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확인 기일
2화. 한 정거장 늦게 도착하는 감정
“엘리베이터, 고장 났어.”
지운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건너왔다. 나는 현관문을 잠그고 열쇠를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다. 도장이 든 봉투가 가방 바닥에서 각지게 배겼고, 나는 그 각을 손등으로 눌러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6층부터 1층까지, 지운이 반 층 앞서고 내가 반 층 뒤였다. 그의 구두 소리가 층계참에서 한 번씩 끊겼다. 발을 맞춰 걷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십 년 동안 그렇게 걸었다. 나란히, 그러나 서로의 리듬에 걸리지 않을 만큼 어긋나서.
승강장은 아침의 끝물이라 사람이 성겼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한 차례 빠져나간 뒤의 6호선은 조명만 밝고 공기는 식어 있었다. 우리는 스크린도어 앞에 섰다. 나는 봉투를 든 쪽 어깨를 코트 안으로 당겼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손이 먼저 그렇게 했다.
열차가 들어왔다. 터널 안쪽에서 밀려온 바람에 지운의 코트 자락이 한 번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오른쪽 주머니가 여전히 불룩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눈을 뗐다.
문이 열리자 우리는 반 걸음씩 어긋나 탔다.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었다. 손잡이 하나만큼 떨어져 서는 것도 몸이 알아서 했다. 자리가 두 칸이나 비어 있었다.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둘 다 앉지 않았다. 앉으면 어깨가 닿는 거리이거나, 아니면 마주 봐야 하는 거리였고, 우리는 그 둘 다를 피하는 법을 오래전에 익혔다.
지운은 오른쪽 창을 봤다. 나는 왼쪽 창을 봤다. 검은 유리에 그의 옆얼굴이 비쳤다. 터널 조명이 지나갈 때마다 그 얼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다. 진짜 얼굴보다 유리에 비친 쪽이 보기 편했다. 눈이 마주쳐도 유리 속에서는 마주친 게 아니라고 우길 수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머니 안에서 봉지가 접히고, 딱딱한 것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 이어서 아주 작게, 비닐이 비틀리는 소리. 알사탕 하나를 까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의 순서를 다 알았다. 십이 년째 같은 소리였다.
박하 냄새가 건너왔다. 낡은 히터에서 나오는 미지근한 바람에 섞여, 아주 옅게. 나는 그 냄새를 십 년 넘게 맡았다. 그리고 이 열차 안에서야, 내가 그 냄새를 사랑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알고 나니 코끝이 시렸다. 감정은 늘 이렇게 한 정거장 늦게 도착했다.
“점심은,”
지운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멈췄다. 한 정거장어치쯤 되는 침묵이었다. 열차가 다음 역으로 미끄러지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문장의 뒷부분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었다.
“먹고 헤어지자.”
유리에 비친 그의 입가는 움직이지 않았다. 웃지도, 굳지도 않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판별할 수 있는 단서를 그는 언제나 이렇게 지웠다. 웃어야 할 타이밍을 나는 늘 놓쳤다. 이번에도 놓쳤다.
“…뭘 먹게.”
나는 문장을 끝까지 맺지 않았다. 물음표를 달지도 못했다. 뭘 먹게, 다음에 와야 할 말들이 목 안에서 흩어졌다. 이런 날에. 도장 찍고 나와서. 무슨 얼굴로. 그 어느 것도 소리가 되지 못했다.
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봉지에서 사탕 하나를 꺼냈다. 유리에 그의 손이 비쳤다. 손바닥을 펴고, 그 위에 흰 사탕을 올리고, 내 쪽으로 반쯤 내밀었다. 십이 년 전과 같은 동작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그 사탕을 받았다. 받고 나서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다.
이번에는 받지 않았다.
나는 유리 속에서 그 손을 봤다. 실제로 고개를 돌려 보지 못했다. 손바닥 위의 사탕이 잠깐 그 자리에 머물렀다. 지운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재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배려인지 체념인지 나는 끝내 구분하지 못했다.
손이 도로 들어갔다. 사탕은 다시 주머니 속으로. 봉지가 한 번 더 부스럭거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방금 내가 또 하나를 물러섰다는 걸 알았다. 상처받기 전에 먼저 뒤로 빼는 발. 상대가 내민 것을 거절로 갚는 오래된 손버릇. 나는 지운의 침묵을 언제나 거절로 번역했고, 오늘은 그가 내민 손을 내가 거절했다. 순서가 바뀌었을 뿐, 방식은 같았다.
지운은 다시 창밖을 봤다. 아니, 창밖을 보는 자세로 돌아갔다. 그의 턱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고 있었다. 박하 냄새가 조금 더 진해졌다.
안내 방송이 나왔다. 다음 역 이름이 흘러나오고, 문이 열릴 방향이 안내됐다. 우리가 내릴 역은 아니었다. 아직 몇 정거장 남아 있었다. 나는 창밖의 어둠이 아니라 유리에 비친 두 사람을 봤다.
나란히 선 남자와 여자. 코트를 입고, 손잡이 하나만큼 떨어져서, 각자 반대편 창을 보는. 유리 속의 두 사람은 낯설었다. 누가 봐도 오래 함께 산 사이 같았고, 동시에 누가 봐도 남 같았다. 이혼하러 가는 사람들 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다투는 부부의 소란도, 우는 사람의 젖은 숨소리도 없었다. 히터 바람과 사탕 굴리는 소리, 그리고 다음 역을 알리는 방송뿐이었다.
문이 열렸다. 아무도 타지 않았고,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열차가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어디, 국숫집 있었잖아.”
지운이 말했다. 나는 그가 아직 그 대화를 끝내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점심을. 먹고. 헤어지자. 그는 그 문장을 진심으로 붙들고 있었다. 나는 유리 속의 그를 봤다. 국숫집. 우리가 신혼 때 자주 가던, 지금은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 그 집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아무 국숫집이나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대답을 미뤘다. 미뤘다기보다, 대답을 찾지 못했다. 열차가 우리를 실은 채 다음 역을 향해 달렸고, 나는 그 국숫집이 아직 그 자리에 있을지를, 도장을 찍고 나온 두 사람이 마주 앉아 국수를 먹는 장면이 가능한 일인지를, 조용히 헤아리고 있었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