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년
6화. 아무 소리도 잡히지 않던 검은 물결
환자 팔찌가 손목에서 자꾸 걸렸다. 얇은 플라스틱 띠에 내 이름과 병록 번호가 인쇄되어 있었고, 손목을 돌릴 때마다 그것이 뼈에 닿아 서걱거렸다. 나는 그걸 벗겨 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안쪽만 자꾸 밀어 넣었다. 손끝에서 소독약 냄새가 났다. 진료실에서 초음파 화면이 꺼지기 전, 아무 소리도 잡히지 않던 검은 물결을 나는 오래 들여다봤었다. 화면은 스위치 하나로 어두워졌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다.
복도는 밤인데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천장의 형광등 하나가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다. 나는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그 깜빡임을 세다가 그만두었다. 세어 봐야 다음 깜빡임이 온다는 것 말고는 알아낼 게 없었다. 의자 등받이가 등허리에 차가웠다. 앞쪽 간호사 스테이션에서는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인계를 하고 있었다. 몇 호실, 몇 시, 무슨 수치.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물속의 말소리처럼 뭉개져 들려왔다. 그 안에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이제 이 층에서 인계할 것이 남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운은 복도 끝 자판기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 종이컵이 툭 내려앉는 소리,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순서대로 들렸다. 그러고도 그는 한 박자 더 서 있었다. 자판기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파랗게 물들였고, 그는 컵을 꺼내지 않은 채 진열창의 캔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얼 고르는 게 아니라 그냥 거기 눈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를 내 손에 쥐여 주었는데, 온기가 손바닥까지 오는 데 한 박자가 걸렸다.
“따뜻할 때 마셔.”
나는 컵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김이 가늘게 올라와 흩어졌다. 그는 내 옆에 앉지 않았다.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자기 컵만 두 손으로 감쌌다. 우리 사이에 복도의 폭만큼 거리가 있었고, 젖은 리놀륨 바닥이 형광등 빛을 되쏘았다. 그가 발끝으로 바닥의 이음매를 툭툭 건드렸다. 신발 밑창이 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몇 번 났고, 그러다 멈췄다.
그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박하 알사탕 봉지가 부스럭거렸다. 익숙한 소리였다. 버스에서도, 사무실 계단에서도, 잠들기 전 침대 옆 협탁에서도 나던 소리. 그런데 그날은 봉지가 열리지 않았다. 그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게 코트 자락의 움직임으로 보였다. 꺼낼 듯 말 듯, 그는 그 안에서 멈춰 있었다.
“인혜야, 나는……”
그러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다음 말이 곧바로 오지 않았다. 그가 정확한 말을 찾을 때 늘 그렇듯 입술이 반쯤 벌어진 채로 멈췄고, 목젖이 한 번 오르내렸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그 짧은 어둠과 밝음 사이에 그의 얼굴이 한 번 지워졌다가 돌아왔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랐다. 다만 그 말이 오면, 그것이 나를 정확한 곳에서 열어 버릴 거라는 예감이 먼저 왔다. 열리면 안에 든 것이 쏟아질 것이고, 나는 그것을 다시 주워 담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아무것도 쏟지 않으려고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무릎 위 종이컵을 쥔 손가락에도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컵이 살짝 찌그러지며 표면에 주름이 잡혔다.
“괜찮아.”
내가 먼저 말했다. 낮게, 거의 혼잣말처럼.
“우리 둘 다 피곤하잖아.”
지운의 입이 열린 채로 멈췄다. 그가 삼킨 말이 목 어디쯤에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묻는 대신 무릎 위 종이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다 식어 있었다. 미지근하지도 않고, 물처럼 밍밍한 커피가 혀 뒤로 넘어갔다. 그 사이 그렇게 시간이 지나 있었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았다. 컵 가장자리에 내 입술이 닿았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았다.
지운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봉지 소리도 더는 나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벽에 기댔던 등을 떼면서, 그는 자기 컵의 커피를 한 번도 마시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린 사람처럼 컵 안을 들여다봤다.
“그래.”
그가 말했다.
“가자, 이제.”
나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가 하기 힘든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게 내가 막아 냈다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복도에서 우리 둘 다 더 무너지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어깨의 힘이 조금 풀렸고, 나는 그것을 안도라고 여겼다.
의자에서 일어서려는데 컵 바닥에 남은 커피가 흔들렸다. 얇은 검은 표면 위로 형광등이 한 번 더 지나갔다. 나는 그 컵을 복도 벽에 붙은 쓰레기통에 넣었다. 종이컵이 통 안쪽에 부딪는 둔한 소리가 났고, 그게 그날 밤 내가 낸 가장 분명한 소리였다. 손바닥에 남은 미지근한 자국을 나는 코트 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복도 끝에서 청소부가 밀대를 밀며 다가왔다. 회색 앞치마를 두른 나이 든 여자였다. 젖은 바닥에서 락스 냄새가 훅 올라왔다. 소독약 냄새 위로 그 냄새가 겹치자 코 안쪽이 시큰했다. 청소부는 우리 앞에서 밀대의 방향을 틀어 벽 쪽으로 붙었다. 지나가시라는 뜻이었다. 밀대가 지나간 자리의 바닥이 검게 젖어 형광등을 그대로 비췄다.
지운이 다가와 내 팔꿈치를 살짝 잡아 일으켰다. 그의 손은 여전히 미지근했다. 그의 코트에서 박하 냄새가 났다. 늘 나던 그 냄새였는데, 그날 밤 그는 끝내 사탕을 꺼내지 않았다. 봉지는 주머니 안에서 부스럭거리다 잠잠해졌고, 그대로 집까지 따라왔다.
우리는 나란히 복도를 걸어 나왔다. 젖은 바닥을 밟지 않으려고 두 사람 다 벽 쪽으로 붙어 걸었는데, 그 바람에 어깨가 몇 번 스쳤다. 스칠 때마다 그는 조금씩 몸을 비켜 주었다. 나도 비켜 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닿지 않으려고 애쓰며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그의 발소리와 내 발소리가 반 박자 어긋나 복도에 겹쳐 울렸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가 버튼을 눌렀다. 아래로 내려가는 화살표에 불이 들어왔다. 층수가 하나씩 줄어드는 동안 우리는 둘 다 그 숫자를 올려다봤다. 그가 삼킨 말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 뒤로 십 년 동안 한 번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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