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년
5화. 회양목 도장과 서늘한 박하
종로의 그 가게는 간판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지운이 나를 데려간 곳은 인사동 뒷골목의 오래된 인장 가게였다. 나무를 깎을 때 나는 냄새와 기계에 먹인 기름 냄새가 좁은 실내에 섞여 있었고, 문을 열자 그 냄새가 먼저 얼굴에 닿았다. 노인이 작업대 뒤에 앉아 있었다. 돋보기를 코끝까지 내리고 우리를 한 번 훑더니, 다시 손안의 나무토막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름이 뭐요.”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지운이 대답했다.
“서인혜요. 서, 사람 인, 은혜 혜.”
나는 그가 언제 내 이름의 한자까지 외웠는지 몰랐다. 서류에 적어 넣을 때 흘끗 본 걸 그대로 외웠는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유리 진열장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안에는 크기가 다른 도장들이 벨벳 위에 줄지어 누워 있었다. 어떤 것은 뿔로 만든 것 같았고, 어떤 것은 돌이었다. 나는 그 나란한 것들을 들여다보며, 저 안에 내 이름이 들어갈 자리 하나가 곧 생긴다는 사실을 어색하게 굴려 보았다.
노인이 회양목이 좋다고 했다. 결이 촘촘하고 잘 갈라지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지운은 진열대에 놓인 몇 개를 손끝으로 세워 보다가, 그중 결이 가장 곧게 내려간 것을 골랐다. 고르는 손이 신중해서, 나는 그가 이런 걸 처음 해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뭐든 오래 들여다보고 나서야 손을 대는 사람이었다.
새기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우리는 가게 앞으로 나왔다. 문 옆에 플라스틱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앉으니 등받이가 차가웠다. 지운이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손바닥을 펴 하나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긴장돼?”
“아니.”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었다. 나는 사탕을 받아 입에 넣었다. 서늘한 단맛이 혀 밑에 천천히 고였다. 그 맛이 퍼지고 나서야 나는 내 손끝이 차게 식어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라고 말한 입과 차가운 손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지운은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보고 있었다. 골목 끝으로 사람들이 지나갔고, 가게 안에서는 낮게 웅웅거리는 기계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멈추면 도장이 완성되는 거였다.
“나 원래 이런 거 잘 안 사.”
지운이 말했다.
“도장 같은 거?”
“응. 근데 이건 사 주고 싶었어.”
그는 이유를 덧붙이지 않았고, 나도 캐묻지 않았다. 사탕이 반쯤 녹는 동안 우리는 별말 없이 앉아 있었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때의 우리에게는 침묵도 아직 대화의 일부였다. 훗날 그 침묵이 벽이 되리라고는, 회양목 냄새를 맡으며 앉아 있던 그날의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기계 소리가 멎었다. 노인이 도장을 들고 나와 인주를 묻히더니, 옆에 놓인 흰 종이에 시험 삼아 눌러 보였다. 붉은 글자 세 개가 종이 위에 반듯하게 박혔다. 서, 인, 혜. 내 이름인데도 남의 것처럼 낯설고, 동시에 지나치게 정확했다. 나는 그 세 글자를 들여다보다가 목이 조금 메었다.
지운이 종이를 집어 반으로 접었다.
“평생 좋은 데만 찍자.”
그는 그 말을 진담 같은 톤으로 했다. 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니어서, 나는 웃어야 할 자리를 놓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접은 종이를 지갑 안쪽에 넣는 걸 보았다. 그 도장이 언젠가 좋지 않은 데에도 눌릴 수 있다는 생각은 그때 하지 않았다. 도장이란 원래 좋은 곳에만 찍는 물건인 줄 알았다.
다음 날 오후, 우리는 마포구청 민원실 창구 앞에 나란히 섰다. 번호가 불리고, 유리 아래 틈으로 혼인신고서를 밀어 넣었다. 직원이 서류를 훑더니 볼펜 끝으로 두 군데를 짚었다.
“도장 여기랑 여기요.”
지운이 먼저 자기 도장을 눌렀다. 다음이 내 차례였다. 나는 어제 받은 도장을 인주에 대고 종이에 눌렀는데, 힘이 한쪽으로 쏠려 글자 한 귀퉁이가 흐리게 번졌다.
“다시 찍을까요?”
직원이 물었다. 지운이 옆에서 낮게 웃었다.
“저 사람 원래 첫 번째는 잘 못해요. 두 번째부터 잘해요.”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고 싶었다. 첫 번째는 못하고 두 번째부터 잘한다는 말이, 도장을 두고 하는 말인지 다른 걸 두고 하는 말인지. 하지만 창구 앞이었고, 뒤에 사람이 서 있었다. 나는 옆자리에 도장을 다시 눌렀다. 이번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혔다.
떼는 순간 손끝에 인주가 붉게 묻었다. 지운이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내 손가락을 잡았다. 그의 손은 미지근했다. 붉은 자국을 닦아 내는 동안, 방금 인주를 묻힌 도장도 그 온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나무가 손안에서 따뜻했다.
민원실을 나오며 그가 말했다.
“이제 우리 부부네.”
사실인데도 그 문장은 어딘가 미리 연습한 대사처럼 들렸다. 나는 대답 대신 혀로 입안을 더듬었다. 어제의 박하가 아직 얇게 남아 있었다. 다 녹은 지 오래인데도 혀 안쪽 어딘가에 서늘한 기운이 걸려 있어서, 나는 그것을 삼키지 않고 굴렸다.
그날의 도장은 따뜻했다. 나는 그 온도를 오래 기억하지 못했다. 십 년 뒤 같은 도장을 가방 앞주머니 바닥에서 다시 꺼냈을 때, 나무는 이미 서늘하게 식어 있었고, 나는 그것이 언제부터 식기 시작한 건지 도무지 짚어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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