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비가 그치기 전에
11화. 처마 밑의 검은 꼬리
내 말이 처마 밑으로 다 스며들 때까지, 하루는 봉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꼬리가 좁은 물 안에서 느리게 방향을 틀었다. 나는 그 침묵이 무서웠다. 아까 내가 뱉은 말보다,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하루의 등이 더 무거웠다. 사과하는 법을 몰라서, 나는 엉뚱한 것을 물었다.
“가방 안에요. 기차표.”
하루의 손가락이 봉지 매듭을 한 번 조였다가 다시 풀었다. 물이 봉지 안에서 조금 출렁였다.
“가나자와. 언제 가요.”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툰 한국어를 고르느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 문장을 소리 내는 일이 힘들어서인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빗줄기가 처마 끝에서 실처럼 이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주.”
먼저 그 단어가 떨어졌다. 그리고 뒤늦게, 나머지가 따라왔다.
“어머니, 아파요. 내가 가야 해요.”
빗줄기는 이미 굵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오백엔짜리 비닐우산을 펴지 않고 있었다. 나흘 동안 나는 비가 오면 이 얇은 지붕 아래로 들어갈 구실이 생긴다고 좋아했었다. 지금은 그 지붕을 펴는 것이 겁났다. 펴는 순간, 이 사람과 나 사이에 남은 날들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비닐 너머로 흐려지는 골목을 봤다. 물에 번진 간판,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그 아래로 우산을 접으며 뛰어드는 사람들. 그 흐릿한 화면 어딘가에 하루가 며칠 뒤 올라탈 기차가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이 도시가 나 하나만 붙잡아 두고 있는 줄 알았다. 여기 남은 하루도, 실은 어딘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거기서, 뭐 할 거예요.”
내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아졌다. 하루는 무릎에 놓인 캔버스 가방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한 번 젖었다 마른 스케치북이 든 자리였다.
“그림… 다시.”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마땅한 말을 찾은 사람처럼 덧붙였다.
“처음부터요.”
젖은 종이의 우글거리는 표지가 가방 입구로 반쯤 밀려 나와 있었다. 나는 그 마른 물결을 봤다. 하루는 계속 가방을 두드리며 말했다.
“미대, 그만뒀어요. 무서워서… 근데 이제, 다시 해요.”
며칠 전 연못가에서 그녀가 나에게 던졌던 물음이 떠올랐다. 그만둔 거,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그때 나는 그게 나한테 묻는 말인 줄 알고, 대답 대신 젖은 자갈만 굴렸었다. 아니었다. 그건 그녀가 몇 년째 자기 자신에게 묻던 말이었다. 낯선 나에게 슬쩍 얹어보면서, 정작 답이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었던 것이다.
위로를 건네던 손이 실은 나보다 더 깊게 베인 손이었다. 나는 여섯 번의 낙방을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실패라 믿고 도쿄까지 도망쳐 왔다. 어젯밤에도 나는 캡슐호텔 217호에 누워 있었다. 관 크기만 한 칸, 손을 뻗으면 천장이 닿았다. 체크인을 받던 프런트 직원은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217. 나는 그 숫자로 불리는 게 편했다. 정우라는 이름에는 여섯 번의 불합격이 매달려 있었지만, 217에는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았으니까. 불을 끄고 누우면 휴대폰 화면만 눈을 찔렀다. 나흘 뒤 면접 시간을 알리는 메일, 거기서 손가락을 조금만 내리면 여섯 달 전 받은 불합격 통지가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지우지도, 다시 열어보지도 못했다. 매일 밤 그 두 메일 사이 어딘가에서 화면을 껐고, 어둠 속에서 얇은 벽 너머 옆 칸 사람의 뒤척임을 들으며 잠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몇 년을 접어둔 상처를 가방 갈피에 넣어둔 채, 처음 만난 나에게 다정을 나눠주고 있었다. 무너진 담벼락 앞에서 셔터를 누르고, 며칠 못 갈 거라던 금붕어를 봉지째 두 손으로 받쳐 들면서.
“안 무서워요? 다시 시작하는 거.”
내가 묻자 하루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봤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몇 가닥 붙어 있었다.
“무서워요.”
그녀는 그 말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본 채로, 조용히 되돌려주었다.
“근데 정우 씨도… 무섭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배낭 어깨끈에 손을 넣어, 안에 접어둔 우산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서울 원룸 현관에 세워두고 온 낡은 삼단 우산이 생각났다. 도쿄에선 비 맞을 일 없다고 믿고 두고 온 우산. 나흘 뒤로 잡힌 면접 메일, 그 위에 여섯 달을 지우지 못한 불합격 메일. 그것들이 한꺼번에 어깨를 눌렀다.
처마 끝에서 떨어진 빗물이 봉지 위로 튀었다. 검은 꼬리가 그 소리에 놀란 듯 잠깐 멈췄다가 다시 돌았다.
“금붕어. 안 죽어요.”
하루가 조용히 말했다. 아까 내가 며칠 못 간다고 내뱉은 말에 대한, 한참 늦은 대꾸였다.
“데려갈 거예요. 가나자와까지.”
나는 그 작은 것이 그 먼 데까지,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좁은 물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제까지의 나라면 며칠이나 갈지 속으로 세어봤을 것이다. 이번엔 세지 않았다. 대신, 처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검은 꼬리가 가나자와의 물속에서 어떻게든 방향을 트는 걸, 하루가 봤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우산을 펴지 않았다. 젖은 어깨를 반 뼘쯤 붙이고 처마 밑에 서서, 골목이 물에 잠기는 걸 함께 봤다. 하루의 팔이 내 팔에 닿은 자리만 미지근했다. 빗소리가 얇은 처마를 그대로 통과해 우리 사이로 떨어졌다.
나흘 뒤면 나는 저 골목 끝으로 나가야 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아직 끊지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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