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11화 / 전 33화6

2부 런웨이의 끝

11화. 빈칸의 정적

서지운


토요일이었다.

나는 식탁에 노트북을 펴놓고 정 이사에게 보낼 자금 계획서를 열어두고 있었다. 남은 잔고에서 이 주 뒤 나갈 급여를 빼고, 다시 카드 결제일을 얹어 셈했다. 숫자가 자꾸 어긋나서 나는 커서를 같은 셀에 두 번 세 번 갖다 댔다. 몇 만 원 단위가 맞지 않았다. 그 몇 만 원이 이상하게 나를 붙들었다.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은수가 침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발치에 캐리어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회색 하나, 검은색 하나. 지퍼는 끝까지 채워져 있었다. 바퀴가 마룻바닥에 닿아 있었다. 짐을 싸는 소리를 나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 그 아침 내내 나는 몇 만 원의 차이만 듣고 있었던 것이다.

“나 며칠 언니 집에 가 있을게.”

은수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단정했다. 화도, 떨림도 없었다. 마치 우유 떨어졌으니 사 올게, 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기사 때문이면 곧 정리돼. 다음 주에 정 이사랑 조율하면 오해는 풀리고, 그럼—”

“그 얘기 아니야.”

은수가 내 말을 잘랐다. 그제야 나는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반만 덮은 건, 내 손이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아서였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급여일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세고 있었다. 나는 그걸 멈추지 못하는 나 자신이 조금 두려웠다.

은수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채 나를 오래 봤다. 나를 관찰하는 눈이었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이미 결론을 낸 눈.

“당신이 망해서 가는 게 아니야.”

“안 망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은수가 옅게 웃었다. 비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지친 사람이 짓는 얕은 웃음이었다.

“망하는 중에도, 내가 한 번도 안 보였어.”

나는 뭐라도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머리는 딴 데로 갔다. 이 사람이 나가면 관리비가 얼마나 줄까. 이번 달 카드값을 어디서 당겨 막지. 두 사람 쓰던 집을 한 사람이 쓰면 고정비가 얼마나 빠지나. 그 계산이 저절로, 아주 능숙하게 굴러갔다. 아내가 캐리어를 세워두고 서 있는데 나는 그 아내를 비용 항목에서 지우고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닫힌 입 안에서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팔 년 전 청담동 그 식당. 은수가 물었다. 그 미래는 언제 와. 나는 대답 대신 촛불을 불어 껐다. 대답을 촛불로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지운 건 대답이 아니라 은수의 물음 그 자체였다. 그날 이후로 은수는 같은 걸 여러 방식으로 물었고, 나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껐다.

“어머님 기일에 못 내려간 거.”

은수가 문턱을 넘으며 말했다.

“당신은 삼백만 원 보내면 끝이라고 생각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그 송금 메모칸, 비어 있었어. 내가 봤어. 계좌 확인하다가.”

빈칸. 나는 그 빈칸을 왜 채우지 못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적을 말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엄마한테 건넬 게 삼백만 원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메모칸에 무슨 말을 적어야 그 돈이 돈이 아닌 게 되는지, 나는 몰랐다. 몰라서 비워뒀다. 비워둔 걸 아무도 못 볼 거라 여겼다. 은수는 봤다.

은수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신발을 신는 동안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붙잡아야 한다고. 붙잡는 게 어떤 건지 몸이 기억을 더듬었다. 손을 뻗고, 팔을 잡고,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 그런데 붙잡을 손에 쥐여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늘 손에 뭔가를 쥐고 있어야 사람을 붙들 수 있다고 믿어온 사람이었다. 보너스, 저녁값, 송금액. 지금 내 손엔 반쯤 덮인 노트북뿐이었다.

“당신 잘못되라고 가는 거 아니야.”

은수가 신발 끈을 매만지며 말했다. 원망이 아니라 통보였다. 그게 더 아팠다. 원망은 아직 무언가 기대가 남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캐리어 바퀴가 굴렀다. 회색과 검은색이 나란히 현관을 지나 복도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음이 났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다음은 정적이었다. 아버지가 부도 나던 해, 무언가 사라진 집에 남던 정적과 닮은 것이었다. 그때는 어렸고, 지금은 그 정적을 내가 만들었다.

나는 한참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일어서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어나서 갈 데가 없어서였다.

결국 나는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화면에는 자금 계획서가 그대로 떠 있었다. 아까 맞지 않던 그 몇 만 원의 셀. 커서가 빈칸 위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켜졌다 꺼졌다, 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그 빈칸에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알았다. 숫자였다. 숫자라면 나는 아직 채울 수 있었다.

손끝을 키보드에 올렸다. 그런데 방금 은수가 말한 그 다른 빈칸이, 삼백만 원 옆의 비어 있던 메모칸이 자꾸 이 셀 위로 겹쳐 보였다. 나는 둘 다 채우지 못했다. 하나는 채우는 법을 몰라서, 하나는 채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서.

거실 불은 켜져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처럼 등을 조금 굽히고 앉아 있었다. 식탁 위 노트북에서 커서만 빈 셀 위를 오갔다. 손끝은 키보드에 얹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집 안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에서 화면의 작은 세로선 하나만 혼자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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