”
내 입에서 나온 건 문장이 아니라 젖은 소리의 조각들이었다. 물을 먹은 혀는 학원에서도 배운 적 없는 말 앞에서 자꾸 걸렸고, 나는 결국 다음 단어를 찾지 못한 채 멈춰 섰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문에 달린 종이 흔들리며 낸 소리가 아직 가게 안에 남아 있었다.
교엔 잔디밭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이미 뛰고 있었다. 접힌 우산을 손에 쥔 채였다. 헐거운 손잡이가 뛸 때마다 손안에서 한 바퀴씩 헛돌았지만 나는 그것을 놓지 않았다. 골목으로 접어들자 처마 밑에 걸린 아크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야도리, 라고 흐릿하게 인쇄된 글자 위로 빗물이 줄을 그으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잠깐 숨을 골랐다. 그리고 유리문을 밀었다.
카운터 안쪽에서 하루가 나를 보았다. 물이 발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셔츠가 몸에 붙어 있었고 신발 안에서는 걸음마다 물소리가 났다. 하루는 손에 든 마른행주를 내려놓지도, 뭐라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젖은 나를 조용히 건너다볼 뿐이었다.
문 옆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손글씨였다. 本日をもって閉店(오늘로 영업 종료). 오늘로 문을 닫는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날이 하루의 마지막 근무일이라는 것을. 어쩌면 이 가게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이라는 것을. 어제까지도 몰랐던 사실이 젖은 종이의 잉크처럼 번져 왔다. 사과하려고 뛰어온 입이 다시 붙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어느 나라 말로 시작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하루는 대답 대신 카운터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사이펀 아래 알코올 램프에 불을 붙이자 파란 불꽃이 유리 기둥을 데우기 시작했다. 물이 데워지는 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그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서 있는 채로 물을 뚝뚝 흘렸고, 하루는 등을 반쯤 돌린 채 끓어오르는 물만 보고 있었다.
안쪽 자리에서 주인 노인이 신문을 접었다. 그가 접힌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일어나며 나를 한 번 보았다. 못마땅한 얼굴도, 반가운 얼굴도 아니었다.
“아메다네.”
노인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주방 뒤편으로 사라졌다. 비네, 라는 말. 그는 늘 그 말만 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이 텅 빈 가게에 떨어지자 어제 내가 뱉은 말이 함께 떠올랐다. 이름을 지어줘도 금붕어는 며칠 못 가 죽는다고. 우산을 다 내주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간 하루의 등에 대고, 나는 그런 말을 했다. 그 말이 아직 이 공기 어딘가에 떠 있는 것 같아서 숨을 크게 쉴 수가 없었다.
하루가 잔을 들고 돌아섰다. 그리고 내 앞에 내려놓았다. 잔이 받침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화가 실린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더러 앉으라고, 여기 그대로 있으라고 붙드는 소리에 가까웠다.
“차가운 사람… 아니에요, 정우 씨.”
하루는 단어 하나를 손끝으로 골라 내려놓듯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려고 뛰어온 사람이면서도, 정작 그 말 앞에서 목이 잠겼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 안쪽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열이 전해졌다.
“커피가… 뜨겁네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사과하러 와서 커피 온도 이야기나 하는 사람. 나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마음을 말해야 할 자리에서 사물을 말하고, 손을 내밀어야 할 때 가시를 세웠다. 그러나 잔을 쥔 채로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용서를 구한다는 건 상대에게 죄를 사면받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나를 그렇게까지 못난 사람으로만 붙잡아 두지 않겠다고 한 번 더 마음먹는 일이라는 걸. 어제의 나를 미워하는 자리에 계속 서 있으면, 나는 영영 그 골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뜨거운 잔은 그것을 가르치려고 거기 놓인 것 같았다.
하루가 카운터 옆을 눈짓했다. 유리 어항 속에서 검은 꼬리 하나가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었다. 어제 내가 종이 뜰채를 눕혀 건져 올린, 그 작은 금붕어였다. 며칠 못 간다고 내가 단정했던 것이 물속에서 멀쩡히 방향을 틀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하루가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내 앞에서 처음 보이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잔만 더 세게 쥐었다.
한 모금을 삼켰다.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내려가 굳어 있던 어깨를 조금 풀어놓았다. 사이펀 유리에서 옮아온 냄새가 커피 밑에 옅게 깔려 있었다. 하루는 카운터에 팔꿈치를 얹고 어항 쪽을 보고 있었다. 검은 꼬리가 유리벽 가까이 다가왔다가 다시 안쪽으로 돌아섰다. 그녀는 그것을 오래 지켜보는 사람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곧 두고 갈 것을 미리 눈에 담아두려는 사람처럼.
밖에서 빗소리가 처마를 두드렸다. 창유리에 물줄기가 비뚤게 흘러 골목의 불빛을 잘게 흔들었다. 나는 두 번째 모금을 마셨고, 하루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나를 나무라지 않아서, 나는 오히려 그 안에서 어제의 내 말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벽시계의 초침이 카운터 위로 또박또박 떨어졌다.
이윽고 하루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카운터 위 잔들을 한쪽으로 모으고, 사이펀의 램프를 손끝으로 눌러 껐다. 파란 불꽃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마른행주로 유리 기둥에 남은 물기를 천천히 닦았다. 매일 하던 손이 오늘은 한 번 더 그 자리를 쓸었다. 어항의 물 높이를 눈으로 확인하고, 카운터 안쪽의 스위치를 하나 내렸다. 안쪽 조명이 꺼지자 가게 한쪽이 어스름해졌다. 남은 불빛 아래로 그녀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폐점 시각이 되자 하루는 앞치마 끈을 등 뒤로 손을 돌려 풀었다. 매듭이 한 번에 풀리지 않아 그녀의 손가락이 잠깐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끈이 풀리자 앞치마 앞자락이 아래로 늘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목에서 벗어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앞치마를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었다. 접힌 천의 주름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 폈다. 그러고는 그것을 카운터 한구석에 올려놓았다. 다음 사람이 매지 않을 앞치마였다. 내일이면 이 카운터 자체가 없을 것이었다. 앞치마를 올려놓는 손이 마지막에 아주 조금 지체했다. 이 가게에서의 마지막 손짓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산책, 같이 해요.”
나는 대답 대신 문 쪽에 세워둔 비닐우산을 보았다. 살이 하나 휜 채로, 헐거운 손잡이를 아래로 두고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저 우산을 다시 펴야 하는지, 아니면 접은 채로 들고 나가 어제처럼 둘이 함께 젖어야 하는지, 나는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로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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