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확인 기일
3화. 번진 숫자 뒤의 서늘함
바닥에서 왁스 냄새가 올라왔다. 아침에 누군가 닦아 놓은 리놀륨 위로 젖은 신발 자국이 겹쳐 있었고, 그 위에 소독약 냄새가 얇게 깔려 있었다. 병원 같기도 하고 관공서 같기도 했다. 둘 다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곳이었다.
의자는 셋씩 붙어 있었다. 우리는 가운데를 비우고 양 끝에 앉았다. 빈자리에 지운이 봉투를 내려놓을까 봐, 나는 가방을 먼저 그 위에 올려 두었다. 봉투는 그의 무릎에 있었다. 두 손을 그 위에 포갠 채, 그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전광판은 39에서 멈춰 있었다. 내 손안의 번호표에는 47이 찍혀 있었다. 잉크가 번져 7의 꼬리가 흐렸다. 나는 그 숫자를 손톱으로 한 번 눌렀다가 뗐다.
지하철에서 나온 국숫집 이야기는 아직 우리 사이에 떠 있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지운은 다시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여기까지 우리를 따라 들어와 빈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맞은편 부부가 서류를 사이에 두고 낮게 다투었다. 남자 쪽은 고개를 숙인 채 무릎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여자 쪽이 볼펜으로 종이를 두어 번 두드렸다. 딱, 딱.
“여기 이 날짜, 당신이 쓴 거잖아.”
여자가 종이 한 귀퉁이를 손끝으로 짚으며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려고 애쓰는 게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들렸다.
“기억 안 나.”
남자가 대답했다. 여자는 볼펜 뚜껑을 딸깍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그러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서류가 조금씩 남자 쪽으로 밀려가 있었다.
그 뒤로 대기실의 다른 소리들이 하나씩 도착했다. 오른쪽 끝에서 아기가 칭얼거리자 젊은 아빠가 유아차를 앞뒤로 흔들었고, 바퀴가 리놀륨에 닿아 끼익 소리를 냈다. 정수기가 물을 받는 소리가 짧게 났다가 그쳤다.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이 누군가에게 서류 뒷면에도 서명하라고 일러 주는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벽 쪽 의자에 앉은 노년의 남자는 서류 봉투를 지팡이 손잡이에 걸어 두고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여기 온 사람들은 다들 그 기술을 알았다. 시선이 스칠 것 같으면 미리 벽시계나 전광판이나 자기 신발 끝으로 눈을 옮겼다.
나도 벽시계를 봤다. 초침이 한 칸 밀릴 때마다 어깨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앉았다. 40까지는 아직 멀었고, 우리 번호까지는 그보다 더 멀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지운이 말했다. 나는 시계를 계속 봤다. 무슨 대답을 해도 그 문장은 국숫집 쪽으로 흘러갈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헤어지자는 그의 문장은 아직 살아 있었고, 나는 그걸 밟아 죽이고 싶지도, 살려 두고 싶지도 않았다.
지운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익숙한 부스럭거림. 그가 알사탕 봉지를 반쯤 꺼냈다. 아침 지하철에서 내가 거절한 그 봉지였다. 그는 봉지 입구를 손가락으로 벌리려다, 내 쪽을 흘긋 봤다. 그리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봉지가 접히는 소리가 작게 났다.
그 소리에 나는 십일 년 전 그 버스로 미끄러졌다.
퇴근길 141번이었다. 창밖으로 겨울 초저녁이 번지고 있었고, 히터에서 나온 마른 열기와 젖은 외투 냄새가 차 안에 뒤섞여 있었다. 만원이었다. 나는 손잡이도 잡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 흔들렸고, 속이 울렁거려 창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유리에 김이 서렸다가 내 이마 자국을 따라 둥글게 녹았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나를 두어 번 올려다봤다. 세 번째에 그가 주머니를 부스럭거리더니, 손바닥에 하얀 알사탕 하나를 올려 내밀었다.
“박하예요. 졸음 깨는 데 좋아요.”
그 말투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웃어야 하나, 정중히 거절해야 하나 재는 사이에 타이밍을 놓쳤다.
“얼굴이 하얘요. 이거 먹으면 좀 나아요. 저도 멀미하거든요.”
그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나는 결국 사탕을 받아 입에 넣었다. 혀 위로 단맛과 서늘함이 동시에 번졌다. 서늘한 쪽이 먼저였고, 단맛은 그 뒤에 천천히 따라왔다. 그가 자기 것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사탕만 굴렸다.
“이거 오래된 상표예요. 요즘 편의점엔 잘 없어서, 약국에서 사요.”
그가 봉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나는 어느 약국이냐고 물었고, 그 뒤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했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다는 것, 내가 벨을 누르려다 손을 도로 내렸다는 것, 두 정거장을 걸어 되돌아오는 동안 입안에서 사탕이 다 녹았다는 것, 그런데도 발끝이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는 것만 남아 있다.
전광판이 짧게 울렸다. 40으로 넘어갔다.
나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볼펜 소리가 멎어 있었다. 맞은편 부부는 다툼을 끝낸 게 아니라 지친 것 같았다. 여자는 서류를 봉투에 도로 넣고 있었다. 우리 번호까지는 아직 일곱 개가 남아 있었다.
지운은 여전히 봉투 위에 손을 포갠 채였다. 아침 내내 그 자세였다. 계단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그는 자기 손에 무언가를 반듯하게 얹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봤다. 눈가에 십 년 사이 늘어난 주름이 있었고, 그 주름은 웃을 때 생기는 자리였다. 요즘엔 그가 웃는 걸 본 기억이 없는데도.
아침 지하철에서 나는 그가 내민 사탕을 받지 않았다. 손을 반쯤 올렸다가, 다시 무릎으로 내렸다. 이제 와 그 손이 왜 도로 내려갔는지 알 것 같았다. 받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받아서 혀 위로 그 서늘함과 단맛이 다시 번지면, 십일 년 전 그 버스가 통째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러면 이 대기실에서, 서로 눈을 피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얼굴부터 무너질 것 같았다. 그게 무서워서 손을 오므렸다.
나는 지운의 코트 주머니를 봤다. 봉지가 접힌 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는 그걸 십일 년째 갖고 다녔다.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 아침까지,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는 습관이었다. 언제부터 그 봉지가 나를 향하지 않게 되었는지 헤아려 보려 했지만, 경계가 어디였는지 짚이지 않았다.
“국숫집 말인데.”
지운이 앞을 본 채 말했다. 단어를 하나 고르고, 한 박자 쉬고, 다음 단어를 놓는 식이었다.
“없어졌으면, 그냥 아무 데나 가도 돼.”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안의 번호표를 다시 봤다. 잉크가 번진 47. 그 뒤로 남은 일곱 개의 숫자가 우리와 판사 사이에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줄이 다 지나가고 나면 어떤 이름이 불릴지 나는 알고 있었고, 그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 이 방이 조금 더 오래 우리를 붙잡아 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주 잠깐, 서늘하게 지나갔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