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은 밤새 갈아야 한다12화 / 전 18화0

3부 타는 것들

12화. 불빛을 죽이지 않는 밤

서지안


휴대폰 화면 위쪽에 배터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충전기를 꽂지 않은 채 통화 기록을 손끝으로 밀어 올렸다. 노트를 덮은 손이 아직 종이 냄새를 달고 있었고, 그 손으로 유리 위를 문지르니 화면에 옅은 지문이 번졌다. 이 달, 저 달, 작년, 재작년. 화면이 위로 흐를수록 ‘엄마’라는 이름이 줄줄이 딸려 올라왔다.

붉은 글씨로 부재중. 그 옆에 시각이 붙어 있었다. 밤 아홉 시 사분. 아홉 시 오십일분. 열 시 이분. 어느 것 하나 낮 시각이 없었다. 가게 불판을 마지막으로 긁어내고, 앞치마를 벗고, 손을 씻은 다음이었을 것이다. 하루의 기름을 다 밀어낸 손으로 딸의 번호를 눌렀을 시간. 나는 그 시각들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 내려갔다.

한 달에 스물 몇 통이 뜬 화면도 있었다. 그중 한 달은 부재중만 열일곱이었다. 나는 그 열일곱을 세다가 멈췄다. 그 무렵 나는 신간 마감이었다. 저자가 원고를 이 주 늦게 넘겼고, 표지가 세 번 엎어졌고, 인쇄소가 파업 직전이었다. 그런 문장들이 핑계가 되어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밤마다 책상 위에서 진동하는 전화기를 손바닥으로 눌러 뒤집었다. 화면을 바닥으로 돌려놓으면 불빛이 죽었다. 진동이 책상을 긁고 지나가는 소리만 남았고, 그 소리가 그치면 나는 다시 남의 원고로 눈을 돌렸다.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 받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나를 설득하며 살았다.

옆에 펼쳐둔 둘째 권을 당겨왔다. 흉터의 겨울을 지나 몇 장 뒤, 글씨가 눈에 띄게 힘을 뺀 대목이 있었다. 획이 가늘고, 끝이 흐렸다. 나는 그 줄을 소리 내지 않고 읽었다.

지안이한테 짐 되기 싫다. 전화 안 하는 게 잘 사는 증거겠지.

그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앞줄보다 볼펜을 눌러쓴 자국이 깊었다.

바쁜 게 좋은 기다. 바쁜 게.

나는 노트를 휴대폰 옆에 나란히 놓았다. 왼쪽에는 내가 뒤집어 죽인 전화들이, 오른쪽에는 그 전화를 스스로 삼킨 여자가 있었다. 딸이 안 받는 밤마다 엄마는 안 받는 게 아니라 잘 사는 거라고 적었다. 나는 못 받는 척했고, 엄마는 안 거는 척했다. 둘 다 상대에게 손이 닿지 않는 쪽을 골라 서 있었다.

재작년 추석이 떠올랐다. 그해에는 엄마가 걸기 전에 내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이번 명절엔 못 내려갈 것 같아. 일이 많아서. 답이 오지 않았고, 대신 조금 뒤 전화가 울렸다. 나는 그때는 진동을 뒤집지 않고 받았다.

“지안아, 됐다 마. 바쁜데 뭐하러 오노.”

목소리가 짧았다. 서운함을 미리 지우고 건 목소리였다. 나는 그 짧음에 안도했다.

“이번엔 진짜 일이 많아서.”

“밥은 뭇나.”

“응. 먹었어.”

그날도 편의점 김밥이었다. 계산대 옆 온장고에서 꺼낸, 비닐이 살짝 뜨거운 김밥. 나는 먹었다고만 했다. 엄마는 그래 됐다, 하고 끊었다. 통화는 일 분을 넘기지 않았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홀가분했다. 명절 하나를 무사히 건너뛰었다는 홀가분함. 그 감각이 지금은 목 안쪽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삼켜지지도 뱉어지지도 않는 자리에.

나는 다시 통화 기록으로 손을 옮겼다. 붉은 부재중들 사이를 더 내려갔다. 그러다 손이 멈췄다. 엄마의 부재중 사이사이에, 내 것으로 표시된 발신이 한둘 섞여 있었다. 통화 시간이 없었다. 걸었다가 연결되기 전에 내가 끊은 것들이었다. 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이었다. 나는 그 밤들을 기억해 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밤, 원룸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엄마 번호를 눌렀던 밤. 신호가 가기 시작하면 심장이 먼저 뛰었다. 무슨 말을 하지. 미안하다고 하면 엄마가 뭐가 미안하노 할 테고, 그러면 나는 또 아무 말도 못 할 테고. 그 계산이 신호음보다 빨랐다. 나는 통화 버튼을 다시 눌러 끊었다. 걸고 싶어서 걸었다가, 걸 수 있어서 끊었다.

회피를 나는 효도라고 불렀다. 안 내려가는 것이 엄마를 편하게 하는 거라고, 돈을 부치는 것이 곁에 있는 것보다 낫다고. 엄마는 침묵을 배려라고 불렀다. 안 거는 것이 딸을 자유롭게 하는 거라고, 잘 사는 증거라고. 우리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같은 짓을 했다. 노트와 휴대폰이 나란히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고, 나는 어느 쪽도 덮지 못했다.

창문 틈으로 바람이 얇게 들어왔다. 그 바람에 곱창 익는 냄새가 실려 있었다. 이 시각까지 어느 화덕엔가 불이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스무 해 전, 아홉 시 넘어 딸에게 전화를 걸던 엄마의 손에서도 이 냄새가 났을 것이다. 나는 그 냄새가 방 안으로 번지도록 창을 닫지 않았다.

휴대폰을 뒤집었다. 화면이 바닥을 향하자 방이 조금 어두워졌다. 늘 하던 대로였다. 진동을 죽이고, 불빛을 죽이고, 그다음엔 아무 일도 없던 척 잠드는 일. 나는 손을 그 위에 얹은 채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다시 뒤집었다. 화면이 켜지며 엄마의 이름이 맨 위에 떠올랐다. 붉은 부재중이 아니라, 그냥 이름이었다.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지금은 병실이 소등됐을 시각이었다. 엄마는 잠들었거나, 아니면 어둠 속에서 천장을 보고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나는 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아직 몰랐고, 가방 속에는 아직 손대지 못한 마지막 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뗐다. 화면은 끄지 않았다. 불빛이 벽등과 나란히, 이번에는 죽지 않고 켜진 채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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