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단맛4화 / 전 18화1

2부 10년

4화. 박하사탕이 다 녹는 정거장

서인혜


그날의 141번은 서교동 삼거리를 통과하는 데만 신호를 세 번 받았다. 퇴근 무렵의 버스는 늘 그런 식으로 사람을 실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밖의 찬 공기가 발밑으로 밀려들었고, 그 위로 히터가 발등만 뜨겁게 데웠다. 정작 등 뒤와 목덜미는 서늘했다. 유리창에는 사람들의 숨이 얼어붙어 뿌옇게 서리가 앉았고, 누군가 손가락으로 문질러 놓은 자국 사이로 바깥의 붉은 미등이 번졌다 지워졌다.

나는 손잡이 대신 앞사람의 코트 등판에 이마를 반쯤 기대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 있기가 어려웠다. 속이 밑에서부터 밀려 올라왔다. 침을 삼켜도 입안에 쇠 맛이 돌았고, 삼킬수록 더 진해졌다. 버스가 정류장에서 출발할 때의 그 짧은 흔들림이 가장 나빴다. 눈을 감으면 어지럽고, 뜨면 창에 얼어붙은 서리가 흔들려서 더 어지러웠다. 나는 앞사람의 코트에서 나는 담배 냄새를 견디며, 다음 정류장까지만, 그다음 정류장까지만, 하고 셌다.

그때 옆에서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비닐을 뜯는 소리였다. 이어 손 하나가 내 시야 아래로 들어왔다. 남자의 손이었고, 손바닥 위에 흰 알사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거.”

그는 그 한마디만 했다. 나는 고개를 조금 들어 그를 봤다.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였고, 나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손만 내밀고 있었다. 낯선 사람의 손바닥이 내 앞에 그렇게 가까이 와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평소의 나라면 됐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사탕을 집었다. 지금 와서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낯선 손에서 무언가를 그렇게 쉽게 집어 들던 그때의 내가 잘 아는 사람 같지가 않다. 마치 그 무렵의 나는 아직 무엇에든 손을 뻗을 줄 알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혀 위에 사탕을 올리자 서늘한 기운이 먼저 왔다. 박하였다. 그 서늘한 것이 입천장을 지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뒤집히던 속을 아래로 눌러 앉혔다. 쇠 맛이 옅어졌다. 나는 그제야 숨을 길게 뱉었고, 유리창에 내 숨이 하얗게 번졌다.

“좀 낫죠.”

그가 앞을 본 채 물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목소리를 내면 다시 속이 밀려 올라올 것 같았다.

“멀미엔 박하가 나아요. 약보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톤이었다. 나는 웃어야 하나 잠깐 생각했고, 생각하는 사이에 웃을 자리를 놓쳤다. 그는 내가 놓친 것을 눈치채지 못한 얼굴로 창밖을 봤다.

버스가 다시 신호에 걸렸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각자의 창을 봤다. 그가 먼저 물었다. 이 버스를 자주 타느냐고. 나는 퇴근길에 탄다고 했다. 그는 자기도 이 노선을 탄 지 얼마 안 됐다고, 사무실을 이쪽으로 옮겼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물음에 나는 글을 손보는 일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는 잠깐 그 말을 곱씹더니, 남의 문장을 고치는 일이냐고 되물었다. 남의 오자를 지우는 일이라고 나는 정정했다. 그는 그건 좀 외로운 일 같다고, 역시 진담 같은 톤으로 말했다. 나는 이번에도 웃을 타이밍을 놓쳤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막히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그는 매일 이 시간대엔 이렇다고 했다. 그러곤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서 봉지를 꺼내 사탕 한 알을 자기 입에 넣었다. 봉지는 도로 주머니에 들어가면서도 한참 부스럭거렸다. 그 소리가 버스 엔진 소리 밑으로 얇게 깔렸다.

입안의 사탕이 점점 얇아졌다. 처음의 둥근 모서리가 닳아 혀 위에서 조각으로 부서졌고, 서늘한 맛도 그만큼 옅어졌다. 나는 그것이 완전히 녹기 전에 창밖을 봤다. 낯익은 간판이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었다. 벨을 눌러야 했다. 그런데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버스는 그 정류장을 지났고, 다음 정류장도 지났다. 두 개를 지나칠 동안 나는 벨 근처의 붉은 단추만 봤다.

내가 왜 누르지 않았는지 그때는 몰랐다. 속이 가라앉아서 다행이라고,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그 서늘함이 다 사라지는 게 아까웠던 것 같다. 사탕이 아니라, 사탕이 녹는 동안 옆에 서 있던 그 몇 분이.

결국 세 번째 정류장에서 나는 벨을 눌렀다.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그를 봤지만, 그는 이미 다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인사를 할까 하다가, 사탕 잘 먹었다는 말을 할까 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렸다.

버스가 떠난 자리에 찬 공기가 남았다. 나는 왔던 방향으로 걸어 되돌아갔다. 두 정거장은 걸어서 생각보다 멀었다. 발이 시렸고 코끝이 얼얼했다. 그런데 입안에는 아직 박하의 끝맛이 남아 있었다. 사탕은 다 녹았는데도 혀 안쪽 어딘가에 서늘한 기운이 얇게 걸려 있었다. 나는 그게 사라지는 게 아까워서 침을 함부로 삼키지 않았다. 삼킬 때마다 조금씩 옅어지는 그 맛을, 최대한 오래 붙들어 두려고 아껴 가며 삼켰다.

집까지 걷는 동안 나는 그 남자의 이름도,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제대로 묻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다시 볼 일도 없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다음 날 같은 시간에 같은 정류장에서 141번을 기다렸다. 그날의 나는 그런 걸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