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단맛7화 / 전 18화10

2부 10년

7화. 박하가 녹는 시간

서인혜


“이번 달은 좀 많이 나왔네.”

지운이 형광펜 뚜껑을 이로 물어 뺐다. 관리비 고지서 위로 노란 줄이 그어졌다. 난방비 항목이었다. 그는 밑줄을 긋고 나서 그 숫자를 한 번 더 들여다봤다. 십이만 얼마, 하는 숫자였다. 지난달보다 사만 원쯤 올라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가.”

내가 받았다. 그게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식탁 유리 아래에는 지난달 고지서가 그대로 깔려 있었다. 그 위에 이번 달 것이 포개졌다. 우리는 한 장의 종이를 반씩 나눠 보는 사람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운은 자기 앞의 숫자에, 나는 내 앞의 숫자에. 형광펜 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멎자 부엌에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나는 식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잔은 이미 미지근했고, 감싸 쥐어도 손끝에 온기가 오지 않았다.

지운이 형광펜을 내려놓았다. 고지서를 세로로 한 번, 가로로 한 번 접어 봉투에 넣었다. 봉투 입구를 손톱으로 눌러 펴는 그 짧은 사이에, 나는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입술을 다무는 것을 봤다. 숨을 반쯤 들이켰다가 그냥 삼키는, 그런 얼굴이었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그 무렵 우리 사이에는 새로 생긴 규칙이 있었다. 아프게 할 것 같은 말은 삼킨다. 삼킨 자리를 숫자나 날씨로 덮는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니었는데, 둘 다 그것을 정확히 지켰다. 못 본 척하는 것도 규칙 안에 있었다.

봄이 지나고 지운의 여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저녁을 차리던 중이었다. 지운은 전화기를 귀에 대고 베란다로 나갔다. 유리문이 스르륵 닫혔고, 말소리는 유리에 막혀 웅웅거리기만 했다.

나는 국자를 든 채 그의 등을 봤다. 처음에는 어깨가 웃는 모양으로 들썩였다. “어, 그래? 언제?” 하는 입 모양이 유리 너머로 어렴풋이 잡혔다. 그러다 통화가 길어졌다. 들썩이던 어깨가 조금씩 내려앉았다. 한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가, 그 손을 다시 난간에 얹었다. 나는 국물이 넘는 것도 모르고 그 뒷모습만 읽고 있었다. 그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아닌지, 유리 이쪽에서 나는 자꾸 확인하려 들었다.

통화가 끝나고도 그는 들어오지 않았다. 화분 사이로 저녁 빛이 낮게 들어왔다. 그는 그 빛 속에서 휴대폰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엄지로 액정을 문질렀다. 아무것도 켜지 않은 채였다. 나는 상을 다 차리고 수저를 놓았다. 국이 두 번쯤 식었다 데워질 동안 그는 거기 서 있었다.

유리문이 열렸다.

“비 온대, 내일.”

나는 그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여동생이 둘째를 가졌다는 것. 그 애가 전화기 너머에서 오빠, 하고 웃었다는 것. 지운은 축하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끊고 나서 그 소식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할지 몰라 베란다에 서 있었을 것이다.

“우산 챙겨.”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를 아꼈다. 아니, 아낀다고 믿었다. 지운은 수저를 들었고, 나는 국그릇을 그의 앞으로 조금 밀어 주었다. 그날 밥상에서 오간 말은 비와 우산이 전부였다.

여름에 나는 안방 서랍을 정리하다가 그것을 발견했다. 태그도 떼지 않은 배냇저고리 한 벌이었다. 유산 전에 내가 미리 사둔 것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보이지 않아서, 나는 내가 어디에 넣었는지 잊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서랍 가장 안쪽, 겨울 스웨터 밑에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내가 둔 자리가 아니었다.

지운이 옮겨 둔 것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나는 스웨터를 들어내고 저고리를 꺼냈다. 두 손으로 폈다. 면은 얇았고, 서랍 안쪽 공기를 머금어 서늘했다. 소맷부리에 작은 매듭단추가 달려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 단추를 눌러 봤다. 미색 옷깃 안쪽에 종이 태그가 실로 매여 있었고, 거기 적힌 사이즈를 읽었다. 60. 신생아용. 나는 그 숫자를 소리 내지 않고 한 번 읽었다. 저고리를 다시 접었다. 처음 개어져 있던 접힌 선을 손끝으로 더듬어 그대로 맞췄다. 지운이 접어 둔 선이었다. 나는 그 선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스웨터 밑에 다시 밀어 넣었다. 서랍을 닫는 소리가 났고, 나는 그 앞에 잠깐 앉아 있었다.

지운은 그 저고리를 치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디서 났느냐고, 왜 거기 두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은 이상하게 정중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알았고,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넘어가지 않았다. 서로의 상처에 발끝이 닿지 않으려고 방 안에서 조심조심 걷는 두 사람 같았다.

가을이 오기 전 어느 저녁, 지운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젓가락 끝이 밥그릇 가장자리에 부딪는 소리가 났다.

“우리 그 얘기, 한 번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그 얘기’라는 말을 고르느라 잠깐 멈췄다. 그 멈춤이 나를 먼저 굳게 했다. 나는 그가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몸이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목 뒤가 서늘했고, 손에 든 숟가락이 국그릇 바닥에 닿은 채 멈춰 있었다.

“무슨 얘기.”

내가 되물었다. 국그릇에서 오르던 김이 어느새 사그라들어 있었다. 표면에 기름이 얇게 굳어 무늬를 만들었다.

지운은 나를 봤다. 그 눈이 내 얼굴 어디쯤에서 잠깐 머물렀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나는 그 눈을 피해 국그릇으로 시선을 내렸다. 굳은 기름 무늬를 숟가락 끝으로 건드렸다. 막지 않으면 그 말이 나를 정확한 곳에서 열어 버릴 것 같았고, 그렇게 열리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지운은 잠시 더 나를 보다가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아니야. 국 식겠다.”

그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밥을 다 먹었다. 그릇을 비웠고, 나는 설거지를 했고, 지운은 마른행주로 그릇을 닦아 찬장에 올렸다. 물소리와 그릇 부딪는 소리가 부엌을 채웠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운의 코트는 현관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방으로 가려고 지나칠 때, 오른쪽 주머니에서 얇은 부스럭 소리가 났다. 박하 알사탕 봉지였다. 예전에 그는 그 봉지를 꺼내 내 손바닥에 한 알을 굴려 주곤 했다. 언제부턴가 그는 그것을 내게 내밀지 않았고, 나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박하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의 주머니 안에서. 그 서늘한 단맛은 이제 각자의 입 안에서만 녹았다. 나는 방문을 닫으면서, 우리가 아직 무언가를 아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아끼는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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